‘부하를 살려라’ VS ‘지휘 계통’ 사이…‘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던 함장의 확진 판정

입력 2020.04.07 (11:42) 수정 2020.04.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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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정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면 해고된다는 것입니다."

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인 척 슈머 의원의 말입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세가 미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호 승조원에게까지 미쳐 배 안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죠. 항공모함에서 확진자 발생은 지난달 24일을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급기야 함장인 크로지어(Brett E. Crozier)대령이 군 당국에 하선을 요청했고, 며칠 뒤엔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려 '이미지 손상'과 '지휘계통 문란'을 이유로 보직해임된 상탭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척 슈머 의원이 '애국자'라 부르면서 한 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캡처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캡처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승조원 보호 못할 것"

미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그가 해군에 보낸 4쪽짜리 편지 내용을 단독으로 입수했다면서 보도한 게 현지시간으로 지난달 31일인데요, 보도된 편지 내용을 보면 "하선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면서 "전시도 아닌데 승조원들이 죽을 이유가 없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자산인 승조원들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함장의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보도 닷새 전인 지난달 26일부터 루즈벨트 항공모함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들이 미 언론을 통해 짤막하게나마 보도된 것에 비춰보면, 함장이 보낸 편지의 내용까지 공개된 배경엔 그 5일간 함장이 기대했던 것만큼 군 당국의 움직임이 신속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승조원 전원을 하선시켜 달라는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같이 상세한 편지 내용 공개를 결심하게 된 건 지휘관으로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선택으로도 보입니다.

[사진 출처 : AP=연합뉴스][사진 출처 : AP=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 "편지 쓴 것은 끔찍한 행동...문학 수업시간 아냐"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그를 보직해임한 해군장관(직무대행)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었다며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편지 유출'을 지휘계통을 어기고 군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사례로 규정한 것이죠.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4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편지를 쓴 건 끔찍한 행동이었다" "이건 문학 수업시간이 아니다." "그는 핵 추진 항공모함을 이끄는 선장이고 편지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됐었다"고 말했습니다. 미 언론들은 이 발언에 비춰, 트럼프 대통령이 크로지어 함장과 편지의 언론 공개 사실을 보고받고, 어떤 형태로든 그의 해임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보고 있습니다. 척 슈머 의원이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면 해고된다"고 한 배경으로도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에스퍼 국방장관의 이런 발언을 놓고 "지휘계통과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의 논리에 비춰보면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라는 반응도 있습니다. 에스퍼 장관이 해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해도 군정 책임자로서 해군장관 명의의 보직해임을 문제삼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더우기 대통령의 의중까지 실렸다면 말이죠. 하지만 미 언론들은 크로지어 함장이 어떤 형태로든 항공모함의 상황을 외부에 알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승조원 전체가 코로나 19에 감염될 큰 위기를 벗어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로이터 통신의 6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모들리 해군장관 대행은 크로지어 함장의 행위는 "일종의 배신" "멍청한 행동"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의적으로 유출했다"면서 법적인 조치도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요. 미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의회에서 국방부 조사 움직임이 일고 있고,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바이든 전 부통령이 크로지어 함장 해임을 '불법적 행위'로 규정한 데 따른 대응으로도 보입니다.

'임무수행'과 '지휘계통 준수'는 군인으로서는 거역하기 힘든, 따라야 할 영역입니다. 그러나 향후 실체적 진실이 더 규명된다면, 당시 임무 수행의 긴박성, 절차적 정당성과 지휘계통을 통한 보고의 적절성 여부, 현장 지휘관으로서 내릴 수 있는 권한의 범위 등이 폭넓게 조명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창궐 상황 등에 대응한 매뉴얼 존재 여부까지 말이죠. 코로나19로 초래된 전례없는 상황을 다루는 대응 방식과 처방 역시 전례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매뉴얼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은 존중될 수 있고 또 존중돼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사진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승조원과 조종사, 해병대 병력까지 5천명 '감염위기'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항모 루즈벨트에는 배와 항상 함께하는 승조원들은 물론, 해병대 병력까지 승선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축구장 몇배에 달한다는 항공모함이라고 해도 전 병력이 24시간 갑판 위에 나와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 이상, 감염력이 일반 독감 바이러스의 수백 배에 달하는 코로나19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봐야합니다. 코로나 19가 배 안에서 5천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모두 덮치는 건 시간 문제였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군 당국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결정을 머뭇거렸고, 결국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함장이 '결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trt world now 유튜브 캡처trt world now 유튜브 캡처

"캡틴 크로지어"...떠나는 지휘관에 마지막 경의

승조원들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공개 영상을 보면, 직위를 박탈당한 크로지어 함장이 배에서 내려 차에 오를 때까지 부하들이 모두 갑판에 나와 떠나는 지휘관을 향해 '우리를 살렸다'며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캡틴 크로지어"를 외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군인으로서 자신들을 살리고 떠나는 지휘관에게 예를 갖춰 경의를 표하는 순간입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보기 힘든 광경인 것이죠.

지금까지 항모 루즈벨트에서 나온 코로나19 확진자는 170여 명입니다.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승조원들을 살리고 보직해임된 크로지어 함장, '캡틴 크로지어' 역시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보직해임이 됐지만 계급이 박탈되거나 군에서 쫓겨나지 않아서 부하들을 병상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군인인 그나 부하들 역시 현장에서 다시 만나길 더 바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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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하를 살려라’ VS ‘지휘 계통’ 사이…‘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던 함장의 확진 판정
    • 입력 2020-04-07 11:42:26
    • 수정2020-04-07 13:51:29
    취재K
"이번 행정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면 해고된다는 것입니다."

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인 척 슈머 의원의 말입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세가 미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호 승조원에게까지 미쳐 배 안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죠. 항공모함에서 확진자 발생은 지난달 24일을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급기야 함장인 크로지어(Brett E. Crozier)대령이 군 당국에 하선을 요청했고, 며칠 뒤엔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려 '이미지 손상'과 '지휘계통 문란'을 이유로 보직해임된 상탭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척 슈머 의원이 '애국자'라 부르면서 한 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캡처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승조원 보호 못할 것"

미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그가 해군에 보낸 4쪽짜리 편지 내용을 단독으로 입수했다면서 보도한 게 현지시간으로 지난달 31일인데요, 보도된 편지 내용을 보면 "하선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면서 "전시도 아닌데 승조원들이 죽을 이유가 없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자산인 승조원들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함장의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보도 닷새 전인 지난달 26일부터 루즈벨트 항공모함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들이 미 언론을 통해 짤막하게나마 보도된 것에 비춰보면, 함장이 보낸 편지의 내용까지 공개된 배경엔 그 5일간 함장이 기대했던 것만큼 군 당국의 움직임이 신속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승조원 전원을 하선시켜 달라는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같이 상세한 편지 내용 공개를 결심하게 된 건 지휘관으로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선택으로도 보입니다.

[사진 출처 : AP=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 "편지 쓴 것은 끔찍한 행동...문학 수업시간 아냐"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그를 보직해임한 해군장관(직무대행)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었다며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편지 유출'을 지휘계통을 어기고 군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사례로 규정한 것이죠.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4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편지를 쓴 건 끔찍한 행동이었다" "이건 문학 수업시간이 아니다." "그는 핵 추진 항공모함을 이끄는 선장이고 편지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됐었다"고 말했습니다. 미 언론들은 이 발언에 비춰, 트럼프 대통령이 크로지어 함장과 편지의 언론 공개 사실을 보고받고, 어떤 형태로든 그의 해임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보고 있습니다. 척 슈머 의원이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면 해고된다"고 한 배경으로도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에스퍼 국방장관의 이런 발언을 놓고 "지휘계통과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의 논리에 비춰보면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라는 반응도 있습니다. 에스퍼 장관이 해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해도 군정 책임자로서 해군장관 명의의 보직해임을 문제삼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더우기 대통령의 의중까지 실렸다면 말이죠. 하지만 미 언론들은 크로지어 함장이 어떤 형태로든 항공모함의 상황을 외부에 알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승조원 전체가 코로나 19에 감염될 큰 위기를 벗어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로이터 통신의 6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모들리 해군장관 대행은 크로지어 함장의 행위는 "일종의 배신" "멍청한 행동"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의적으로 유출했다"면서 법적인 조치도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요. 미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의회에서 국방부 조사 움직임이 일고 있고,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바이든 전 부통령이 크로지어 함장 해임을 '불법적 행위'로 규정한 데 따른 대응으로도 보입니다.

'임무수행'과 '지휘계통 준수'는 군인으로서는 거역하기 힘든, 따라야 할 영역입니다. 그러나 향후 실체적 진실이 더 규명된다면, 당시 임무 수행의 긴박성, 절차적 정당성과 지휘계통을 통한 보고의 적절성 여부, 현장 지휘관으로서 내릴 수 있는 권한의 범위 등이 폭넓게 조명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창궐 상황 등에 대응한 매뉴얼 존재 여부까지 말이죠. 코로나19로 초래된 전례없는 상황을 다루는 대응 방식과 처방 역시 전례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매뉴얼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은 존중될 수 있고 또 존중돼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승조원과 조종사, 해병대 병력까지 5천명 '감염위기'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항모 루즈벨트에는 배와 항상 함께하는 승조원들은 물론, 해병대 병력까지 승선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축구장 몇배에 달한다는 항공모함이라고 해도 전 병력이 24시간 갑판 위에 나와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 이상, 감염력이 일반 독감 바이러스의 수백 배에 달하는 코로나19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봐야합니다. 코로나 19가 배 안에서 5천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모두 덮치는 건 시간 문제였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군 당국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결정을 머뭇거렸고, 결국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함장이 '결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trt world now 유튜브 캡처
"캡틴 크로지어"...떠나는 지휘관에 마지막 경의

승조원들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공개 영상을 보면, 직위를 박탈당한 크로지어 함장이 배에서 내려 차에 오를 때까지 부하들이 모두 갑판에 나와 떠나는 지휘관을 향해 '우리를 살렸다'며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캡틴 크로지어"를 외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군인으로서 자신들을 살리고 떠나는 지휘관에게 예를 갖춰 경의를 표하는 순간입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보기 힘든 광경인 것이죠.

지금까지 항모 루즈벨트에서 나온 코로나19 확진자는 170여 명입니다.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승조원들을 살리고 보직해임된 크로지어 함장, '캡틴 크로지어' 역시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보직해임이 됐지만 계급이 박탈되거나 군에서 쫓겨나지 않아서 부하들을 병상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군인인 그나 부하들 역시 현장에서 다시 만나길 더 바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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