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아이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입력 2020.04.09 (07:01) 수정 2020.04.1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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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_가해자면_너는_창녀다

'n번방'과 '박사방' 등 디지털 성범죄를 방관해 온 대화방 참가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이에 반박하는 성격의 해시태그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피해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요지의 전형적인 '2차 가해' 성격을 띤 운동입니다. 일부 유튜버는 피해자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는 영상을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이렇듯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부의 시선 때문에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혹여나 자식이 자신을 탓하며 이중으로 상처받진 않을까 우려합니다.

KBS 취재진은 상담기관의 협조를 받아, 미성년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부모 3명과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든,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그대로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성년 성폭행' 전력…전자발찌 찬 와중에 접근

"제 딸은 13살입니다. 게임을 하던 중 "버스를 태워주겠다"는 말을 들었대요.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동참하자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라더군요. 그 말에 솔깃한 딸은 상대와 함께 게임을 했고, 채팅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9개월간 교제했습니다.

가해자인 상대는 아이와 연락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나체 사진을 아이에게 지속해서 보냈어요. 그러면서 딸에게도 유사 성행위 영상과 나체 사진을 요구했습니다. 회유와 협박 끝에 아이는 결국 상대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보내면 오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된 뒤, 알고 보니 가해자는 만 13세 미만을 성폭행해 이미 실형을 받은 전력이 있는 25살 남성이었습니다. 경찰 조사 당시 전자발찌도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게임이라는 열린 공간 안에서 성범죄자의 표적이 되기란 참 쉬운 것 같습니다."


■불안한 심리 이용…"그루밍 인지 못 해"

"딸의 자위 영상을 지속해서 받아본 상대는 의대생이라더군요. 당시 제 딸은 중학교 3학년, 16살이었습니다. 아이가 호기심에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 공부와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해주겠다며 접근을 했다고 합니다.

딸은 당시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가해자는 그 점을 잘 포착했어요. 딸이 어려워하는 과목 공부를 도와주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2개월간 연락을 지속하면서 딸의 비밀과 고민을 알아냈어요. 이걸 빌미 삼아,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유사 성행위 영상과 나체 사진을 요구했습니다.

경찰에 신고한 뒤, 딸은 피해자 진술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가해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어요. 딸은 자신이 '그루밍(길들이기)' 피해자인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겁니다. 한동안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큰 충격으로 상담소를 찾았고, 지금까지도 심리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어려서 당하는 일 아냐…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지난 1월, 10살짜리 딸과 여행을 하던 중 휴대전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남성의 이름으로 온 카카오톡 메시지가 있었고, 이를 확인하면서 딸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딸은 '포켓 마피아'라는 게임을 하다가, 함께 게임을 하던 사람의 요구로 전화번호를 알려줬다고 합니다. 이후 "심쿵했냐" "오늘부터 1일 하자"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유인하고 꾀어낸 게 아닙니다. 집요하게 매달렸어요. 어른은 아이를 꾀어내고, 어린이들은 거기에 걸려드는 존재로만 봐선 안 될 문제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겪은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건 인지한 상태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이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알아차릴 때쯤, 뒤늦게 두려움이 찾아오진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현재 아이와 함께 성폭력 상담소에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n번방' 관련 뉴스가 나오면서 "그런 여자애들이니까 당해도 싸다" "애들이 뭘 아나?"라는 식의 반응에 대해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어린이라서, 어려서, 잘 몰라서 당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이런 일은 찾아올 수 있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분명한 처벌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세 명의 취재원은 온라인이라는 무방비한 세계에서 성범죄의 표적이 된 자녀가, 같은 공간에서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진 않을 지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고, 평소 행실을 문제 삼는 2차 가해는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피해자를 탓하는 시선이 아닌 공감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성범죄, 누구든 '당해도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 상담을 원하는 분은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 02-3141-6191,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2, 한국여성민우회 02-335-1858, 여성 긴급전화 국번 없이 1366,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한국여성의전화 02-2263-64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로 상담을 요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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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내 아이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 입력 2020-04-09 07:01:07
    • 수정2020-04-10 10:14:57
    취재K
#내가_가해자면_너는_창녀다

'n번방'과 '박사방' 등 디지털 성범죄를 방관해 온 대화방 참가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이에 반박하는 성격의 해시태그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피해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요지의 전형적인 '2차 가해' 성격을 띤 운동입니다. 일부 유튜버는 피해자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는 영상을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이렇듯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부의 시선 때문에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혹여나 자식이 자신을 탓하며 이중으로 상처받진 않을까 우려합니다.

KBS 취재진은 상담기관의 협조를 받아, 미성년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부모 3명과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든,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그대로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성년 성폭행' 전력…전자발찌 찬 와중에 접근

"제 딸은 13살입니다. 게임을 하던 중 "버스를 태워주겠다"는 말을 들었대요.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동참하자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라더군요. 그 말에 솔깃한 딸은 상대와 함께 게임을 했고, 채팅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9개월간 교제했습니다.

가해자인 상대는 아이와 연락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나체 사진을 아이에게 지속해서 보냈어요. 그러면서 딸에게도 유사 성행위 영상과 나체 사진을 요구했습니다. 회유와 협박 끝에 아이는 결국 상대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보내면 오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된 뒤, 알고 보니 가해자는 만 13세 미만을 성폭행해 이미 실형을 받은 전력이 있는 25살 남성이었습니다. 경찰 조사 당시 전자발찌도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게임이라는 열린 공간 안에서 성범죄자의 표적이 되기란 참 쉬운 것 같습니다."


■불안한 심리 이용…"그루밍 인지 못 해"

"딸의 자위 영상을 지속해서 받아본 상대는 의대생이라더군요. 당시 제 딸은 중학교 3학년, 16살이었습니다. 아이가 호기심에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 공부와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해주겠다며 접근을 했다고 합니다.

딸은 당시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가해자는 그 점을 잘 포착했어요. 딸이 어려워하는 과목 공부를 도와주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2개월간 연락을 지속하면서 딸의 비밀과 고민을 알아냈어요. 이걸 빌미 삼아,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유사 성행위 영상과 나체 사진을 요구했습니다.

경찰에 신고한 뒤, 딸은 피해자 진술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가해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어요. 딸은 자신이 '그루밍(길들이기)' 피해자인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겁니다. 한동안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큰 충격으로 상담소를 찾았고, 지금까지도 심리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어려서 당하는 일 아냐…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지난 1월, 10살짜리 딸과 여행을 하던 중 휴대전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남성의 이름으로 온 카카오톡 메시지가 있었고, 이를 확인하면서 딸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딸은 '포켓 마피아'라는 게임을 하다가, 함께 게임을 하던 사람의 요구로 전화번호를 알려줬다고 합니다. 이후 "심쿵했냐" "오늘부터 1일 하자"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유인하고 꾀어낸 게 아닙니다. 집요하게 매달렸어요. 어른은 아이를 꾀어내고, 어린이들은 거기에 걸려드는 존재로만 봐선 안 될 문제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겪은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건 인지한 상태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이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알아차릴 때쯤, 뒤늦게 두려움이 찾아오진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현재 아이와 함께 성폭력 상담소에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n번방' 관련 뉴스가 나오면서 "그런 여자애들이니까 당해도 싸다" "애들이 뭘 아나?"라는 식의 반응에 대해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어린이라서, 어려서, 잘 몰라서 당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이런 일은 찾아올 수 있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분명한 처벌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세 명의 취재원은 온라인이라는 무방비한 세계에서 성범죄의 표적이 된 자녀가, 같은 공간에서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진 않을 지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고, 평소 행실을 문제 삼는 2차 가해는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피해자를 탓하는 시선이 아닌 공감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성범죄, 누구든 '당해도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 상담을 원하는 분은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 02-3141-6191,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2, 한국여성민우회 02-335-1858, 여성 긴급전화 국번 없이 1366,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한국여성의전화 02-2263-64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로 상담을 요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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