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잃고 12년 만에 온 보험사 연락…“4억 4천 갚으세요”

입력 2020.04.09 (18:09) 수정 2020.04.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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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2월 14일' 교통사고로 한순간 떠난 아버지

지난 2000년 2월 14일 진눈깨비가 오던 날, 서울 올림픽대로 청담교 인근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도로 위 미끄럼을 막기 위해 '미끄럼 방지 시설'이 설치됐는데, 부실하게 공사된 게 화근이었습니다. 미끄럼 방지 시설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나오면서, 승용차가 미끄러진 겁니다. 운전자 김 모 씨와 그의 지인이었던 동승자 3명은 모두 숨졌습니다. 당시 김 씨가 운전하던 사고 차량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습니다.

[관련기사] [현장추적 1234] 교통사고 막기 위한 미끄럼 방지시설 오히려 사고원인 (2000.2.14. KBS 1TV '뉴스 9')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차량이나 운전자를 알 수 없는 뺑소니 차량의 운행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경우, 피해자의 가족에게 일정 한도 내에서 보상금을 주는 정부의 '자동차손해보장사업'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에서 1%씩 떼어 만든 기금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가해자에게 구상금을 청구해 돈을 환수하는 방식입니다. 정부의 사업이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손해보험사들이 정부로부터 이 권한을 위탁받아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고, 가해자에게 돈을 구상하는 업무를 맡아 왔습니다.

김 씨 사고는 가해 차량이 따로 없는 '단독 사고'였습니다. 운전자인 김 씨가 동승자 3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 것이죠. 이 차량이 무보험 차량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자동차손해보장사업을 위탁받은 동부화재는 동승자 3명의 유족에게 1인당 6천만 원씩, 총 1억 8천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이후 절차대로 진행됐다면 동부화재는 망인이 된 김 씨 대신, 김 씨의 가족에게 이 1억 8천만 원에 대한 구상금을 청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부화재는 10년 동안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사고 12년 뒤 날아온 '지급명령신청서'…"4억 4천만 원 갚으세요"

김 씨에게는 아내와 세 딸이 있었습니다. 김 씨가 떠난 뒤 아내는 남대문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며, 세 딸을 키우기 위해 어렵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부실공사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서울시와 도로공사에서 9천만 원가량을 받았습니다. 이 돈은 받자마자 '돈을 불려주겠다'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잃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 12년이 되던 2012년, 남은 일가족은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신청서를 받습니다. 12년 전 아버지의 교통사고 당시 동부화재가 낸 1억 8천만 원과 그동안 붙은 이자를 더해 모두 4억 4천만 원의 채무를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깜짝 놀란 김 씨의 아내는 당시 무료법률상담소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상담소에서는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라며 이의제기신청서만 내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구상금 청구 시효인 1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김 씨의 아내는 이 말만 듣고, 이의제기신청서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뒤 이후 이 일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이의제기신청서를 제기했기 때문에 사건은 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듬해인 2013년, 동부화재가 일가족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이 열렸고, 김 씨의 가족들은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의 막내딸은 당시 법원에서 종종 재판에 관한 내용이 등기로 집에 날아왔지만, 가족 아무도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희는 2012년도에 처음 소장이 날아와서 '(이의제기신청서) 한 장 내면 무시해도 된다'는 엄마 말을 믿고 무시하다가 이게 판결이 났는데, 판결문이라는 것도 솔직히 잘 몰랐고…"

2013년 동부화재가 김 씨의 가족에게 제기한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원고(동부화재)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2013년 동부화재가 김 씨의 가족에게 제기한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원고(동부화재)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피고였던 김 씨의 아내와 세 딸이 재판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사이, 재판부는 피고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백간주 판결'로 원고(동부화재)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아내에게 6천만 원, 세 딸에게는 각각 4천만 원을 갚으라 하고, 갚지 못하면 해마다 20%의 이자를 내라고 판시했습니다.

■ 시효 지났는데 구상금 청구한 보험사?…"법적으로 종결하려고"

동부화재 측은 통상 구상금 회수를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면 소멸 시효를 연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변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채권에 대해선 결손처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부화재는 왜, 구상금 청구 시효인 10년이 지나 12년 만에 소송을 한 걸까요?


동부화재는 구상금 청구권의 법적 종결을 위해 지급명령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변제 능력이 사실상 없어 보이는 김 씨의 가족들에 대한 구상권을 갖고 있는 실익이 없어 보여, 사건을 법적으로 끝내기 위해 지급명령 신청을 했다는 겁니다.

변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채권에 대해 결손처분을 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는, "결손처분을 판단할 만한 내부 기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통장 잔액이나 주택 보유 정도 이외의 재산 상황을 명확히 알 수 없어서 무조건 결손처분을 할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동부화재 측도 이렇게 구상금 청구 시효를 지나 소송을 거는 건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담당자가 이미 퇴직을 했기 때문에 시효가 유효하던 기간에 왜 소송을 하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렵고, 최종적으로 2012년에는 구상의 실익이 없어 종결을 위해 법적 판단을 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김 씨의 가족이 한 번이라도 법정에서 이의를 제기했다면 끝났을 일이지만, 김 씨의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승소하게 됐다는 겁니다.

■ 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으로 넘어간 공…"채무 감면 검토 가능한지 검토"

개별 손해보험사들이 담당하던 자동차손해배상보장사업 업무는 지난 3월부터 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 (진흥원)으로 이관됐습니다. 그동안은 구상 방식과 환수 실적 등이 제각각이어서 이를 일원화하기 위해 국토교통부가 위탁기관을 변경한 겁니다. 진흥원 관계자는 어제(8일) KBS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김씨 일가의 사건을 알아본 뒤 채권정리위원회를 통해 채무 감면 등이 가능할지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모든 채권의 소멸 시효 등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올해 만 24살인 김 씨의 막내딸은 가족들이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 씨는 취재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진짜 속상해서, 친구들은 학교 다녀서 학자금 대출이나 그런 빚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갑자기 저한테 시련이 닥쳐서 솔직히 억울해요, 저는 몰랐었으니까. 그래서 되게 많이 울고 엄마 원망도 하고. 처음엔 아빠가 죽으면서 남긴 게 빚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 도로공사하던 분들이 되게 야속하더라고요."

올해는 김 씨의 사고가 일어난 지 만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공이 진흥원으로 넘어간 가운데, 김 씨 가족의 채무는 매달 3백만 원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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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잃고 12년 만에 온 보험사 연락…“4억 4천 갚으세요”
    • 입력 2020-04-09 18:09:33
    • 수정2020-04-10 17:32:13
    취재K
■ '2000년 2월 14일' 교통사고로 한순간 떠난 아버지

지난 2000년 2월 14일 진눈깨비가 오던 날, 서울 올림픽대로 청담교 인근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도로 위 미끄럼을 막기 위해 '미끄럼 방지 시설'이 설치됐는데, 부실하게 공사된 게 화근이었습니다. 미끄럼 방지 시설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나오면서, 승용차가 미끄러진 겁니다. 운전자 김 모 씨와 그의 지인이었던 동승자 3명은 모두 숨졌습니다. 당시 김 씨가 운전하던 사고 차량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습니다.

[관련기사] [현장추적 1234] 교통사고 막기 위한 미끄럼 방지시설 오히려 사고원인 (2000.2.14. KBS 1TV '뉴스 9')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차량이나 운전자를 알 수 없는 뺑소니 차량의 운행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경우, 피해자의 가족에게 일정 한도 내에서 보상금을 주는 정부의 '자동차손해보장사업'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에서 1%씩 떼어 만든 기금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가해자에게 구상금을 청구해 돈을 환수하는 방식입니다. 정부의 사업이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손해보험사들이 정부로부터 이 권한을 위탁받아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고, 가해자에게 돈을 구상하는 업무를 맡아 왔습니다.

김 씨 사고는 가해 차량이 따로 없는 '단독 사고'였습니다. 운전자인 김 씨가 동승자 3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 것이죠. 이 차량이 무보험 차량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자동차손해보장사업을 위탁받은 동부화재는 동승자 3명의 유족에게 1인당 6천만 원씩, 총 1억 8천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이후 절차대로 진행됐다면 동부화재는 망인이 된 김 씨 대신, 김 씨의 가족에게 이 1억 8천만 원에 대한 구상금을 청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부화재는 10년 동안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사고 12년 뒤 날아온 '지급명령신청서'…"4억 4천만 원 갚으세요"

김 씨에게는 아내와 세 딸이 있었습니다. 김 씨가 떠난 뒤 아내는 남대문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며, 세 딸을 키우기 위해 어렵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부실공사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서울시와 도로공사에서 9천만 원가량을 받았습니다. 이 돈은 받자마자 '돈을 불려주겠다'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잃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 12년이 되던 2012년, 남은 일가족은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신청서를 받습니다. 12년 전 아버지의 교통사고 당시 동부화재가 낸 1억 8천만 원과 그동안 붙은 이자를 더해 모두 4억 4천만 원의 채무를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깜짝 놀란 김 씨의 아내는 당시 무료법률상담소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상담소에서는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라며 이의제기신청서만 내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구상금 청구 시효인 1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김 씨의 아내는 이 말만 듣고, 이의제기신청서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뒤 이후 이 일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이의제기신청서를 제기했기 때문에 사건은 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듬해인 2013년, 동부화재가 일가족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이 열렸고, 김 씨의 가족들은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의 막내딸은 당시 법원에서 종종 재판에 관한 내용이 등기로 집에 날아왔지만, 가족 아무도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희는 2012년도에 처음 소장이 날아와서 '(이의제기신청서) 한 장 내면 무시해도 된다'는 엄마 말을 믿고 무시하다가 이게 판결이 났는데, 판결문이라는 것도 솔직히 잘 몰랐고…"

2013년 동부화재가 김 씨의 가족에게 제기한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원고(동부화재)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피고였던 김 씨의 아내와 세 딸이 재판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사이, 재판부는 피고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백간주 판결'로 원고(동부화재)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아내에게 6천만 원, 세 딸에게는 각각 4천만 원을 갚으라 하고, 갚지 못하면 해마다 20%의 이자를 내라고 판시했습니다.

■ 시효 지났는데 구상금 청구한 보험사?…"법적으로 종결하려고"

동부화재 측은 통상 구상금 회수를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면 소멸 시효를 연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변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채권에 대해선 결손처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부화재는 왜, 구상금 청구 시효인 10년이 지나 12년 만에 소송을 한 걸까요?


동부화재는 구상금 청구권의 법적 종결을 위해 지급명령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변제 능력이 사실상 없어 보이는 김 씨의 가족들에 대한 구상권을 갖고 있는 실익이 없어 보여, 사건을 법적으로 끝내기 위해 지급명령 신청을 했다는 겁니다.

변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채권에 대해 결손처분을 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는, "결손처분을 판단할 만한 내부 기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통장 잔액이나 주택 보유 정도 이외의 재산 상황을 명확히 알 수 없어서 무조건 결손처분을 할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동부화재 측도 이렇게 구상금 청구 시효를 지나 소송을 거는 건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담당자가 이미 퇴직을 했기 때문에 시효가 유효하던 기간에 왜 소송을 하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렵고, 최종적으로 2012년에는 구상의 실익이 없어 종결을 위해 법적 판단을 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김 씨의 가족이 한 번이라도 법정에서 이의를 제기했다면 끝났을 일이지만, 김 씨의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승소하게 됐다는 겁니다.

■ 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으로 넘어간 공…"채무 감면 검토 가능한지 검토"

개별 손해보험사들이 담당하던 자동차손해배상보장사업 업무는 지난 3월부터 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 (진흥원)으로 이관됐습니다. 그동안은 구상 방식과 환수 실적 등이 제각각이어서 이를 일원화하기 위해 국토교통부가 위탁기관을 변경한 겁니다. 진흥원 관계자는 어제(8일) KBS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김씨 일가의 사건을 알아본 뒤 채권정리위원회를 통해 채무 감면 등이 가능할지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모든 채권의 소멸 시효 등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올해 만 24살인 김 씨의 막내딸은 가족들이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 씨는 취재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진짜 속상해서, 친구들은 학교 다녀서 학자금 대출이나 그런 빚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갑자기 저한테 시련이 닥쳐서 솔직히 억울해요, 저는 몰랐었으니까. 그래서 되게 많이 울고 엄마 원망도 하고. 처음엔 아빠가 죽으면서 남긴 게 빚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 도로공사하던 분들이 되게 야속하더라고요."

올해는 김 씨의 사고가 일어난 지 만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공이 진흥원으로 넘어간 가운데, 김 씨 가족의 채무는 매달 3백만 원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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