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부활절에도 교회에 모일 수 없나요?”

입력 2020.04.10 (08:16) 수정 2020.04.1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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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사흘 앞둔 4월 9일자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1면에 실린 그림이다. 시사만화가 그레저와 렌츠(Greser & Lenz)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티브로 그렸다. 그림에는 예수님과 제자 4명만이 등장한다. 그나마 의자 두 칸 건너 한 자리씩 간격을 유지하고 앉아 있다. 그림 밑에는 '부활절에도 거리 유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베를린 성 아프라 성당베를린 성 아프라 성당

"예배 허용해 달라" 성당 소송, 베를린 법원 기각

독일에서는 지난달 16일부터 종교시설에서 집단 예배와 행사가 금지됐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합의해 내린 결정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유대교, 무슬림 등의 모든 종교시설에서 예배가 중단됐다.

여기에 베를린의 한 성당이 이의를 제기했다. 베를린 미테 지역의 성 아프라 성당은 정부의 종교행사 제한이 독일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상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베를린 행정법원에 긴급 소송을 제기했다.

이 성당의 게랄드 괴셰 주임신부는 예배 참석자를 최대 50명으로 제한하고, 개인 간 거리를 1.5m 유지하며, 참석자들의 연락처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괴셰 신부는 이런 조치를 취하면 성당이 슈퍼마켓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행정법원베를린 행정법원

하지만 법원은 성당의 소송을 기각했다. 베를린 행정법원은 정부의 종교행사 제한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만, 신자와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화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또 종교행사 제한이 공공보건체계 유지에 필요하고 일시적인 조치여서 종교의 자유의 핵심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법원은 현재 종교시설에서 개별적인 기도를 허용하고 있고, 화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그래도 예배시설은 문 열 수 있어야" 일부 반론도

베를린 행정법원 판결 이후 '베를리너 차이퉁'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예배시설은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예배를 옹호했다. 광신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양식(良識) 있는 신자들의 거리를 유지하는 예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몽 사회에서 책이 양식(糧食)과 같듯이, 신자에게 예배는 양식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라고 사설은 주장했다.

독일 ZDF로 생중계된 성 슈테판 성당 종려주일 미사 독일 ZDF로 생중계된 성 슈테판 성당 종려주일 미사

'온라인·개인 예배' 준수…바티칸 부활절 미사도 인터넷으로

종려주일이었던 지난 5일 오전, 독일 공영방송 ZDF는 오스트리아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된 종려주일 미사를 생중계했다. 경건한 성당의 종소리와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로 시작된 종려주일 미사 참석자는 모두 6명. 미사를 집전한 크리스토프 쉔보른 추기경과 보좌 신부 2명, 성가대원 2명, 오르간 연주자 1명이 전부였다. 중계방송을 진행한 방송사 인력을 포함해도 10여 명 안팎의 인원만이 대성당에 있었던 셈이다.

성당과 교회, 유대교 회당, 무슬림 사원 등 대부분의 종교시설은 정부의 예배 금지 조치를 준수하고 있다. 물론 베를린 아프라 성당의 소송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의 자유 침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를 신자와 국민 건강을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신자 없는 예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예배 강행 문제로 교회와 정부 당국이 마찰을 빚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바티칸의 12일 부활대축일 미사도 신자 없이 인터넷으로 중계된다. 예년 같으면 수많은 신자와 관광객들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들겠지만 올해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종려주일 미사도 신자 없이 진행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에서 신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텅 빈 성 베드로 광장 축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텅 빈 성 베드로 광장 축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기독교인에게 예배란?

정장복 장신대 명예교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지 '한국기독공보'에 지난달 초 기고한 칼럼에서 '교회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상기시켰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고, 예배는 성도들이 함께 모이기로 정한 시간에 지정된 장소에서 드린다는 게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한국에서 신천지 교회가 코로나19 감염자들을 쏟아낸 이후 집단 예배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제기되던 당시, 정 명예교수는 "지금 전국의 모든 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장소와 방법을 달리한 피난 형태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하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부에서는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19에 걸려 죽으면 그것은 곧 순교"라는 주장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이 때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다가 제2의 신천지 모양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크게 잃게 되며, 온전한 예배의 회복에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종교인에게 예배란 절대자와 만나는 가장 숭고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만 사회에 전염병이 만연하고,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교회 안팎의 공동체에 해를 끼칠 씨앗을 안고 있다면, 그 씨앗은 싹트지 않게 관리하는 게 합당하지 않겠는가?

독일 베를린 행정법원이 예배 금지가 종교의 자유를 일부 침해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시점에서 예배를 허용해 달라는 소송을 기각한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바티칸이 성탄절만큼 중요한 날인 부활절 미사를 신자 없이 거행하기로 한 뜻은 무엇이겠는가? 정장복 명예교수는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림이 교회의 예배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일시적 변경임에 초점을 두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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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10 08:16:17
    • 수정2020-04-10 08:17:16
    특파원 리포트
부활절을 사흘 앞둔 4월 9일자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1면에 실린 그림이다. 시사만화가 그레저와 렌츠(Greser & Lenz)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티브로 그렸다. 그림에는 예수님과 제자 4명만이 등장한다. 그나마 의자 두 칸 건너 한 자리씩 간격을 유지하고 앉아 있다. 그림 밑에는 '부활절에도 거리 유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베를린 성 아프라 성당
"예배 허용해 달라" 성당 소송, 베를린 법원 기각

독일에서는 지난달 16일부터 종교시설에서 집단 예배와 행사가 금지됐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합의해 내린 결정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유대교, 무슬림 등의 모든 종교시설에서 예배가 중단됐다.

여기에 베를린의 한 성당이 이의를 제기했다. 베를린 미테 지역의 성 아프라 성당은 정부의 종교행사 제한이 독일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상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베를린 행정법원에 긴급 소송을 제기했다.

이 성당의 게랄드 괴셰 주임신부는 예배 참석자를 최대 50명으로 제한하고, 개인 간 거리를 1.5m 유지하며, 참석자들의 연락처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괴셰 신부는 이런 조치를 취하면 성당이 슈퍼마켓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행정법원
하지만 법원은 성당의 소송을 기각했다. 베를린 행정법원은 정부의 종교행사 제한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만, 신자와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화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또 종교행사 제한이 공공보건체계 유지에 필요하고 일시적인 조치여서 종교의 자유의 핵심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법원은 현재 종교시설에서 개별적인 기도를 허용하고 있고, 화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그래도 예배시설은 문 열 수 있어야" 일부 반론도

베를린 행정법원 판결 이후 '베를리너 차이퉁'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예배시설은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예배를 옹호했다. 광신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양식(良識) 있는 신자들의 거리를 유지하는 예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몽 사회에서 책이 양식(糧食)과 같듯이, 신자에게 예배는 양식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라고 사설은 주장했다.

독일 ZDF로 생중계된 성 슈테판 성당 종려주일 미사
'온라인·개인 예배' 준수…바티칸 부활절 미사도 인터넷으로

종려주일이었던 지난 5일 오전, 독일 공영방송 ZDF는 오스트리아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된 종려주일 미사를 생중계했다. 경건한 성당의 종소리와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로 시작된 종려주일 미사 참석자는 모두 6명. 미사를 집전한 크리스토프 쉔보른 추기경과 보좌 신부 2명, 성가대원 2명, 오르간 연주자 1명이 전부였다. 중계방송을 진행한 방송사 인력을 포함해도 10여 명 안팎의 인원만이 대성당에 있었던 셈이다.

성당과 교회, 유대교 회당, 무슬림 사원 등 대부분의 종교시설은 정부의 예배 금지 조치를 준수하고 있다. 물론 베를린 아프라 성당의 소송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의 자유 침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를 신자와 국민 건강을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신자 없는 예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예배 강행 문제로 교회와 정부 당국이 마찰을 빚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바티칸의 12일 부활대축일 미사도 신자 없이 인터넷으로 중계된다. 예년 같으면 수많은 신자와 관광객들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들겠지만 올해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종려주일 미사도 신자 없이 진행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에서 신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텅 빈 성 베드로 광장 축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기독교인에게 예배란?

정장복 장신대 명예교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지 '한국기독공보'에 지난달 초 기고한 칼럼에서 '교회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상기시켰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고, 예배는 성도들이 함께 모이기로 정한 시간에 지정된 장소에서 드린다는 게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한국에서 신천지 교회가 코로나19 감염자들을 쏟아낸 이후 집단 예배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제기되던 당시, 정 명예교수는 "지금 전국의 모든 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장소와 방법을 달리한 피난 형태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하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부에서는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19에 걸려 죽으면 그것은 곧 순교"라는 주장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이 때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다가 제2의 신천지 모양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크게 잃게 되며, 온전한 예배의 회복에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종교인에게 예배란 절대자와 만나는 가장 숭고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만 사회에 전염병이 만연하고,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교회 안팎의 공동체에 해를 끼칠 씨앗을 안고 있다면, 그 씨앗은 싹트지 않게 관리하는 게 합당하지 않겠는가?

독일 베를린 행정법원이 예배 금지가 종교의 자유를 일부 침해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시점에서 예배를 허용해 달라는 소송을 기각한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바티칸이 성탄절만큼 중요한 날인 부활절 미사를 신자 없이 거행하기로 한 뜻은 무엇이겠는가? 정장복 명예교수는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림이 교회의 예배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일시적 변경임에 초점을 두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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