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 눈 먼 채 돌아온 황구 사연은…

입력 2020.04.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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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

지난달 말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에 혼자 살면서 개 4마리를 키우는 80대 오 모 할머니 댁에 공무원이 찾아왔습니다.

서귀포시 소속인 이 공무원은 개 관련 민원이 접수됐다며, 오 할머니네 개들을 서귀포시에서 데려가서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육포기서'라고 적힌 종이 한 장도 건넸는데, '포기 사유'란에 뭐라고 적어야 하냐고 오 할머니가 되묻자 "혼자 사는데 나이가 들어서 키우기 힘들다"라고 쓰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오 할머니는 당시 정확히 설명 듣진 못했지만 본인이 무언가 큰 잘못을 했고, 그래서 공무원이 '각서'를 받아가는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 할머니는 오랫동안 키워온 개 4마리 모두 데려가야만 하는지, 나이 든 개 한 마리라도 키울 수는 없는지 부탁해봤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서귀포시에서 데려간 개들은 제주도 직영 동물보호센터로 옮겨졌는데, 일주일 넘게 입양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양 공고 기간이 열흘이라 며칠 뒤 안락사 될 위기까지 처한 건데요. 이 사연을 전해 들은 제주의 한 동물보호활동가가 서귀포시에 거세게 항의했고, 결국 '안락사 될' 뻔한 개들은 가까스로 다시 오 할머니 품에 안겼습니다.


시력 잃고 전염병 걸린 채 돌아와 .. 치료비 수백만 원 들어

하지만 반환된 개들 중 한 마리(위 사진)는 빛에만 조금 반응할 정도로 시력을 잃었고, 전염성 간염에 걸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동물병원에 입원해 수백만 원의 치료 비용도 나왔습니다.

아픈 채로 돌아온 반려견을 보고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미 몸이 많이 상해버린 이 개는 앞으로 해당 질환에 따른 평생 간호가 필요해졌고, 예전처럼 할머니 혼자 집에서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오 할머니의 사연을 KBS에 제보한 동물보호활동가 고길자 씨는 "행정이 나서서 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시킨 사례"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할머니가 잘 키워온 반려견들을 서귀포시가 임시보호소에 데려갔기 때문에, 오히려 개들이 크게 다치고 죽을 뻔했다는 겁니다.

서귀포시는 '사육포기서'에 할머니가 직접 서명했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또 수개월 전부터 올무에 걸려 다친 개에 대한 신고가 여러 차례 들어왔고, 할머니가 다친 개를 방치했다고 봤기 때문에 보호 목적의 행정조치였다고 해명했습니다.


취재해보니 서귀포시에 반복해서 신고 접수된 '올무에 걸려 크게 다친 개'는 오 할머니 댁의 옆집 개였습니다. 서귀포시 유기동물 업무를 맡은 지 반년이 된 담당 공무원이 신고 사례를 혼동한 겁니다. 올무에 걸려 크게 다친 개(위 사진)는 이미 한쪽 다리가 괴사한 상태로, 빠른 구조와 치료가 절실했는데요.


해당 개는 동물보호활동가 고길자 씨가 '치료 목적이라면 데려가도 된다'는 개 소유주의 동의를 받아 사비를 들여 치료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오 할머니 댁 개들이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민원은 단 한 건도 서귀포시에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 섣부른 도입?

앞선 오 할머니의 사례가 공무원의 민원 혼동으로 빚어진 소동으로만 보기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소유주가 반려동물을 '정당하게' 포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서귀포시는 오 할머니의 개들을 가져갈 때 '고령이라 혼자 살아 개를 키우기 힘들다'면 사육을 포기해도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공무 집행의 근거는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입니다. 두 달 전 서귀포시에서 도입했는데요. 이 제도상 반려동물 보호자가 '독거노인이고 사육이 곤란한 경우'라고 판단되면, 행정에서 동물을 인수해 보호센터에 맡길 수 있습니다.

제주에선 지난해 8천 마리 넘는 유기동물이 발생해 보호센터에 맡겨졌습니다. 센터에 임시보호된 유기동물들은 입양이 안 되면 보름도 채 안 돼 안락사 되는데요. 지난 6년간 1만 마리의 유기동물이 제주에서 안락사 됐습니다.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나도 많은 겁니다. 유기동물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려동물 보호자의 책임 의식을 키우는 게 최우선인데요. 서귀포시가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에 대한 세부 기준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귀포시는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에 명시된 '독거노인 중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 관련 세부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신 담당 공무원이 현장조사에 나간다고 해명했는데요. 하지만 앞서 오 할머니 사례의 경우 공무원과의 30분 남짓 대화로 현장조사가 끝났고, 그마저도 대부분 대화가 신변잡기의 이야기로 흘렀다고 담당 공무원은 고백했습니다.

다른 지자체와 비교해보면, 서귀포시가 도입한 제도의 허술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서울시도 서귀포시의 제도와 비슷한 '긴급구호동물 인수보호제'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다만, 서울시는 동물 인수보호 제외 사항을 뒀습니다. ▲긴급구호동물의 인도적 처리 부동의 ▲직계 가족 구성원의 미동의 ▲동물 소유권 이전에 부동의할 때 ▲동거가족이 있어 충분히 보호 가능한 경우 ▲소유자 관계가 불명확할 때 ▲단순 건강 사유나 이사 등 사육 고충일 때 등으로 세분화한 겁니다.

서울시의 기준을 앞선 오 할머니 사례에 적용해볼까요? 오 할머니는 반려견들이 보호센터에서 안락사 될 수 있다는 '인도적 처리'에 대해 서귀포시 공무원에게 전혀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개들을 '보호'한다는 명분만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오 할머니 본인은 공무원이 재차 설득하자 사육 포기서에 서명했지만, 서울에 사는 오 할머니의 손녀는 반려견 인수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귀포시는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라는 기준에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고 인정했고, 제도 보완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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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 눈 먼 채 돌아온 황구 사연은…
    • 입력 2020-04-18 08:00:30
    취재K
'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

지난달 말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에 혼자 살면서 개 4마리를 키우는 80대 오 모 할머니 댁에 공무원이 찾아왔습니다.

서귀포시 소속인 이 공무원은 개 관련 민원이 접수됐다며, 오 할머니네 개들을 서귀포시에서 데려가서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육포기서'라고 적힌 종이 한 장도 건넸는데, '포기 사유'란에 뭐라고 적어야 하냐고 오 할머니가 되묻자 "혼자 사는데 나이가 들어서 키우기 힘들다"라고 쓰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오 할머니는 당시 정확히 설명 듣진 못했지만 본인이 무언가 큰 잘못을 했고, 그래서 공무원이 '각서'를 받아가는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 할머니는 오랫동안 키워온 개 4마리 모두 데려가야만 하는지, 나이 든 개 한 마리라도 키울 수는 없는지 부탁해봤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서귀포시에서 데려간 개들은 제주도 직영 동물보호센터로 옮겨졌는데, 일주일 넘게 입양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양 공고 기간이 열흘이라 며칠 뒤 안락사 될 위기까지 처한 건데요. 이 사연을 전해 들은 제주의 한 동물보호활동가가 서귀포시에 거세게 항의했고, 결국 '안락사 될' 뻔한 개들은 가까스로 다시 오 할머니 품에 안겼습니다.


시력 잃고 전염병 걸린 채 돌아와 .. 치료비 수백만 원 들어

하지만 반환된 개들 중 한 마리(위 사진)는 빛에만 조금 반응할 정도로 시력을 잃었고, 전염성 간염에 걸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동물병원에 입원해 수백만 원의 치료 비용도 나왔습니다.

아픈 채로 돌아온 반려견을 보고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미 몸이 많이 상해버린 이 개는 앞으로 해당 질환에 따른 평생 간호가 필요해졌고, 예전처럼 할머니 혼자 집에서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오 할머니의 사연을 KBS에 제보한 동물보호활동가 고길자 씨는 "행정이 나서서 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둔갑시킨 사례"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할머니가 잘 키워온 반려견들을 서귀포시가 임시보호소에 데려갔기 때문에, 오히려 개들이 크게 다치고 죽을 뻔했다는 겁니다.

서귀포시는 '사육포기서'에 할머니가 직접 서명했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또 수개월 전부터 올무에 걸려 다친 개에 대한 신고가 여러 차례 들어왔고, 할머니가 다친 개를 방치했다고 봤기 때문에 보호 목적의 행정조치였다고 해명했습니다.


취재해보니 서귀포시에 반복해서 신고 접수된 '올무에 걸려 크게 다친 개'는 오 할머니 댁의 옆집 개였습니다. 서귀포시 유기동물 업무를 맡은 지 반년이 된 담당 공무원이 신고 사례를 혼동한 겁니다. 올무에 걸려 크게 다친 개(위 사진)는 이미 한쪽 다리가 괴사한 상태로, 빠른 구조와 치료가 절실했는데요.


해당 개는 동물보호활동가 고길자 씨가 '치료 목적이라면 데려가도 된다'는 개 소유주의 동의를 받아 사비를 들여 치료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오 할머니 댁 개들이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민원은 단 한 건도 서귀포시에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 섣부른 도입?

앞선 오 할머니의 사례가 공무원의 민원 혼동으로 빚어진 소동으로만 보기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소유주가 반려동물을 '정당하게' 포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서귀포시는 오 할머니의 개들을 가져갈 때 '고령이라 혼자 살아 개를 키우기 힘들다'면 사육을 포기해도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공무 집행의 근거는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입니다. 두 달 전 서귀포시에서 도입했는데요. 이 제도상 반려동물 보호자가 '독거노인이고 사육이 곤란한 경우'라고 판단되면, 행정에서 동물을 인수해 보호센터에 맡길 수 있습니다.

제주에선 지난해 8천 마리 넘는 유기동물이 발생해 보호센터에 맡겨졌습니다. 센터에 임시보호된 유기동물들은 입양이 안 되면 보름도 채 안 돼 안락사 되는데요. 지난 6년간 1만 마리의 유기동물이 제주에서 안락사 됐습니다.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나도 많은 겁니다. 유기동물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려동물 보호자의 책임 의식을 키우는 게 최우선인데요. 서귀포시가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에 대한 세부 기준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귀포시는 '사육 포기 반려동물 인수·보호제'에 명시된 '독거노인 중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 관련 세부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신 담당 공무원이 현장조사에 나간다고 해명했는데요. 하지만 앞서 오 할머니 사례의 경우 공무원과의 30분 남짓 대화로 현장조사가 끝났고, 그마저도 대부분 대화가 신변잡기의 이야기로 흘렀다고 담당 공무원은 고백했습니다.

다른 지자체와 비교해보면, 서귀포시가 도입한 제도의 허술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서울시도 서귀포시의 제도와 비슷한 '긴급구호동물 인수보호제'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다만, 서울시는 동물 인수보호 제외 사항을 뒀습니다. ▲긴급구호동물의 인도적 처리 부동의 ▲직계 가족 구성원의 미동의 ▲동물 소유권 이전에 부동의할 때 ▲동거가족이 있어 충분히 보호 가능한 경우 ▲소유자 관계가 불명확할 때 ▲단순 건강 사유나 이사 등 사육 고충일 때 등으로 세분화한 겁니다.

서울시의 기준을 앞선 오 할머니 사례에 적용해볼까요? 오 할머니는 반려견들이 보호센터에서 안락사 될 수 있다는 '인도적 처리'에 대해 서귀포시 공무원에게 전혀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개들을 '보호'한다는 명분만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오 할머니 본인은 공무원이 재차 설득하자 사육 포기서에 서명했지만, 서울에 사는 오 할머니의 손녀는 반려견 인수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귀포시는 '반려동물 사육이 곤란한 경우'라는 기준에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고 인정했고, 제도 보완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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