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만 남은 이주노동자 ‘알리’의 꿈

입력 2020.04.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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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알리'입니다]

하얀 피부에 갈색 눈을 가진 그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 알리 씨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열흘 전쯤, 서울의 한 화상전문병원에서였습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 겁을 먹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워낙 작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크게 말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그토록 긴장시켰던 건 바로 '불법체류자'라는 그의 신분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요."]

사고가 난 건 지난달 23일 저녁 11시 20분이었습니다. 강원도 양양의 한 다가구주택 2층 원룸에서 불이 나 50대 여성 1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습니다. 알리 씨는 부상자 중 한 명으로 손과 목, 등에 2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날 밤, 알리 씨는 집으로 가던 중 자신이 사는 주택에 불이 난 것을 직감했습니다. 복도에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는 겁니다. 그는 고민할 틈도 없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불이 난 원룸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이웃의 신음만 들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지체할 틈이 없었던 그는 다른 원룸의 문을 두드려 사람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빠질 수 있게 복도 창문을 연 뒤 건물 밖으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건물 외벽에 설치된 가스배관을 타고 불이 난 원룸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불길이 거셌던 만큼 무서웠을 거고 많이 아팠을 텐데 알리는 아니라며 서툰 한국어로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어요. 금방 있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거기서 연기 먹으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힘들어요."


[상처만 남은 코리안드림]

사람들이 그가 한국에 2년 이상 불법체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있는 화상 전문병원에서였습니다. 치료하기 위해 외국인등록증을 달라고 했지만 머뭇거릴 뿐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알리 씨는 2017년 12월, 카자흐스탄에서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20만 원짜리 작은 월세방에서 거주하며 일용직으로 일해왔다고 합니다. 고된 공사현장을 다니며 번 돈으로 고국에 있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내, 두 아이를 책임져왔습니다. 카자흐스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터라, 알리 씨가 한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이자를 갚아왔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온 알리 씨. 지금은 사람을 구하려다 다친 탓에 한 달 가까이 일을 하지 못해 당장 생활비조차 없습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의 작은 방도 불에 타버리면서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다 보니 이제 정든 한국을 떠나야 합니다.

몸도 다친 데다 돈도 벌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해야 하는 사실에 서글플 만도 한데, 알리 씨는 이웃 아주머니의 생명을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알리를 돕는 이웃 '한국엄마']

그런 알리를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이 난 건물 바로 옆에 사는 주민 장선옥 씨입니다. 장 씨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밤 마을 주민들은 불이 난 다가구주택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장 씨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장 씨에게 사람들은 누군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장 씨는 누군가 다치지 않을까 겁이 났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불길이 워낙 거셌던 터라 본인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약에 자신의 아이들이 뛰어든다고 하면 말렸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화재 현장에서 다친 알리 씨를 화상 전문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도 받게 하고, 7백만 원이 넘는 병원비도 선뜻 내줬습니다. 알리 씨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거라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최근 장 씨는 알리 씨와 함께 출입국외국인사무소를 방문해 불법체류를 자진 신고했습니다. 단속에 적발되지 않을까, 누군가 고발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알리 씨를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서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합니다.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사람을 구하려다 다쳤는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알리의 꿈, 다시 꿀 수 있을까요?]

취재를 마친 날, 갑자기 알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차 안인 데다 아직 알리의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서너 번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알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 손흥민 선수를 만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방송국에 일하고 있지만, 저도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손 선수. "미안해요. 알리 씨. 저는 손흥민 선수 연락처를 몰라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함께 일한 촬영기자에게 "나도 만나고 싶은데"라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순수한 알리 씨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사실 알리 씨가 제일 원하는 것은 손흥민 선수를 만나는 것보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하지 않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면 그의 가족은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을 아는 장선옥 씨는 강원도에 의사상자 대상자로 추천하며 선처를 베풀어주길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알리 씨가 오랜 기간 한국에 더 머무를 수 없다면, 다친 곳이 완전히 나을 수 있게 치료받을 동안만이라도 체류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말입니다. 알리 씨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이웃도 선처가 내려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무너진 알리의 코리안 드림, 다시 꿈꿀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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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만 남은 이주노동자 ‘알리’의 꿈
    • 입력 2020-04-18 08:00:30
    취재K
[그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알리'입니다]

하얀 피부에 갈색 눈을 가진 그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 알리 씨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열흘 전쯤, 서울의 한 화상전문병원에서였습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 겁을 먹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워낙 작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크게 말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그토록 긴장시켰던 건 바로 '불법체류자'라는 그의 신분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요."]

사고가 난 건 지난달 23일 저녁 11시 20분이었습니다. 강원도 양양의 한 다가구주택 2층 원룸에서 불이 나 50대 여성 1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습니다. 알리 씨는 부상자 중 한 명으로 손과 목, 등에 2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날 밤, 알리 씨는 집으로 가던 중 자신이 사는 주택에 불이 난 것을 직감했습니다. 복도에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는 겁니다. 그는 고민할 틈도 없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불이 난 원룸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이웃의 신음만 들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지체할 틈이 없었던 그는 다른 원룸의 문을 두드려 사람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빠질 수 있게 복도 창문을 연 뒤 건물 밖으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건물 외벽에 설치된 가스배관을 타고 불이 난 원룸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불길이 거셌던 만큼 무서웠을 거고 많이 아팠을 텐데 알리는 아니라며 서툰 한국어로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어요. 금방 있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거기서 연기 먹으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힘들어요."


[상처만 남은 코리안드림]

사람들이 그가 한국에 2년 이상 불법체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있는 화상 전문병원에서였습니다. 치료하기 위해 외국인등록증을 달라고 했지만 머뭇거릴 뿐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알리 씨는 2017년 12월, 카자흐스탄에서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20만 원짜리 작은 월세방에서 거주하며 일용직으로 일해왔다고 합니다. 고된 공사현장을 다니며 번 돈으로 고국에 있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내, 두 아이를 책임져왔습니다. 카자흐스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터라, 알리 씨가 한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이자를 갚아왔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온 알리 씨. 지금은 사람을 구하려다 다친 탓에 한 달 가까이 일을 하지 못해 당장 생활비조차 없습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의 작은 방도 불에 타버리면서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다 보니 이제 정든 한국을 떠나야 합니다.

몸도 다친 데다 돈도 벌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해야 하는 사실에 서글플 만도 한데, 알리 씨는 이웃 아주머니의 생명을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알리를 돕는 이웃 '한국엄마']

그런 알리를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이 난 건물 바로 옆에 사는 주민 장선옥 씨입니다. 장 씨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밤 마을 주민들은 불이 난 다가구주택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장 씨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장 씨에게 사람들은 누군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장 씨는 누군가 다치지 않을까 겁이 났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불길이 워낙 거셌던 터라 본인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약에 자신의 아이들이 뛰어든다고 하면 말렸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화재 현장에서 다친 알리 씨를 화상 전문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도 받게 하고, 7백만 원이 넘는 병원비도 선뜻 내줬습니다. 알리 씨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거라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최근 장 씨는 알리 씨와 함께 출입국외국인사무소를 방문해 불법체류를 자진 신고했습니다. 단속에 적발되지 않을까, 누군가 고발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알리 씨를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서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합니다.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사람을 구하려다 다쳤는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알리의 꿈, 다시 꿀 수 있을까요?]

취재를 마친 날, 갑자기 알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차 안인 데다 아직 알리의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서너 번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알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 손흥민 선수를 만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방송국에 일하고 있지만, 저도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손 선수. "미안해요. 알리 씨. 저는 손흥민 선수 연락처를 몰라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함께 일한 촬영기자에게 "나도 만나고 싶은데"라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순수한 알리 씨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사실 알리 씨가 제일 원하는 것은 손흥민 선수를 만나는 것보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하지 않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면 그의 가족은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을 아는 장선옥 씨는 강원도에 의사상자 대상자로 추천하며 선처를 베풀어주길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알리 씨가 오랜 기간 한국에 더 머무를 수 없다면, 다친 곳이 완전히 나을 수 있게 치료받을 동안만이라도 체류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말입니다. 알리 씨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이웃도 선처가 내려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무너진 알리의 코리안 드림, 다시 꿈꿀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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