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양육비 문제 해결 힘써주세요”…연명치료 중단한 엄마의 마지막 당부

입력 2020.05.08 (07:00) 수정 2020.05.0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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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 양육비 50만 원', 단 한 번이 전부

5년 전 이혼하고 초등학생 형제를 홀로 키우는 김지혜 씨는 지난해 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전 남편이 주기로 했던 양육비 50만 원은 단 한 번 받은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지혜 씨의 가장 큰 걱정은 본인이 떠난 뒤 남은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커가는 것입니다. 본인 대신 아이들을 맡아 줄 친정어머니 부담도 덜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아이들이 양육비를 지급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았지만, 이내 좌절했습니다. 추심 소송 등 법적 절차에 적어도 1년이 걸리는데, 의사는 이미 지혜 씨가 지난해 말을 넘기기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의료진의 예상보다도 다섯 달을 더 버텼습니다. 그러나 지혜 씨는 늘어나는 병원비 부담에 결국 스스로 연명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어린이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가족들의 만류에 이틀을 더 버틴 끝에 지난 6일 연명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 "구원받아야 할 아이들이 남아 있어요"

산소호흡기 탓에 대화가 어려웠던 지혜 씨는 손글씨로 편지를 쓰며,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남겼습니다.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랐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톱질, 못질, 드릴까지 아빠들이 하는 건 다 했어요. 인라인도, 보드도, 스키도 다 같이 타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요...

양육비 제도 개선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도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나가서 열심히 으쌰으쌰하고, 1인 시위도 나가고 싶었는데 전부 다 못 나가게 되었네요.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쉽네요.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천천히 오세요. 구원 받아야 할 아이들이 있어요. 세상이 바뀔 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가 오셔요.

양육비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 지혜씨가 손글씨로 남긴 편지.양육비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 지혜씨가 손글씨로 남긴 편지.

■ '양육비 법안' 상임위 통과

지혜 씨와 함께 활동해 온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 회원들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양육비 이행강화 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대 국회에서 양육비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원 중 한 명이 '지혜 씨에게 양육비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오늘 여기에 모였다'는 말을 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들은 양육비 지급을 '부모의 의무'이자 '아이들의 생존권'이라고 규정하고, 정부와 국가가 이를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20대 국회에는 양육비 미지급 시 ▲운전면허 제한 ▲명단 공개 ▲형사 처벌 ▲국가의 대(代)지급 제도 등을 담은 양육비 이행 강화 법안이 올라와 있는데, 모두 본회의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겁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조금 뒤, 양육비 법안('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정춘숙 의원 대표 발의)이 상임위인 여성가족위원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직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회원들은 잠시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6일,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 소속 회원 30여 명이 국회 앞에 모여 양육비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지난 6일,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 소속 회원 30여 명이 국회 앞에 모여 양육비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 출국금지·명단공개·형사처벌은 빠져

하지만 이날 통과된 법안엔 양육비 채무자에 대한 출국 금지와 명단공개, 형사 처벌 등의 내용은 빠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신 정당한 이유 없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경우에 양육비 채무자에 대해 운전면허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그나마도 부처간 이견이 있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내용이 바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여성가족위원회 수석전문위의 법률안 검토보고서를 보면 경찰청은 교통과는 상관없는 이유와 면허 정지를 결부시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 운전면허 정지·취소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채무자의 거주 이전의 자유·직업의 자유·일반적 행동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는 겁니다.

또, 이날 회의록을 보면 법사위 일부 위원들이 기존의 법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는데, 이에 대해 이 법안을 대표 발의한 정춘숙 의원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정 의원은 "기존 법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그동안 여성·아동이 법적 권리의 주체가 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 법적 권리의 주체가 달라지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 오히려 법적 상상력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 "마땅한 아이들의 권리"

20대 국회가 얼마 안 남았는데도 마지막까지 애쓰는 이유를 묻자, 이영 양해연 대표는 "쉬지 않고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곧 법이 너의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이니 성장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혜 씨의 두 아들처럼 스스로 보호하거나 자립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마땅히 보장해야 하는 권리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하게 생각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법안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오로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때, 아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마땅한 권리라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지혜 씨가 활동하며 했던 말도 남겼습니다.

양해연은 앞으로도 양육비 법안 통과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5월 한 달 동안 서울과 경기도,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서 양육비 해결 촉구를 위한 릴레이 시위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또 한 법무법인의 도움을 받아, 지혜 씨가 미처 못 끝낸 양육비 추심 절차를 대신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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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양육비 문제 해결 힘써주세요”…연명치료 중단한 엄마의 마지막 당부
    • 입력 2020-05-08 07:00:55
    • 수정2020-05-08 07:05:59
    취재후·사건후
■ '매달 양육비 50만 원', 단 한 번이 전부

5년 전 이혼하고 초등학생 형제를 홀로 키우는 김지혜 씨는 지난해 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전 남편이 주기로 했던 양육비 50만 원은 단 한 번 받은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지혜 씨의 가장 큰 걱정은 본인이 떠난 뒤 남은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커가는 것입니다. 본인 대신 아이들을 맡아 줄 친정어머니 부담도 덜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아이들이 양육비를 지급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았지만, 이내 좌절했습니다. 추심 소송 등 법적 절차에 적어도 1년이 걸리는데, 의사는 이미 지혜 씨가 지난해 말을 넘기기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의료진의 예상보다도 다섯 달을 더 버텼습니다. 그러나 지혜 씨는 늘어나는 병원비 부담에 결국 스스로 연명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어린이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가족들의 만류에 이틀을 더 버틴 끝에 지난 6일 연명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 "구원받아야 할 아이들이 남아 있어요"

산소호흡기 탓에 대화가 어려웠던 지혜 씨는 손글씨로 편지를 쓰며,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남겼습니다.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랐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톱질, 못질, 드릴까지 아빠들이 하는 건 다 했어요. 인라인도, 보드도, 스키도 다 같이 타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요...

양육비 제도 개선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도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나가서 열심히 으쌰으쌰하고, 1인 시위도 나가고 싶었는데 전부 다 못 나가게 되었네요.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쉽네요.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천천히 오세요. 구원 받아야 할 아이들이 있어요. 세상이 바뀔 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가 오셔요.

양육비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 지혜씨가 손글씨로 남긴 편지.
■ '양육비 법안' 상임위 통과

지혜 씨와 함께 활동해 온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 회원들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양육비 이행강화 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대 국회에서 양육비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원 중 한 명이 '지혜 씨에게 양육비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오늘 여기에 모였다'는 말을 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들은 양육비 지급을 '부모의 의무'이자 '아이들의 생존권'이라고 규정하고, 정부와 국가가 이를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20대 국회에는 양육비 미지급 시 ▲운전면허 제한 ▲명단 공개 ▲형사 처벌 ▲국가의 대(代)지급 제도 등을 담은 양육비 이행 강화 법안이 올라와 있는데, 모두 본회의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겁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조금 뒤, 양육비 법안('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정춘숙 의원 대표 발의)이 상임위인 여성가족위원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직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회원들은 잠시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6일,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 소속 회원 30여 명이 국회 앞에 모여 양육비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 출국금지·명단공개·형사처벌은 빠져

하지만 이날 통과된 법안엔 양육비 채무자에 대한 출국 금지와 명단공개, 형사 처벌 등의 내용은 빠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신 정당한 이유 없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경우에 양육비 채무자에 대해 운전면허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그나마도 부처간 이견이 있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내용이 바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여성가족위원회 수석전문위의 법률안 검토보고서를 보면 경찰청은 교통과는 상관없는 이유와 면허 정지를 결부시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 운전면허 정지·취소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채무자의 거주 이전의 자유·직업의 자유·일반적 행동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는 겁니다.

또, 이날 회의록을 보면 법사위 일부 위원들이 기존의 법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는데, 이에 대해 이 법안을 대표 발의한 정춘숙 의원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정 의원은 "기존 법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그동안 여성·아동이 법적 권리의 주체가 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 법적 권리의 주체가 달라지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 오히려 법적 상상력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 "마땅한 아이들의 권리"

20대 국회가 얼마 안 남았는데도 마지막까지 애쓰는 이유를 묻자, 이영 양해연 대표는 "쉬지 않고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곧 법이 너의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이니 성장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혜 씨의 두 아들처럼 스스로 보호하거나 자립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마땅히 보장해야 하는 권리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하게 생각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법안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오로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때, 아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마땅한 권리라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지혜 씨가 활동하며 했던 말도 남겼습니다.

양해연은 앞으로도 양육비 법안 통과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5월 한 달 동안 서울과 경기도,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서 양육비 해결 촉구를 위한 릴레이 시위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또 한 법무법인의 도움을 받아, 지혜 씨가 미처 못 끝낸 양육비 추심 절차를 대신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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