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국회 앞 ‘1평 천막’이 사라지기까지 926일 걸렸다

입력 2020.05.21 (07:01) 수정 2020.05.21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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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앞 1평짜리 낡고 초라한 천막에서는

서울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방향으로 나 있는 국회 출입구 옆엔 낡은 천막이 있다. 비닐과 천으로 얼기설기 세운 데다 시간에 찌들어 행인의 눈길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천막 안 공간은 단 1평.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최승우 씨는 어제(20일)까지 이곳에서 926일을 보냈다.

이들은 2017년 11월 7일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해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 천막에서 자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씻었다. 국회 앞에서 버티며 법 통과를 기다렸다.


■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탄생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수용 명목으로 1975년 부산에 세워졌다. 어떤 이들은 악명 높은 유대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빗댈 정도로 형제복지원엔 폭력과 야만이 만연했다. '기상 시간이 1분 늦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 갖은 이유로 원생들을 때리고 굶겼다. 수용된 아동과 여성을 성폭행을 했고, 사람이 맞아 죽는 일도 빈번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이다.

부랑자들만 이곳에 간 게 아니었다. 최승우 씨는 중학생이던 1982년, 하굣길에 가방에 '빵 도둑'으로 몰려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를 빵 도둑이란 누명을 씌운 건 바로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은 형제복지원에 원생을 입소시키면 근무 가점을 받았다. 승진을 위해 경찰은 부랑자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1986년 12월 한 검사가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검찰 수뇌부의 외압에 막혀 좌초됐다. 원장 박인근은 횡령죄 등으로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이 어두운 그늘은 시간이 나면서 사람들에게 잊혀 갔다.

■ 고단했던 926일의 기록

피해자 한종선 씨가 2012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형제복지원은 서서히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진상규명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지만 법 제정은 당연하지 않았다. 19대 국회에선 관련 법은 폐기됐고, 20대 국회에서도 과거사법은 대다수 의원의 관심 밖이었다. 법안에 대한 여야의 의견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국회 앞 천막은 당연한 풍경이 됐다.

최승우 씨는 절박한 심정에 지난해 11월 24일간 고공 단식 농성을 했다. 한종선 씨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게 법 통과를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쉽게 국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최 씨가 두 번째 고공농성에 나선 지난 8일. 여야가 과거사법 처리에 합의했다. 20대 국회 유종의 미를 거두자며 의원들이 뜻을 모았다. 법안은 그제 행안위를 거쳐 어제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제 진상 규명은 시작될 것이고 국회 앞 낡은 천막도 사라지게 됐다. 다만 통과된 법안에 빠진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문제는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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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국회 앞 ‘1평 천막’이 사라지기까지 926일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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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0-05-21 07:04:03
    취재후·사건후
■ 국회 앞 1평짜리 낡고 초라한 천막에서는

서울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방향으로 나 있는 국회 출입구 옆엔 낡은 천막이 있다. 비닐과 천으로 얼기설기 세운 데다 시간에 찌들어 행인의 눈길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천막 안 공간은 단 1평.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최승우 씨는 어제(20일)까지 이곳에서 926일을 보냈다.

이들은 2017년 11월 7일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해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 천막에서 자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씻었다. 국회 앞에서 버티며 법 통과를 기다렸다.


■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탄생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수용 명목으로 1975년 부산에 세워졌다. 어떤 이들은 악명 높은 유대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빗댈 정도로 형제복지원엔 폭력과 야만이 만연했다. '기상 시간이 1분 늦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 갖은 이유로 원생들을 때리고 굶겼다. 수용된 아동과 여성을 성폭행을 했고, 사람이 맞아 죽는 일도 빈번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이다.

부랑자들만 이곳에 간 게 아니었다. 최승우 씨는 중학생이던 1982년, 하굣길에 가방에 '빵 도둑'으로 몰려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를 빵 도둑이란 누명을 씌운 건 바로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은 형제복지원에 원생을 입소시키면 근무 가점을 받았다. 승진을 위해 경찰은 부랑자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1986년 12월 한 검사가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검찰 수뇌부의 외압에 막혀 좌초됐다. 원장 박인근은 횡령죄 등으로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이 어두운 그늘은 시간이 나면서 사람들에게 잊혀 갔다.

■ 고단했던 926일의 기록

피해자 한종선 씨가 2012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형제복지원은 서서히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진상규명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지만 법 제정은 당연하지 않았다. 19대 국회에선 관련 법은 폐기됐고, 20대 국회에서도 과거사법은 대다수 의원의 관심 밖이었다. 법안에 대한 여야의 의견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국회 앞 천막은 당연한 풍경이 됐다.

최승우 씨는 절박한 심정에 지난해 11월 24일간 고공 단식 농성을 했다. 한종선 씨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게 법 통과를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쉽게 국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최 씨가 두 번째 고공농성에 나선 지난 8일. 여야가 과거사법 처리에 합의했다. 20대 국회 유종의 미를 거두자며 의원들이 뜻을 모았다. 법안은 그제 행안위를 거쳐 어제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제 진상 규명은 시작될 것이고 국회 앞 낡은 천막도 사라지게 됐다. 다만 통과된 법안에 빠진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문제는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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