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코로나 시대’ 위로하는 ‘온라인 앙상블’

입력 2020.05.22 (17:17) 수정 2020.05.2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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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된 안네 소피 무터, '온라인 현악 4중주' 공개

현악사중주는 바이올린 2대와 비올라, 첼로의 앙상블입니다. 다양한 음역의 현악기가 어우러져 풍부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쇼스타코비치 등 위대한 작곡가들이 자신의 보다 내밀한 정서를 표현하는 통로로 이 현악사중주를 애용했습니다. 특히 베토벤은 16곡의 현악사중주를 남길 만큼 애착을 보였는데, 이 가운데 중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10번'은 격렬한 감정의 전개를 드러내는 다른 곡들과 달리, 고요하고 부드러운 위로의 분위기로 사랑 받는 곡입니다.

그런데 베토벤 현악사중주 10번의 2악장을 연주하는 저 네 사람. 무대가 아니라 각자의 집인 듯합니다. 이 가운데 마스크를 쓰고 연주하는 여성은 코로나19에 확진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입니다. 무터가 런던 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온라인으로 협주한 영상인데, 스마트폰으로 각각 연주를 촬영한 뒤, 마치 한 자리에서 함께 연주한 것처럼 편집했습니다.

무터는 지난 3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연주를 공개하며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간 베토벤의 삶을 기억하자"고 당부했습니다. 베토벤이 1809년 프랑스와 빈의 전쟁 와중에 청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창고에 숨어 작곡했다는 이 음악은 2백여 년이 지난 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세계 시민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뉴욕에 스며든 말러의 '아다지에토'

두 번째 곡은 현악사중주보다 규모가 훨씬 큽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만 연주할 수 있는 말러의 교향곡 5번, 그중에서도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구성된 4악장입니다. 꿈길을 걷는 듯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반복되는 곡으로, 말러가 연인 알마를 향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의 뉴욕 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 곡을 온라인으로 합주하는 데 도전했습니다. 영상은 무터의 현악사중주 영상이 공개된 지 한 달 뒤인 지난달 26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습니다.

말러 교향곡의 특성상 최소 20명의 현악 주자들이 함께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앞서 소개해드린 현악사중주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입니다. 영상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 현악 주자 40명이 등장하는데, 실제 공연장에서의 연주만큼은 아니지만, 뉴욕 필 특유의 밀도 있는 합주력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국가는 미국, 그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 뉴욕입니다. 최근까지 뉴욕에서만 확진자가 35만여 명, 사망자도 2만 명을 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도시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던 뉴욕은 전염병의 참혹함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비극의 공간이 됐습니다. 이 뉴욕에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시민들을 위로하는 말러의 선율은 카네기 홀이나 링컨센터가 아니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도시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성사된 '환희의 송가'..."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음악"

마지막은 다시 베토벤입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난 3월 20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가운데 '환희의 송가'를 온라인으로 합주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인류애를 호소한 합창 교향곡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인 듯합니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으로 첼로와 비올라, 바순, 클라리넷, 바이올린, 플룻, 호른, 트롬본, 트럼펫이 차례로 등장하며 거대한 선율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오히려 무대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음악의 견고한 구조를 실감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케스트라의 선율 위로 등장하는 합창단의 음성과,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한 18명의 합주 장면은, 이 음악이 다수의 청중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순간입니다.

자신을 간호사라 소개한 어떤 이는 댓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면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런 음악이 필요하다"고 단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 무대를 잃어버린 음악가들의 소통법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온라인 앙상블'은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입니다. 무대를 잃어버린 음악가들이 객석을 잃어버린 관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이자, 고통과 슬픔이 음악을 만나 위로받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음악이 공간마저 초월할 수 있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머지않아 공연장의 문은 다시 열리고, 무대와 객석은 붐비겠지요. 새로운 추억을 공유하게 된 음악가와 청중의 거리는 역설적으로 코로나 이전보다 더 가까워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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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22 17:17:10
    • 수정2020-05-22 17:18:28
    취재K
코로나19 확진된 안네 소피 무터, '온라인 현악 4중주' 공개

현악사중주는 바이올린 2대와 비올라, 첼로의 앙상블입니다. 다양한 음역의 현악기가 어우러져 풍부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쇼스타코비치 등 위대한 작곡가들이 자신의 보다 내밀한 정서를 표현하는 통로로 이 현악사중주를 애용했습니다. 특히 베토벤은 16곡의 현악사중주를 남길 만큼 애착을 보였는데, 이 가운데 중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10번'은 격렬한 감정의 전개를 드러내는 다른 곡들과 달리, 고요하고 부드러운 위로의 분위기로 사랑 받는 곡입니다.

그런데 베토벤 현악사중주 10번의 2악장을 연주하는 저 네 사람. 무대가 아니라 각자의 집인 듯합니다. 이 가운데 마스크를 쓰고 연주하는 여성은 코로나19에 확진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입니다. 무터가 런던 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온라인으로 협주한 영상인데, 스마트폰으로 각각 연주를 촬영한 뒤, 마치 한 자리에서 함께 연주한 것처럼 편집했습니다.

무터는 지난 3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연주를 공개하며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간 베토벤의 삶을 기억하자"고 당부했습니다. 베토벤이 1809년 프랑스와 빈의 전쟁 와중에 청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창고에 숨어 작곡했다는 이 음악은 2백여 년이 지난 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세계 시민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뉴욕에 스며든 말러의 '아다지에토'

두 번째 곡은 현악사중주보다 규모가 훨씬 큽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만 연주할 수 있는 말러의 교향곡 5번, 그중에서도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구성된 4악장입니다. 꿈길을 걷는 듯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반복되는 곡으로, 말러가 연인 알마를 향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의 뉴욕 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 곡을 온라인으로 합주하는 데 도전했습니다. 영상은 무터의 현악사중주 영상이 공개된 지 한 달 뒤인 지난달 26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습니다.

말러 교향곡의 특성상 최소 20명의 현악 주자들이 함께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앞서 소개해드린 현악사중주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입니다. 영상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 현악 주자 40명이 등장하는데, 실제 공연장에서의 연주만큼은 아니지만, 뉴욕 필 특유의 밀도 있는 합주력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국가는 미국, 그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 뉴욕입니다. 최근까지 뉴욕에서만 확진자가 35만여 명, 사망자도 2만 명을 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도시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던 뉴욕은 전염병의 참혹함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비극의 공간이 됐습니다. 이 뉴욕에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시민들을 위로하는 말러의 선율은 카네기 홀이나 링컨센터가 아니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도시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성사된 '환희의 송가'..."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음악"

마지막은 다시 베토벤입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난 3월 20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가운데 '환희의 송가'를 온라인으로 합주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인류애를 호소한 합창 교향곡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인 듯합니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으로 첼로와 비올라, 바순, 클라리넷, 바이올린, 플룻, 호른, 트롬본, 트럼펫이 차례로 등장하며 거대한 선율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오히려 무대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음악의 견고한 구조를 실감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케스트라의 선율 위로 등장하는 합창단의 음성과,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한 18명의 합주 장면은, 이 음악이 다수의 청중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순간입니다.

자신을 간호사라 소개한 어떤 이는 댓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면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런 음악이 필요하다"고 단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 무대를 잃어버린 음악가들의 소통법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온라인 앙상블'은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입니다. 무대를 잃어버린 음악가들이 객석을 잃어버린 관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이자, 고통과 슬픔이 음악을 만나 위로받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음악이 공간마저 초월할 수 있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머지않아 공연장의 문은 다시 열리고, 무대와 객석은 붐비겠지요. 새로운 추억을 공유하게 된 음악가와 청중의 거리는 역설적으로 코로나 이전보다 더 가까워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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