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현관 ‘비번’…이대로 노출돼도 될까요

입력 2020.05.23 (01:34) 수정 2020.05.23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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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귀가하는 여성을 집까지 뒤따라가 성폭행하려 했던 이른바 '신림동 성폭행 미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후에도 비슷한 성범죄가 끊이질 않아 특히 혼자 사는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요.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여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됐을까요?

그런데 아쉽게도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그럼 정부의 치안 정책이 미흡했던 걸까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원룸 공용 출입문마다 버젓이 '비번'.. 누가 썼을까

KBS 취재진은 울산의 한 원룸촌을 찾아가 봤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출입문 벽면에 적힌 까만 글씨. 자세히 들여다보니 숫자와 글자가 섞인 비밀번호였습니다. 택배나 배달음식을 편하게 받기 위해 누군가가 공용 비밀번호를 써둔 거였습니다. 보이는 대로 번호를 누르자 예상대로 쉽게 문이 열렸습니다.

마침 이 원룸에 들어오던 40대 여성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불안하지 않으시냐고. "늦은 저녁이면 더 불안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면 괜히 겁이 나는데, 치킨 상자라도 들고 있으면 속으론 일단 안심을 하긴 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근 원룸도 가봤습니다. 이번에는 현관문 잠금장치 옆에 쓰인 비밀번호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적힌 위치만 다를 뿐, 비밀이어야 할 비밀번호는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취재진이 찾아간 원룸 10곳은 모두 '묻지 마 패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번호는 누가 쓴 걸까. 현장에서 만난 한 남성은 건물 공사 도중 출입을 편하게 하려고 공사 관계자가 적어 뒀거나 주인이나 세입자가 쓰는 경우도 많다고 했습니다.


한 원룸에 물품을 배달하고 있는 택배 직원 모습.한 원룸에 물품을 배달하고 있는 택배 직원 모습.

■편리함이냐 VS 안전이냐.. "출입문 잠금장치 해제한 곳도 많아요"

늦은 밤, 엘리베이터에서 야식 배달을 하러 온 기사들을 마주치는 건 이제 일상인데요. 음식을 주문한 집 안까지 배달해야 하니 기사들도 공용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이 일일이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기도, 시간에 쫓기는 기사님들도 묻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죠.

원룸에 사는 여성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비밀번호 적힌 거 보면 불안하죠. 그런데 장점도 있거든요. 비밀번호가 적혀 있어야 택배 물품을 받기가 쉬운데.. 이걸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온라인으로 물품을 구매하고 택배로 물품을 받는 '배달문화'가 발달해 있죠.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언택트(비대면)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배달 수요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편리함만 추구하다 보니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바로 '안전'입니다.

물론 배달 기사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게 위험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밀번호가 너무나 쉽게 노출되다 보니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출입할 수 있고, 결국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한 50대 택배 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객들한테 문자가 와요.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줄 테니 집 안에까지 물건을 넣어달라고요. 그리고 아예 출입문 잠금장치를 해제해서 문을 열어둔 곳도 수두룩합니다."

'범죄예방 우수 원룸'에 설치된 무인 택배함.'범죄예방 우수 원룸'에 설치된 무인 택배함.

■주거 침입 피해 가능성 '여성 > 남성'.. 공동체 안전 의식 가져야!

강지현 울산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1인 가구의 범죄피해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서 여성 1인 가구는 남성보다 전체 범죄 피해를 볼 가능성을 2배 이상, 주거침입 피해를 볼 가능성을 무려 11배 이상 높다고 분석했습니다. 1인 가구 증가로 혼자 사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성 안전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경찰은 여성들이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원룸을 '범죄예방 우수 원룸'으로 인증하고 있습니다. 우수원룸으로 인증을 받으려면 50가지가 넘는 보안 평가 항목을 충족해야 하는데요. 외부인의 출입을 줄이기 위해 가스계량기와 무인 택배 함을 건물 밖에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우수원룸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방범 시설비용을 건물주가 모두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도 지난해 7월부터 원룸과 오피스텔 같은 다세대주택을 지을 때 범죄예방 시설을 의무화했는데요. 가스관 등 외벽을 통해 침입할 수 없도록 방지시설을 갖추게 했고, 주차장 CCTV와 외부 조명 등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치안 정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의 안전을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편리함을 조금 희생하면서 공동체의 안전을 생각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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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룸 현관 ‘비번’…이대로 노출돼도 될까요
    • 입력 2020-05-23 01:34:38
    • 수정2020-05-23 03:14:40
    취재K
지난해 5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귀가하는 여성을 집까지 뒤따라가 성폭행하려 했던 이른바 '신림동 성폭행 미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후에도 비슷한 성범죄가 끊이질 않아 특히 혼자 사는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요.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여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됐을까요?

그런데 아쉽게도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그럼 정부의 치안 정책이 미흡했던 걸까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원룸 공용 출입문마다 버젓이 '비번'.. 누가 썼을까

KBS 취재진은 울산의 한 원룸촌을 찾아가 봤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출입문 벽면에 적힌 까만 글씨. 자세히 들여다보니 숫자와 글자가 섞인 비밀번호였습니다. 택배나 배달음식을 편하게 받기 위해 누군가가 공용 비밀번호를 써둔 거였습니다. 보이는 대로 번호를 누르자 예상대로 쉽게 문이 열렸습니다.

마침 이 원룸에 들어오던 40대 여성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불안하지 않으시냐고. "늦은 저녁이면 더 불안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면 괜히 겁이 나는데, 치킨 상자라도 들고 있으면 속으론 일단 안심을 하긴 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근 원룸도 가봤습니다. 이번에는 현관문 잠금장치 옆에 쓰인 비밀번호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적힌 위치만 다를 뿐, 비밀이어야 할 비밀번호는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취재진이 찾아간 원룸 10곳은 모두 '묻지 마 패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번호는 누가 쓴 걸까. 현장에서 만난 한 남성은 건물 공사 도중 출입을 편하게 하려고 공사 관계자가 적어 뒀거나 주인이나 세입자가 쓰는 경우도 많다고 했습니다.


한 원룸에 물품을 배달하고 있는 택배 직원 모습.
■편리함이냐 VS 안전이냐.. "출입문 잠금장치 해제한 곳도 많아요"

늦은 밤, 엘리베이터에서 야식 배달을 하러 온 기사들을 마주치는 건 이제 일상인데요. 음식을 주문한 집 안까지 배달해야 하니 기사들도 공용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이 일일이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기도, 시간에 쫓기는 기사님들도 묻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죠.

원룸에 사는 여성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비밀번호 적힌 거 보면 불안하죠. 그런데 장점도 있거든요. 비밀번호가 적혀 있어야 택배 물품을 받기가 쉬운데.. 이걸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온라인으로 물품을 구매하고 택배로 물품을 받는 '배달문화'가 발달해 있죠.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언택트(비대면)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배달 수요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편리함만 추구하다 보니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바로 '안전'입니다.

물론 배달 기사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게 위험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밀번호가 너무나 쉽게 노출되다 보니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출입할 수 있고, 결국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한 50대 택배 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객들한테 문자가 와요.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줄 테니 집 안에까지 물건을 넣어달라고요. 그리고 아예 출입문 잠금장치를 해제해서 문을 열어둔 곳도 수두룩합니다."

'범죄예방 우수 원룸'에 설치된 무인 택배함.
■주거 침입 피해 가능성 '여성 > 남성'.. 공동체 안전 의식 가져야!

강지현 울산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1인 가구의 범죄피해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서 여성 1인 가구는 남성보다 전체 범죄 피해를 볼 가능성을 2배 이상, 주거침입 피해를 볼 가능성을 무려 11배 이상 높다고 분석했습니다. 1인 가구 증가로 혼자 사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성 안전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경찰은 여성들이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원룸을 '범죄예방 우수 원룸'으로 인증하고 있습니다. 우수원룸으로 인증을 받으려면 50가지가 넘는 보안 평가 항목을 충족해야 하는데요. 외부인의 출입을 줄이기 위해 가스계량기와 무인 택배 함을 건물 밖에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우수원룸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방범 시설비용을 건물주가 모두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도 지난해 7월부터 원룸과 오피스텔 같은 다세대주택을 지을 때 범죄예방 시설을 의무화했는데요. 가스관 등 외벽을 통해 침입할 수 없도록 방지시설을 갖추게 했고, 주차장 CCTV와 외부 조명 등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치안 정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의 안전을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편리함을 조금 희생하면서 공동체의 안전을 생각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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