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K] 조선의 구원투수 ‘거북선’ 첫 등판일은?

입력 2020.05.2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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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민족 자긍심의 대명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28년 전 임진왜란인 1592년 5월 29일. 사천 앞바다를 침범한 왜군 앞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전선 23척을 이끌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사천해전의 승리를 이끌며 조선의 '구원투수'가 된 거북선의 첫 등판이었습니다.

태종실록, "왕이 거북선과 왜선의 싸움을 구경하다."

그럼, 오늘이 역사에서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날일까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거북선(龜船)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그 결과 거북선은 이보다 훨씬 전에도 등장합니다. (이후 해석은 편찬위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上過臨津渡, 觀龜船、倭船相戰之狀"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사천해전보다 180년 정도 앞선 1413년, 태종 13년 2월 5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2년 후, 1415년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비서관이라 할 좌대언(좌승지) 탁신이 왕에게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보고합니다.

다만, 이후 실록에서는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없습니다. 거북선의 위력이 검증됐지만, 거북선이 실전에 배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 건, 바로 사천해전의 승전보입니다. 1592년 6월 21일 그러니까, 사천해전 승전 한 달 후입니다. 사천 앞바다에서 맞닥뜨린 왜군은 이순신과 원균의 조선 수군을 유인합니다. 이를 본 이순신은 거짓 퇴각을 하면서 왜군을 역으로 유인합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투를 기록했습니다.

이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

"거북선을 더 많이 만들지 않는가?"..."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

전란에 빠진 조선의 구원투수였던 거북선은 왜군에겐 공포의 대상이 됐습니다. 거북선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 송곳을" 심었다고 돼 있습니다.(채연석,'함포(艦砲)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연구'에서 재인용)

이순신의 장계를 살피지 않았던 걸까요? 선조는 1596년 신하들에게 거북선의 모습을 묻습니다. 선조가 거북선에 관해 묻자, 신하인 남이공이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조인득 역시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다"고 말을 보탭니다.

‘거북선과 쇠갈고리’ 사진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거북선과 쇠갈고리’ 사진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렇다면 거북선을 왜 더 많이 만들지 않느냐고 왕이 물었습니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이라 답합니다. 남이공은 당시 북인의 거두로 이순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류성룡과는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정조 편찬 대전통편 "거북선은 임진왜란때 창제..." 고종, '龜船將' 운영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도 거북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에이스였습니다. 1785년 정조가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경기지역에 "...귀선(龜船) 1척 주진에 둔다"고 정하는 등 각 지역에 거북선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 대전통편에는 "龜船 壬辰倭亂時, 刱制"라 해서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창제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선은 언제까지 남아있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67년 고종 4년, 의정부에서 청산진의 전선을 새로 만드는 것을 청하며 거북선의 배치를 논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어 1886년에는 "나주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다고 돼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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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29 11:45:36
    팩트체크K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민족 자긍심의 대명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28년 전 임진왜란인 1592년 5월 29일. 사천 앞바다를 침범한 왜군 앞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전선 23척을 이끌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사천해전의 승리를 이끌며 조선의 '구원투수'가 된 거북선의 첫 등판이었습니다.

태종실록, "왕이 거북선과 왜선의 싸움을 구경하다."

그럼, 오늘이 역사에서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날일까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거북선(龜船)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그 결과 거북선은 이보다 훨씬 전에도 등장합니다. (이후 해석은 편찬위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上過臨津渡, 觀龜船、倭船相戰之狀"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사천해전보다 180년 정도 앞선 1413년, 태종 13년 2월 5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2년 후, 1415년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비서관이라 할 좌대언(좌승지) 탁신이 왕에게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보고합니다.

다만, 이후 실록에서는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없습니다. 거북선의 위력이 검증됐지만, 거북선이 실전에 배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 건, 바로 사천해전의 승전보입니다. 1592년 6월 21일 그러니까, 사천해전 승전 한 달 후입니다. 사천 앞바다에서 맞닥뜨린 왜군은 이순신과 원균의 조선 수군을 유인합니다. 이를 본 이순신은 거짓 퇴각을 하면서 왜군을 역으로 유인합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투를 기록했습니다.

이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

"거북선을 더 많이 만들지 않는가?"..."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

전란에 빠진 조선의 구원투수였던 거북선은 왜군에겐 공포의 대상이 됐습니다. 거북선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 송곳을" 심었다고 돼 있습니다.(채연석,'함포(艦砲)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연구'에서 재인용)

이순신의 장계를 살피지 않았던 걸까요? 선조는 1596년 신하들에게 거북선의 모습을 묻습니다. 선조가 거북선에 관해 묻자, 신하인 남이공이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조인득 역시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다"고 말을 보탭니다.

‘거북선과 쇠갈고리’ 사진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렇다면 거북선을 왜 더 많이 만들지 않느냐고 왕이 물었습니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이라 답합니다. 남이공은 당시 북인의 거두로 이순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류성룡과는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정조 편찬 대전통편 "거북선은 임진왜란때 창제..." 고종, '龜船將' 운영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도 거북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에이스였습니다. 1785년 정조가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경기지역에 "...귀선(龜船) 1척 주진에 둔다"고 정하는 등 각 지역에 거북선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 대전통편에는 "龜船 壬辰倭亂時, 刱制"라 해서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창제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선은 언제까지 남아있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67년 고종 4년, 의정부에서 청산진의 전선을 새로 만드는 것을 청하며 거북선의 배치를 논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어 1886년에는 "나주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다고 돼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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