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질병의 공포’ 끌어안은 미성, 안드레아 보첼리

입력 2020.05.2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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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보첼리, 텅 빈 두오모에서 무관중 공연

세자르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은 테너 혹은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성악 작품입니다. 원제는 라틴어 Panis Angelicus(파니스 안젤리쿠스)로, 직역하면 '천사들의 빵'이지만, 보다 쉬운 '생명의 양식'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경건하면서도 따뜻한 현악 선율 위로 '주여, 먹여 주소서'란 가사가 반복되는 이 노래는 전설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자주 부르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시각장애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성은 파바로티의 그것보다 더 가늘고 섬세합니다. 어느새 환갑을 넘겨 백발이 된 그가 부활절이었던 지난달 12일, 텅 빈 밀라노 두오모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건물이자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드넓은 예배당은 파이프 오르간과 보첼리의 음성만으로 꽉 찼습니다. 이날 공연의 제목은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세계인들을 위로하는 보첼리의 노래는 관중 없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첫 곡이 바로 저 '생명의 양식'이었는데, "함께하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던 그의 말처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간주곡을 편곡한 '산타마리아' 등 친숙한 노래가 이어진 공연은 유튜브 조회 수가 하루 만에 2천8백만을 넘을 만큼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두오모 광장 향한 '어메이징 그레이스'

보첼리는 마지막 곡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를 때 성당 바깥으로 나와 두오모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영상에는 텅 빈 파리와 런던, 뉴욕의 풍경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보첼리 특유의 사색적인 미성이 코로나19로 침묵에 잠긴 도시들과 어우러져, 노래가 슬픔을 끌어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3월 코로나19 확진 뒤 완치…치료제 연구 위해 혈장 기부도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를 때 보첼리는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완치된 직후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됐습니다. 지난 26일 이탈리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첼리가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 그는 "온 가족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악몽 속에 사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습니다. 그가 확진 판정을 받은 시기는 3월 10일, 그리고 3월 말 완치 판정을 받았으니, 두오모 공연은 이로부터 불과 2주가량 지난 시점에 열렸던 겁니다.

보첼리가 확진 사실을 공개한 곳은 이탈리아 피사의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와 아내는 이날 병원에서 자신들의 혈장을 기부했습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코로나19에서 회복한 환자들의 혈장에서 항체를 추출해 치료제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보첼리가 기부한 혈장도 이탈리아 의료진의 연구에 활용되겠지요. 두오모 광장에 울린 그의 노래가 어느 때보다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질병의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첼리는 12살 때 시력을 잃었지만, 타고난 미성으로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997년 그를 인기 대열에 올렸던 노래 'Con Te Partirò'는 지금까지도 제2의 보첼리를 꿈꾸는 가수들이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식지 않는 인기에도 그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무감하지 않은 공감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신뢰하고 널리 함께 나누려는 그의 노력은, 코로나19 공포로 얼어붙은 도시와 사람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제 보첼리는 위로가 아닌 기쁨과 축하의 노래를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승리를 축하하는 날, 저는 밀라노시와 두오모의 초청에 영광스럽고 행복한 마음으로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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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의 순간] ‘질병의 공포’ 끌어안은 미성, 안드레아 보첼리
    • 입력 2020-05-29 19: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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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보첼리, 텅 빈 두오모에서 무관중 공연

세자르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은 테너 혹은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성악 작품입니다. 원제는 라틴어 Panis Angelicus(파니스 안젤리쿠스)로, 직역하면 '천사들의 빵'이지만, 보다 쉬운 '생명의 양식'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경건하면서도 따뜻한 현악 선율 위로 '주여, 먹여 주소서'란 가사가 반복되는 이 노래는 전설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자주 부르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시각장애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성은 파바로티의 그것보다 더 가늘고 섬세합니다. 어느새 환갑을 넘겨 백발이 된 그가 부활절이었던 지난달 12일, 텅 빈 밀라노 두오모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건물이자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드넓은 예배당은 파이프 오르간과 보첼리의 음성만으로 꽉 찼습니다. 이날 공연의 제목은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세계인들을 위로하는 보첼리의 노래는 관중 없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첫 곡이 바로 저 '생명의 양식'이었는데, "함께하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던 그의 말처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간주곡을 편곡한 '산타마리아' 등 친숙한 노래가 이어진 공연은 유튜브 조회 수가 하루 만에 2천8백만을 넘을 만큼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두오모 광장 향한 '어메이징 그레이스'

보첼리는 마지막 곡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를 때 성당 바깥으로 나와 두오모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영상에는 텅 빈 파리와 런던, 뉴욕의 풍경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보첼리 특유의 사색적인 미성이 코로나19로 침묵에 잠긴 도시들과 어우러져, 노래가 슬픔을 끌어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3월 코로나19 확진 뒤 완치…치료제 연구 위해 혈장 기부도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를 때 보첼리는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완치된 직후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됐습니다. 지난 26일 이탈리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첼리가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 그는 "온 가족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악몽 속에 사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습니다. 그가 확진 판정을 받은 시기는 3월 10일, 그리고 3월 말 완치 판정을 받았으니, 두오모 공연은 이로부터 불과 2주가량 지난 시점에 열렸던 겁니다.

보첼리가 확진 사실을 공개한 곳은 이탈리아 피사의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와 아내는 이날 병원에서 자신들의 혈장을 기부했습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코로나19에서 회복한 환자들의 혈장에서 항체를 추출해 치료제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보첼리가 기부한 혈장도 이탈리아 의료진의 연구에 활용되겠지요. 두오모 광장에 울린 그의 노래가 어느 때보다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질병의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첼리는 12살 때 시력을 잃었지만, 타고난 미성으로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997년 그를 인기 대열에 올렸던 노래 'Con Te Partirò'는 지금까지도 제2의 보첼리를 꿈꾸는 가수들이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식지 않는 인기에도 그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무감하지 않은 공감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신뢰하고 널리 함께 나누려는 그의 노력은, 코로나19 공포로 얼어붙은 도시와 사람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제 보첼리는 위로가 아닌 기쁨과 축하의 노래를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승리를 축하하는 날, 저는 밀라노시와 두오모의 초청에 영광스럽고 행복한 마음으로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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