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눈물, 이제는 닦아줄 수 있을까?

입력 2020.05.30 (07:02) 수정 2020.05.3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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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폭력에 시달려 본 적 있는지요? 누군가로부터 맞거나, 욕을 듣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합니다.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종종 약자를 이용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해 삶을 망가뜨립니다.

가해자가 절대적으로 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라면, 폭력 피해자들은 어떻게 그 분노와 아픔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에는 국가 폭력에 희생됐지만, 아직도 아픔을 해결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권위주의 시기,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독재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때로는 폭도로 몰았습니다. 이 같은 '잘못된 과거'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20대에 이어, 21대 국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 청산입니다. KBS 정치부 의정팀이 실시한 설문에 응한 당선인 214명 가운데 27명이 과거사 청산을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5.18 관련 망언까지 처벌하겠습니다"

21대 당선인들이 청산 대상으로 첫손에 꼽은 과거사는 5.18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 전남 지역 21대 국회의원 당선인 18명이 국회 개원과 함께 5.18 관련법 개정 추진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존 법안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2018년 제정된 '5.18 진상규명특별법'이 있습니다.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은 5.18과 관련된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관련자 상훈을 취소하는 등의 가해자 처벌 방안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이 내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지적에 따라, 20대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당시 누가 시민을 향해 총을 쐈는지, 실질적인 발포자를 찾아내는 등 가해자를 밝혀내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이 법안 통과 과정에서 대폭 축소되고, 진상규명을 하자는 분위기 속에서도 5.18과 관련된 망언과 왜곡 발언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왔습니다.

1호 법안으로 5.18 관련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는 의원들은 5.18 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5.18 왜곡, 폄하 발언을 강력히 처벌하는 방안을 법안에 담겠다고 밝혔습니다.


■ 4.3 특별법, 여순사건 특별법도 추진

제주 지역 당선인 3명은 '4.3특별법' 통과에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해당 법안은 19대, 20대 국회 때 발의됐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70만 제주 도민 가운데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은 8만 명에 이릅니다.

이번 국회에서 해당 법안 통과에 사활을 걸겠다고 밝힌 제주시을 오영훈 당선인은 본인 가족도 4.3 피해자입니다.

전남 여수와 순천 지역 당선인들은 '여순사건 특별법'을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법안에는 공통적으로 사건 진상 규명, 피해자들 배상과 보상 방안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 산발적인 특별법 추진…'과거사법' 한계

당선인들은 왜 제각기 과거 일어난 사건별로 특별법을 제정하고자 할까요?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과거사법(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법)이 '반쪽 법안'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사법에는 가해자 처벌 방안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방안이 모두 빠졌습니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방안이 담겨있을 뿐입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해당 법을 통해 일괄적으로 배상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했지만, 통과된 법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소송, 또 소송…끝나지 않는 고통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개별 소송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아왔습니다. 유신정권을 비판했다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 씨는 1974년, 버스 안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유신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2010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뒤 형사상 배상은 받았지만, 민사상 배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2016년 대법원은 오 씨가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에 따라 지원금을 받았기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오 씨는 46년이나 지났지만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맞았고,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가해자의 이름도 얼굴도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오 씨는 "나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가해자는 잘사는 게 억울합니다. 인생을 망쳐놨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항변했습니다.


■ 포괄적인 과거사법 마련해야

과거사 청산 법안을 내려는 당선인들은 지역구를 감안하고, 피해자 배상과 보상을 위한 재정 마련 방안까지 생각하면 사안별로 특별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안별로 상대적으로 소수인 피해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간첩단 조작 사건들, 긴급조치 피해자들, 민간인 학살 사건들.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숫자가 적고,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제각각 특별법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법의 사각지대에서 다시 한 번 소외되지 않기 위해 포괄적인 과거사 청산 법안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과거사법을 개정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고, 고문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와 지원방안을 담은 고문방지법이 강화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 "가해자 처벌 없이 '과거사 청산'은 없다"

취재과정에서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과 함세웅 신부를 만났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머리로, 마음으로 이해해보고자 애써봤습니다.

내가 피해자라면 배, 보상이 절실할까, 내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들에 대한 응징이 더 우선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함세웅 신부는 우선순위를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맞지만, 가해자 처벌 없는 피해자 보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섭게 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그들의 죄는 묻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가서 그걸 잊어버려라? 이건 피해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가학적인 행위입니다."

과거사 청산의 숙제를 안아 든 21대 국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 피해자들의 망가진 삶, 그들의 눈물을 이제는 닦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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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눈물, 이제는 닦아줄 수 있을까?
    • 입력 2020-05-30 07:02:48
    • 수정2020-05-30 07:03:36
    취재후·사건후
살면서 폭력에 시달려 본 적 있는지요? 누군가로부터 맞거나, 욕을 듣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합니다.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종종 약자를 이용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해 삶을 망가뜨립니다.

가해자가 절대적으로 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라면, 폭력 피해자들은 어떻게 그 분노와 아픔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에는 국가 폭력에 희생됐지만, 아직도 아픔을 해결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권위주의 시기,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독재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때로는 폭도로 몰았습니다. 이 같은 '잘못된 과거'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20대에 이어, 21대 국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 청산입니다. KBS 정치부 의정팀이 실시한 설문에 응한 당선인 214명 가운데 27명이 과거사 청산을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5.18 관련 망언까지 처벌하겠습니다"

21대 당선인들이 청산 대상으로 첫손에 꼽은 과거사는 5.18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 전남 지역 21대 국회의원 당선인 18명이 국회 개원과 함께 5.18 관련법 개정 추진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존 법안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2018년 제정된 '5.18 진상규명특별법'이 있습니다.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은 5.18과 관련된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관련자 상훈을 취소하는 등의 가해자 처벌 방안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이 내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지적에 따라, 20대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당시 누가 시민을 향해 총을 쐈는지, 실질적인 발포자를 찾아내는 등 가해자를 밝혀내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이 법안 통과 과정에서 대폭 축소되고, 진상규명을 하자는 분위기 속에서도 5.18과 관련된 망언과 왜곡 발언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왔습니다.

1호 법안으로 5.18 관련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는 의원들은 5.18 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5.18 왜곡, 폄하 발언을 강력히 처벌하는 방안을 법안에 담겠다고 밝혔습니다.


■ 4.3 특별법, 여순사건 특별법도 추진

제주 지역 당선인 3명은 '4.3특별법' 통과에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해당 법안은 19대, 20대 국회 때 발의됐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70만 제주 도민 가운데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은 8만 명에 이릅니다.

이번 국회에서 해당 법안 통과에 사활을 걸겠다고 밝힌 제주시을 오영훈 당선인은 본인 가족도 4.3 피해자입니다.

전남 여수와 순천 지역 당선인들은 '여순사건 특별법'을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법안에는 공통적으로 사건 진상 규명, 피해자들 배상과 보상 방안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 산발적인 특별법 추진…'과거사법' 한계

당선인들은 왜 제각기 과거 일어난 사건별로 특별법을 제정하고자 할까요?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과거사법(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법)이 '반쪽 법안'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사법에는 가해자 처벌 방안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방안이 모두 빠졌습니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방안이 담겨있을 뿐입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해당 법을 통해 일괄적으로 배상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했지만, 통과된 법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소송, 또 소송…끝나지 않는 고통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개별 소송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아왔습니다. 유신정권을 비판했다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 씨는 1974년, 버스 안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유신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2010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뒤 형사상 배상은 받았지만, 민사상 배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2016년 대법원은 오 씨가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에 따라 지원금을 받았기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오 씨는 46년이나 지났지만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맞았고,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가해자의 이름도 얼굴도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오 씨는 "나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가해자는 잘사는 게 억울합니다. 인생을 망쳐놨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항변했습니다.


■ 포괄적인 과거사법 마련해야

과거사 청산 법안을 내려는 당선인들은 지역구를 감안하고, 피해자 배상과 보상을 위한 재정 마련 방안까지 생각하면 사안별로 특별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안별로 상대적으로 소수인 피해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간첩단 조작 사건들, 긴급조치 피해자들, 민간인 학살 사건들.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숫자가 적고,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제각각 특별법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법의 사각지대에서 다시 한 번 소외되지 않기 위해 포괄적인 과거사 청산 법안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과거사법을 개정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고, 고문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와 지원방안을 담은 고문방지법이 강화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 "가해자 처벌 없이 '과거사 청산'은 없다"

취재과정에서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과 함세웅 신부를 만났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머리로, 마음으로 이해해보고자 애써봤습니다.

내가 피해자라면 배, 보상이 절실할까, 내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들에 대한 응징이 더 우선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함세웅 신부는 우선순위를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맞지만, 가해자 처벌 없는 피해자 보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섭게 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그들의 죄는 묻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가서 그걸 잊어버려라? 이건 피해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가학적인 행위입니다."

과거사 청산의 숙제를 안아 든 21대 국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 피해자들의 망가진 삶, 그들의 눈물을 이제는 닦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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