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강제징용 재판서류, 일본 가면 ‘깜깜 무소식’인 이유

입력 2020.06.04 (15:07) 수정 2020.06.0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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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지금도 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금전을 다투는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피고가 돈을 주지 않는 경우, 원고가 판결문을 근거로 강제집행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건 외국, 일본에 있는 기업이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시송달 절차 밟는 국내 법원…왜?

이춘식 할아버지를 비롯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18년 대법원의 승소 확정판결에 근거해 일본제철이 포스코와 합작해 국내에 설립한 주식회사 PNR의 주식 8만 1075주(액면가 5000원 기준 약 4억여 원) 등 전범기업들의 국내 자산을 압류했습니다. 또 이를 매각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냈습니다.

법원은 압류를 거쳐 당사자 자산을 매각하는 경우, 재산을 가진 당사자에게 이를 통보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법원은 지난 1월 채무자인 일본 기업에 압류명령 결정 정본을 송달하기 위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를 거쳐 일본 외무성에 서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지난해 2월 서류를 받았지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다 같은 해 7월 말 반송사유 기재 없이 서류 일체를 한국으로 반송했습니다. 대법원은 반송 직후 서류를 일본 외무성에 다시 보냈지만, 일본 정부는 서류 수령 후 송달을 진행하지도 않고 서류를 반송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법원은 지난 1일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주식회사에 대해 △채권압류명령결정정본 △국내송달장소 영수인 신고명령 등을 해당 법원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이를 수령해가라는 공시송달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시송달이란 상대방에게 통상의 방법으로 서류 송달이 되지 않는 경우, 당사자의 신청 또는 법원 직권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상대방에게 송달이 된 걸로 간주하는 송달 방식을 말합니다. 이번에 지정된 기간인 2개월, 즉 8월 4일부터는 압류 서류가 일본제철에 송달이 된 걸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법원이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건 우리나라와 일본이 모두 '민사 또는 상사의 재판상 및 재판외 문서의 해외 송달에 관한 협약', 이른바 '헤이그 송달조약'에 가입돼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외무성이 '블랙홀' 된 이유

재판서류를 우편처럼 그냥 보내버리면 대단히 간단하겠습니다만, 헤이그 조약은 재판 서류를 보내는 절차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재판 서류를 곧바로 상대방에게 송달하는 것이 아니라, 송달받을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의 '중앙당국'에 △해외송달요청서 △송달되는 문서를 각각 2부씩 보내야 합니다(제3조).

우리나라에서 일본 기업이 재판 당사자가 되는 경우 일본 본사에 소송 서류를 송달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요, 여기서 우리나라의 중앙당국은 대법원 법원행정처, 일본의 중앙당국은 일본 외무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각급 법원은 대법원 법원행정처를 거쳐 일본 외무성을 통해 일본 내 당사자에게 소송서류를 송달해야 하는 것이죠.

통상의 경우라면 송달이 되어야 하지만, 강제징용 재판 관련 소송서류는 유독 일본 외무성에만 가면 감감무소식입니다. 법조계에선 일본 외무성이 헤이그 조약 제13조를 근거로 송달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당 조항은 '송달요청서가 이 협약의 규정과 일치할 때, 피촉탁국은 이를 이행하는 것이 자국의 주권 또는 안보를 침해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 한하여서만 이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이 서류를 일본 기업에 송달할 경우 한국 내 국내 자산의 집행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하고, 자국 기업 보호를 이유로 해당 서류 송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같은 조 단서는 '중앙당국은 송달요청을 거부하는 경우 신청인에게 즉시 그 거부의 사유를 통지한다'로 되어 있어, 이러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반송하는 것은 협약 위반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 때문에 한 차례 반송한 이후, 다른 서류들은 반송도 송달도 하지 않은 채 외무성에서 갖고만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외교관이 서류 전달? 불가능

그렇다면 일본에서 저희 외교 공관 직원이 서류를 일본 기업에 직접 송달하는 것은 안 되느냐고요? 분명 유효한 방법입니다. 다만 이번 사건의 경우엔 그게 어렵습니다.

현행 '국제민사사법공조 등에 관한 예규(재일 2014-1)'는 외국에 대한 송달촉탁을 △헤이그 송달협약에 따른 송달촉탁 △양자조약에 따른 송달촉탁 △국제민사사법공조법에 따른 외국관할법원 송달촉탁과 영사 송달촉탁 등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취지를 요약하면, 한국 외교공관 직원이 직접 송달할 수 있는 경우는 송달받을 사람이 '대한민국 국적일 때'로 한정됩니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엔 송달받을 사람이 일본인이고, 즉 외국인입니다. 따라서 외교공관 직원을 통해 송달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어 예규는 송달받은 사람의 국적이 외국인인 경우 호주, 중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태국인이라면 양자조약에 따른 송달촉탁(홍콩, 마카오 제외)을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헤이그 송달협약에 가입한 경우엔 협약 따른 송달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합니다(미국은 헤이그 협약 가입국이지만 번역문을 첨부해 영사송달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헤이그 협약 체약국이기 때문에 협약을 통해 송달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협약을 통해 송달을 시도했음에도 상대 국가가 계속 송달을 하지 않아 언제까지고 집행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불합리하겠죠. 국내 법원은 이 때문에 공시송달 결정을 내린 겁니다.

피해자들이 90세 넘는 고령이란 점을 감안하면, 언제까지고 집행을 미룰 순 없단 게 이번 공시송달 결정의 배경이라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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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강제징용 재판서류, 일본 가면 ‘깜깜 무소식’인 이유
    • 입력 2020-06-04 15:07:59
    • 수정2020-06-04 15:11:36
    취재후·사건후
대법원이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지금도 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금전을 다투는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피고가 돈을 주지 않는 경우, 원고가 판결문을 근거로 강제집행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건 외국, 일본에 있는 기업이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시송달 절차 밟는 국내 법원…왜?

이춘식 할아버지를 비롯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18년 대법원의 승소 확정판결에 근거해 일본제철이 포스코와 합작해 국내에 설립한 주식회사 PNR의 주식 8만 1075주(액면가 5000원 기준 약 4억여 원) 등 전범기업들의 국내 자산을 압류했습니다. 또 이를 매각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냈습니다.

법원은 압류를 거쳐 당사자 자산을 매각하는 경우, 재산을 가진 당사자에게 이를 통보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법원은 지난 1월 채무자인 일본 기업에 압류명령 결정 정본을 송달하기 위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를 거쳐 일본 외무성에 서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지난해 2월 서류를 받았지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다 같은 해 7월 말 반송사유 기재 없이 서류 일체를 한국으로 반송했습니다. 대법원은 반송 직후 서류를 일본 외무성에 다시 보냈지만, 일본 정부는 서류 수령 후 송달을 진행하지도 않고 서류를 반송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법원은 지난 1일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주식회사에 대해 △채권압류명령결정정본 △국내송달장소 영수인 신고명령 등을 해당 법원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이를 수령해가라는 공시송달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시송달이란 상대방에게 통상의 방법으로 서류 송달이 되지 않는 경우, 당사자의 신청 또는 법원 직권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상대방에게 송달이 된 걸로 간주하는 송달 방식을 말합니다. 이번에 지정된 기간인 2개월, 즉 8월 4일부터는 압류 서류가 일본제철에 송달이 된 걸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법원이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건 우리나라와 일본이 모두 '민사 또는 상사의 재판상 및 재판외 문서의 해외 송달에 관한 협약', 이른바 '헤이그 송달조약'에 가입돼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외무성이 '블랙홀' 된 이유

재판서류를 우편처럼 그냥 보내버리면 대단히 간단하겠습니다만, 헤이그 조약은 재판 서류를 보내는 절차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재판 서류를 곧바로 상대방에게 송달하는 것이 아니라, 송달받을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의 '중앙당국'에 △해외송달요청서 △송달되는 문서를 각각 2부씩 보내야 합니다(제3조).

우리나라에서 일본 기업이 재판 당사자가 되는 경우 일본 본사에 소송 서류를 송달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요, 여기서 우리나라의 중앙당국은 대법원 법원행정처, 일본의 중앙당국은 일본 외무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각급 법원은 대법원 법원행정처를 거쳐 일본 외무성을 통해 일본 내 당사자에게 소송서류를 송달해야 하는 것이죠.

통상의 경우라면 송달이 되어야 하지만, 강제징용 재판 관련 소송서류는 유독 일본 외무성에만 가면 감감무소식입니다. 법조계에선 일본 외무성이 헤이그 조약 제13조를 근거로 송달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당 조항은 '송달요청서가 이 협약의 규정과 일치할 때, 피촉탁국은 이를 이행하는 것이 자국의 주권 또는 안보를 침해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 한하여서만 이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이 서류를 일본 기업에 송달할 경우 한국 내 국내 자산의 집행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하고, 자국 기업 보호를 이유로 해당 서류 송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같은 조 단서는 '중앙당국은 송달요청을 거부하는 경우 신청인에게 즉시 그 거부의 사유를 통지한다'로 되어 있어, 이러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반송하는 것은 협약 위반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 때문에 한 차례 반송한 이후, 다른 서류들은 반송도 송달도 하지 않은 채 외무성에서 갖고만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외교관이 서류 전달? 불가능

그렇다면 일본에서 저희 외교 공관 직원이 서류를 일본 기업에 직접 송달하는 것은 안 되느냐고요? 분명 유효한 방법입니다. 다만 이번 사건의 경우엔 그게 어렵습니다.

현행 '국제민사사법공조 등에 관한 예규(재일 2014-1)'는 외국에 대한 송달촉탁을 △헤이그 송달협약에 따른 송달촉탁 △양자조약에 따른 송달촉탁 △국제민사사법공조법에 따른 외국관할법원 송달촉탁과 영사 송달촉탁 등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취지를 요약하면, 한국 외교공관 직원이 직접 송달할 수 있는 경우는 송달받을 사람이 '대한민국 국적일 때'로 한정됩니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엔 송달받을 사람이 일본인이고, 즉 외국인입니다. 따라서 외교공관 직원을 통해 송달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어 예규는 송달받은 사람의 국적이 외국인인 경우 호주, 중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태국인이라면 양자조약에 따른 송달촉탁(홍콩, 마카오 제외)을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헤이그 송달협약에 가입한 경우엔 협약 따른 송달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합니다(미국은 헤이그 협약 가입국이지만 번역문을 첨부해 영사송달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헤이그 협약 체약국이기 때문에 협약을 통해 송달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협약을 통해 송달을 시도했음에도 상대 국가가 계속 송달을 하지 않아 언제까지고 집행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불합리하겠죠. 국내 법원은 이 때문에 공시송달 결정을 내린 겁니다.

피해자들이 90세 넘는 고령이란 점을 감안하면, 언제까지고 집행을 미룰 순 없단 게 이번 공시송달 결정의 배경이라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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