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고살지마] 모르는 여성집 침입후 성폭행이 무죄, “모르고 한 일”

입력 2020.06.05 (18:08) 수정 2020.06.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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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여자 집에 들어가 여자를 강제로 성폭행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재판에서 인정됩니다. 그런데 판사는 이 남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합니다. 성폭행 사실이 있었는데 말이죠. 여성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고, 성폭행인지 모르고 했다는 겁니다.

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난 판결 이야기입니다.

39세 남성 A씨는 한 여성의 원룸에 들어가 여성을 성폭행했고, 결국 경찰에 체포됩니다. A씨에 대한 혐의는 명백했습니다.

그런데 A씨 수사 과정에서 이 성폭행의 배경에 또 다른 남성 B씨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9세 B씨와 39세 A씨는 채팅 앱에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B씨는 자신을 35세 여성이라고 속였습니다. 두 사람이 채팅으로 교류하던 어느 날 B씨는 황당한 제안을 합니다. "성폭행을 한번 당해보고 싶은데,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덮쳐줄 수 있냐. 나를 성폭행하는 상황극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A씨가 관심을 보이자 그에게 원룸 주소를 알려주면서 자신이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얘기하죠.

B씨의 말에 속아 넘어간 A씨는 그녀(女), 아니 그(男)가 알려준 원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살고있는 여성은 이 두 사람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인인 줄 알고 문을 열어줬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이 여성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B씨는 A씨가 이 여성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일부 훔쳐봤다고도 합니다.

두 사람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성폭행에 대한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됐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판결이 나옵니다.

이 판결을 이해하려면 법률 공부가 필수입니다.

교사범이라는 게 있습니다.


즉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르게 마음먹게 하는 사람을 형법에서 교사범이라고 합니다.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사람을 꼬드기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죠.

누구를 때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저 사람을 때리라고 유도하면 그건 폭행의 교사범이 됩니다. 때린 사람은 정범, 그리고 때린 걸 교사한 사람은 교사범, 즉 공범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동일한 형으로 처벌받습니다.

이런 법 이론에 따라 검찰은 성폭행을 유도한 B씨에게는 주거침입과 강간 교사 혐의를, 그리고 이를 직접 실행한 A씨에게는 주거침입과 강간 혐의를 적용합니다. 검찰는 B씨에게는 징역 15년을, A씨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합니다. B씨의 죄질이 나쁘다고 봐 15년을 구형했지만, 이를 실행한 A씨에 대해서도 7년이라는 엄한 벌을 법원에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에서는 의외의 결과가 나옵니다.

당연히 유죄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직접 여성을 성폭행한 A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다시 형법 이론이 등장합니다.

법원은 B씨가 교사범이 아니라고 본 겁니다. 그럼 뭐냐고요?

교사범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사람을 꼬드겨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 꼬드긴 사람은 교사범으로 공범이 되고,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범이 됩니다. 범죄를 실행한 사람은 타인이 교사를 받기는 했지만, 분명히 자신의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간접정범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범죄를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이 범죄를 실행하는 사람을 마치 도구처럼 이용하는 것입니다. 범죄를 실행한 사람이 따로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의 행위는 죄가 되지 않거나 혹은 자기가 범죄를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한 경우에 이 사람을 뒤에서 배후 조종한 사람을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간접정범이 교사범과 구별되는 것은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우월한 의사를 통해 지배와 조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있지만 이 사람은 로봇에 불과하고 뒤에서 리모컨으로 조절한 사람이 진짜 범인이란 얘기죠.

유명한 사건 중에 몇 년 전에 발생한 에쓰오일 CEO(최고경영자)의 불법 정치자금 후원 사건이 있죠. 이 회사 CEO는 그 지역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을 돕기 위해 직원들에게 10만원씩 정치자금을 후원하게 합니다. 1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되니까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CEO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렇게 모아준 돈이 5500만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직원들 동원한 조직적인 후원금 몰아주기의 뒷배경에는 국회의원과 CEO의 물밑거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역에 제2공장 신설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자, 이 경우 직원들의 개별적인 기부행위는 죄가 없지만, 이 정유회사 CEO는 자신의 범죄, 즉 조직적인 후원금 몰아주기란 탈법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사정을 모르는 직원들을 도구처럼 이용한 것입니다. 이 사례에 대해 대법원은 이 CEO를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국회의원에게도 유죄가 인정됐습니다.

이번 강간사건에서 A 씨에게 무죄가 난 것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범죄 중에는 자기가 범죄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남의 부탁을 받고 일을 실행했다 범인으로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실조차 모르고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 죄를 저질렀다면 뒤에서 조정한 사람을 형법은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재판부는 이 범죄에 대해 A씨가 자신의 행위가 성폭행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증거를 종합해 볼 때 A씨는 역할극이라고 생각했고, 강간범 역할을 한다고만 생각한 만큼 유죄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반면 B씨에 대해서는 "피해자 집 호실과 거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관련 정보를 모두 A씨에게 전달했다며 간접정범으로 봤습니다. B씨에게는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13년의 중형이, A씨에게는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결국, 성폭행 피해는 발생했는데, 직접 성폭행을 저지른 가해자는 무죄인 이상한 구도가 된 셈입니다.

법원은 A씨가 거칠게 강압적으로 성폭행했지만, 피해자가 연기한다고 오해할 정도로 반항이 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제로 A씨는 피해자의 반항을 연기로 오해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A씨는 여자를 성폭행하면서 이걸 상황극으로만 알았을까요. 여자의 저항 등을 볼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저항하는 여성의 핸드폰까지 A씨가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연극의 일부였을까요.

검찰은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습니다. 진짜 A씨가 이런 사정을 몰랐는지에 대한 양측의 공방이 2심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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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고살지마] 모르는 여성집 침입후 성폭행이 무죄, “모르고 한 일”
    • 입력 2020-06-05 18:08:28
    • 수정2020-06-12 13:42:35
    속고살지마
혼자 있는 여자 집에 들어가 여자를 강제로 성폭행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재판에서 인정됩니다. 그런데 판사는 이 남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합니다. 성폭행 사실이 있었는데 말이죠. 여성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고, 성폭행인지 모르고 했다는 겁니다. 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난 판결 이야기입니다. 39세 남성 A씨는 한 여성의 원룸에 들어가 여성을 성폭행했고, 결국 경찰에 체포됩니다. A씨에 대한 혐의는 명백했습니다. 그런데 A씨 수사 과정에서 이 성폭행의 배경에 또 다른 남성 B씨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9세 B씨와 39세 A씨는 채팅 앱에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B씨는 자신을 35세 여성이라고 속였습니다. 두 사람이 채팅으로 교류하던 어느 날 B씨는 황당한 제안을 합니다. "성폭행을 한번 당해보고 싶은데,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덮쳐줄 수 있냐. 나를 성폭행하는 상황극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A씨가 관심을 보이자 그에게 원룸 주소를 알려주면서 자신이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얘기하죠. B씨의 말에 속아 넘어간 A씨는 그녀(女), 아니 그(男)가 알려준 원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살고있는 여성은 이 두 사람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인인 줄 알고 문을 열어줬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이 여성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B씨는 A씨가 이 여성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일부 훔쳐봤다고도 합니다. 두 사람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성폭행에 대한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됐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판결이 나옵니다. 이 판결을 이해하려면 법률 공부가 필수입니다. 교사범이라는 게 있습니다. 즉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르게 마음먹게 하는 사람을 형법에서 교사범이라고 합니다.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사람을 꼬드기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죠. 누구를 때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저 사람을 때리라고 유도하면 그건 폭행의 교사범이 됩니다. 때린 사람은 정범, 그리고 때린 걸 교사한 사람은 교사범, 즉 공범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동일한 형으로 처벌받습니다. 이런 법 이론에 따라 검찰은 성폭행을 유도한 B씨에게는 주거침입과 강간 교사 혐의를, 그리고 이를 직접 실행한 A씨에게는 주거침입과 강간 혐의를 적용합니다. 검찰는 B씨에게는 징역 15년을, A씨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합니다. B씨의 죄질이 나쁘다고 봐 15년을 구형했지만, 이를 실행한 A씨에 대해서도 7년이라는 엄한 벌을 법원에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에서는 의외의 결과가 나옵니다. 당연히 유죄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직접 여성을 성폭행한 A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다시 형법 이론이 등장합니다. 법원은 B씨가 교사범이 아니라고 본 겁니다. 그럼 뭐냐고요? 교사범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는 사람을 꼬드겨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 꼬드긴 사람은 교사범으로 공범이 되고,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범이 됩니다. 범죄를 실행한 사람은 타인이 교사를 받기는 했지만, 분명히 자신의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간접정범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범죄를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이 범죄를 실행하는 사람을 마치 도구처럼 이용하는 것입니다. 범죄를 실행한 사람이 따로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의 행위는 죄가 되지 않거나 혹은 자기가 범죄를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한 경우에 이 사람을 뒤에서 배후 조종한 사람을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간접정범이 교사범과 구별되는 것은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우월한 의사를 통해 지배와 조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있지만 이 사람은 로봇에 불과하고 뒤에서 리모컨으로 조절한 사람이 진짜 범인이란 얘기죠. 유명한 사건 중에 몇 년 전에 발생한 에쓰오일 CEO(최고경영자)의 불법 정치자금 후원 사건이 있죠. 이 회사 CEO는 그 지역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을 돕기 위해 직원들에게 10만원씩 정치자금을 후원하게 합니다. 1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되니까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CEO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렇게 모아준 돈이 5500만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직원들 동원한 조직적인 후원금 몰아주기의 뒷배경에는 국회의원과 CEO의 물밑거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역에 제2공장 신설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자, 이 경우 직원들의 개별적인 기부행위는 죄가 없지만, 이 정유회사 CEO는 자신의 범죄, 즉 조직적인 후원금 몰아주기란 탈법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사정을 모르는 직원들을 도구처럼 이용한 것입니다. 이 사례에 대해 대법원은 이 CEO를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국회의원에게도 유죄가 인정됐습니다. 이번 강간사건에서 A 씨에게 무죄가 난 것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범죄 중에는 자기가 범죄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남의 부탁을 받고 일을 실행했다 범인으로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실조차 모르고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 죄를 저질렀다면 뒤에서 조정한 사람을 형법은 간접정범으로 처벌합니다. 재판부는 이 범죄에 대해 A씨가 자신의 행위가 성폭행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증거를 종합해 볼 때 A씨는 역할극이라고 생각했고, 강간범 역할을 한다고만 생각한 만큼 유죄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반면 B씨에 대해서는 "피해자 집 호실과 거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관련 정보를 모두 A씨에게 전달했다며 간접정범으로 봤습니다. B씨에게는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13년의 중형이, A씨에게는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결국, 성폭행 피해는 발생했는데, 직접 성폭행을 저지른 가해자는 무죄인 이상한 구도가 된 셈입니다. 법원은 A씨가 거칠게 강압적으로 성폭행했지만, 피해자가 연기한다고 오해할 정도로 반항이 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제로 A씨는 피해자의 반항을 연기로 오해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A씨는 여자를 성폭행하면서 이걸 상황극으로만 알았을까요. 여자의 저항 등을 볼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저항하는 여성의 핸드폰까지 A씨가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연극의 일부였을까요. 검찰은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습니다. 진짜 A씨가 이런 사정을 몰랐는지에 대한 양측의 공방이 2심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속고살지마> 검색후 시청해주세요. 생생한 영상과 자세한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속고살지마 구독하러가기: https://bit.ly/2UGO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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