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발표 내용만 보도”…‘보도지침 폭로사건’ 원본 최초 공개

입력 2020.06.08 (15:4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 아래 시행된 '보도지침'.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각 언론사에 전달한 구체적인 보도 가이드라인입니다. 보도가 가능한 것에는 '가(可)', 보도를 하면 안 되는 사건에 대해선 '불가(不可)' 또는 '절대 불가'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과거 군사 정권은 단순히 보도 여부뿐 아니라 기사의 형식과 배치, 구성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런 과거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해선 이미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소개되며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던 '보도지침 폭로사건'의 원고 원본을 시민들에게 공개했습니다. 보도지침의 내용은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실물 그대로는 처음입니다.

'학생 자극 우려' 시위 보도 불가(不可)…찬양 기사도 주문

5공의 보도지침은 특히 집회와 관련해 엄격히 보도 내용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1985년 11월 1일 작성한 보도지침 내용을 보면, '서울대학교 학생 시위 기사는 비판적 시각으로 다룰 것'을 주문하고, '사회대 등 일부 학생 수업 거부 움직임' 등의 제목이나 기사 내용에 대해 학생을 자극할 수 있어 우려된다며 쓰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이어 11월 2일, '학생의날' 앞두고 전국 대학생들의 연합 집회가 예정되자, 보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반면, 학생의날 기념 '학생대축전'에 대해서는 보도하라고 전달합니다.


학생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11월 5일에는 '오늘 산발적인 학생시위 일일이 나열하지 말고, 묶어서 적당히 (크지 않게) 처리 바람'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미국의 정보자문기관인 프로스트 앤 설리반이 발표한 '한국 군부의 집권 가능성 20%'에 대해선 일체 보도하지 말라는 방침을 전달했습니다.

1986년 일어난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에 대해선 용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지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한 여대생을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이틀에 걸쳐 성고문을 자행하며 취조한 사건입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구체적인 내용이 항목별로 기재돼있다.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구체적인 내용이 항목별로 기재돼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을 보면,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 모욕 행위라고 할 것', '발표 외 취재 보도 내용은 불가'라는 세부 지침을 내렸습니다. 또, 피해자 측을 매도하기 위해 '혁명을 위해 성을 도구화'했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반면, 대통령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골적인 찬양 기사를 주문했습니다. 1986년 4월 19일 기록을 보면, '대통령 기자회견 중 스케치 기사에서 집무실에 목민심서가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는 식의 제목을 뽑을 것'이라고 지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주언 기자가 빼돌린 '보도지침'...'원본' 30년 만에 공개

이번에 공개된 보도지침 원본 584건은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보도 통제 목적으로 각 언론사에 전화로 전달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편집국에서 빼내온 것들입니다. 원본을 보면 빨간 펜으로 교정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김주언 기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1986년 9월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 권력과 원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폭로했습니다. 당시 폭로로 김주언 기자와 <말>의 김태홍 편집인과 신홍범 민언협 실행위원은 국가기밀누설죄, 이적표현물 소지죄 등을 적용받아 구속기소 됐습니다. 9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오늘 기증식에 참여한 김주언 전 기자는 당시 전달받은 보도지침을 떠올렸습니다. "물가 인상이란 말 대신 물가 현실화라는 용어를 쓰게 했다"며 "당시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진은 절대로 쓰지 말라는 지침들이 내려왔고, 그대로 방송이나 신문에 반영됐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김 기자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이후 월간지 <말> 임상택 전 상무가 지금까지 30년 넘게 보도지침 사료 원본을 보관해오다 이번에 민언련을 통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어떤 종류의 보도지침도 단호히 거부해야"

이틀 뒤인 오는 10일은 6.10 항쟁 제33주년입니다. 공개한 원본에 대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선 이사장은 "당시 보도지침 폭로는 정권의 신뢰도를 낮추고, 국민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비판이라는 기능을 다시 움직이게 해 뜨거웠던 6월(610항쟁)을 가능하게 한 초석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오늘(8일) 기증식에는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뿐 아니라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등 언론계 원로도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현재 언론인 후배에게도 당부를 남겼습니다.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은 "언론인 자신의 양심과 지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으로 어떤 압력도 있어선 안 된다"며 "사내보도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곳도 있는데 어떤 종류의 보도지침도 있어선 안 되고, 기자들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김주언 전 기자도 "지금 기레기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언론이 공정한 보도를 하지 못한다는 자괴심을 느낀다"며 "언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보도지침 원본을 기증하는 것을 계기로 언론인들이 좀 더 공정하고 사실 보도에 힘써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검찰 발표 내용만 보도”…‘보도지침 폭로사건’ 원본 최초 공개
    • 입력 2020-06-08 15:42:19
    취재K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 아래 시행된 '보도지침'.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각 언론사에 전달한 구체적인 보도 가이드라인입니다. 보도가 가능한 것에는 '가(可)', 보도를 하면 안 되는 사건에 대해선 '불가(不可)' 또는 '절대 불가'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과거 군사 정권은 단순히 보도 여부뿐 아니라 기사의 형식과 배치, 구성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런 과거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해선 이미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소개되며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던 '보도지침 폭로사건'의 원고 원본을 시민들에게 공개했습니다. 보도지침의 내용은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실물 그대로는 처음입니다.

'학생 자극 우려' 시위 보도 불가(不可)…찬양 기사도 주문

5공의 보도지침은 특히 집회와 관련해 엄격히 보도 내용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1985년 11월 1일 작성한 보도지침 내용을 보면, '서울대학교 학생 시위 기사는 비판적 시각으로 다룰 것'을 주문하고, '사회대 등 일부 학생 수업 거부 움직임' 등의 제목이나 기사 내용에 대해 학생을 자극할 수 있어 우려된다며 쓰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이어 11월 2일, '학생의날' 앞두고 전국 대학생들의 연합 집회가 예정되자, 보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반면, 학생의날 기념 '학생대축전'에 대해서는 보도하라고 전달합니다.


학생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11월 5일에는 '오늘 산발적인 학생시위 일일이 나열하지 말고, 묶어서 적당히 (크지 않게) 처리 바람'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미국의 정보자문기관인 프로스트 앤 설리반이 발표한 '한국 군부의 집권 가능성 20%'에 대해선 일체 보도하지 말라는 방침을 전달했습니다.

1986년 일어난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에 대해선 용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지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한 여대생을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이틀에 걸쳐 성고문을 자행하며 취조한 사건입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구체적인 내용이 항목별로 기재돼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을 보면,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 모욕 행위라고 할 것', '발표 외 취재 보도 내용은 불가'라는 세부 지침을 내렸습니다. 또, 피해자 측을 매도하기 위해 '혁명을 위해 성을 도구화'했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반면, 대통령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골적인 찬양 기사를 주문했습니다. 1986년 4월 19일 기록을 보면, '대통령 기자회견 중 스케치 기사에서 집무실에 목민심서가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는 식의 제목을 뽑을 것'이라고 지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주언 기자가 빼돌린 '보도지침'...'원본' 30년 만에 공개

이번에 공개된 보도지침 원본 584건은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보도 통제 목적으로 각 언론사에 전화로 전달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편집국에서 빼내온 것들입니다. 원본을 보면 빨간 펜으로 교정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김주언 기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1986년 9월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 권력과 원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폭로했습니다. 당시 폭로로 김주언 기자와 <말>의 김태홍 편집인과 신홍범 민언협 실행위원은 국가기밀누설죄, 이적표현물 소지죄 등을 적용받아 구속기소 됐습니다. 9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오늘 기증식에 참여한 김주언 전 기자는 당시 전달받은 보도지침을 떠올렸습니다. "물가 인상이란 말 대신 물가 현실화라는 용어를 쓰게 했다"며 "당시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진은 절대로 쓰지 말라는 지침들이 내려왔고, 그대로 방송이나 신문에 반영됐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김 기자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이후 월간지 <말> 임상택 전 상무가 지금까지 30년 넘게 보도지침 사료 원본을 보관해오다 이번에 민언련을 통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어떤 종류의 보도지침도 단호히 거부해야"

이틀 뒤인 오는 10일은 6.10 항쟁 제33주년입니다. 공개한 원본에 대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선 이사장은 "당시 보도지침 폭로는 정권의 신뢰도를 낮추고, 국민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비판이라는 기능을 다시 움직이게 해 뜨거웠던 6월(610항쟁)을 가능하게 한 초석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오늘(8일) 기증식에는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뿐 아니라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등 언론계 원로도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현재 언론인 후배에게도 당부를 남겼습니다.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은 "언론인 자신의 양심과 지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으로 어떤 압력도 있어선 안 된다"며 "사내보도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곳도 있는데 어떤 종류의 보도지침도 있어선 안 되고, 기자들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김주언 전 기자도 "지금 기레기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언론이 공정한 보도를 하지 못한다는 자괴심을 느낀다"며 "언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보도지침 원본을 기증하는 것을 계기로 언론인들이 좀 더 공정하고 사실 보도에 힘써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