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화려했던 6070 부산미술 역사는 ‘지금도 사라지는 중입니다’

입력 2020.06.11 (08:01) 수정 2020.06.1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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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 트럭 두어 개 정도로 들어냈거든요. 그만큼 작업이 많았습니다."

올해 81세가 된 김청정 작가는 부산에서 실험미술을 개척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작품을 두 번에 걸쳐 5t 트럭에 실어 버렸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평생 다 보관할 수 없으니, 버리는 것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작품 가치가 클 경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작품이 곧 도시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김원'과 '김홍석'이라는 부산의 보물

부산은 어떤 문화자산을 갖고 있었을까요? 부산에서는 한국 미술사에서 큰 획을 그을 만한 작가가 여러 명 배출됐습니다. 김청정 작가를 비롯해 1960, 70년대 부산 작가들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이 새롭지 못하다며, 물체의 입체감을 이용한 실험미술을 펼쳐 나갔습니다. 대표적인 부산의 작가 김원은 캔버스에 레코드판, 달걀, 담요, 화투 등을 붙여 파격적인 예술을 시도했습니다. 한가지 색으로만 표현하는 단색화의 대표적인 선구자로 꼽히는 김홍석 선생 역시도 부산의 작가로, 실로 캔버스를 깁고 뚫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더 많은 분이 돌아가시기 이전에 빨리 찾아야 합니다."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를 배출한 부산이지만, 부산 미술의 가치를 잘 아는 이는 드뭅니다. 저 역시 부산시립미술관의 <끝이 없는 시작 - 1960, 70 부산미술> 전시를 취재하며 알게 됐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학예관은 이번 전시 준비가 너무 힘들었다고 제게 털어놨습니다. 6.25 전쟁 이후의 미술사를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검토해 부산의 대표작가로 꼽을 만한 분을 34명으로 가려내 연락했지만 18명의 작가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작가들의 작품도 작가 개인 사정이 여의치 않아 상당수 유실되고 있는데, 돌아가신 작가의 작품은 유족이 보관하고 있지 않은 이상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성백주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단 한 점만이 전시돼 있습니다. 미술관 학예사들이 입을 모아 부산 미술의 역사를 하루빨리 기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2명이 5만 점의 자료 관리, 극한직업은 미술관에도 있다.'

부산 미술 역사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선 기록자들의 연구 환경도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부산시립미술관의 미술정보센터입니다. 정보센터에는 미술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라든가, 당시 전시가 열렸다는 신문기사, 미술 평론지 등 5만여 점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연구 목적에 알맞게 찾아 연구관에게 전달해 주는 작업이 자료 분석 요원의 역할인데, 2명이 전부입니다. 자료는 그냥 보관되지 않습니다. 햇빛과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자료 보관 전문 상자에 담겨 정리돼야 합니다. 5만 점의 자료를 2명이 전문 보존 처리하는 일도 벅찬데, 여기에다 자료 보관 시스템이 디지털화되지 않아서 연구관이 특정 자료를 요청할 경우 보존 처리 작업을 중단하고 필요한 자료를 손수 뒤져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서관 인터넷에서 책을 검색해 찾아 읽는 간단한 일이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인 겁니다.


'몇 년째 검토만…이제 16명 남았다'

1998년 개관한 부산시립미술관에 미술정보센터가 생긴 것은 2008년입니다. 없던 자료실이 생기고, 그곳에 자료가 쌓이고 1명이던 인력이 2명으로 늘어난 것은 미술관과 부산시가 일을 하고 있다는 근거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역을 넘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부산에 있다는 이유로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결국, 부산시와 미술관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2017년부터 미술관은 부산시에 예산과 인력 확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디지털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2~3억 원 정도의 예산을 검토 중이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뚜렷한 답변 없이 3년 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이, 부산의 작가는 떠나고 작품과 자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화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있어도 키우지 못하는 도시입니다."

부산 미술사가 지역 행정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부산 시민의 문화 향유권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지역에 충분한 문화자산이 있지만, 이를 누릴 기회가 시민들께 전달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산에 대단한 작가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시민사회에 공유되면, 시민들의 일상은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말에 카페나 바다 말고는 갈 데가 없다고 여기던 시민들이 미술관이라는 문화 공간으로 일상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 대한 자긍심이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도 봅니다. 부산시립미술관 기혜경 관장은 부산이 문화 불모지가 아니라, 자산이 있어도 키우지 못하는 도시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부산은 영화와 바다의 도시란 수식어를 넘어 '문화의 도시'란 명성도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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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화려했던 6070 부산미술 역사는 ‘지금도 사라지는 중입니다’
    • 입력 2020-06-11 08:01:04
    • 수정2020-06-11 08:01:12
    취재후·사건후
"5t 트럭 두어 개 정도로 들어냈거든요. 그만큼 작업이 많았습니다."

올해 81세가 된 김청정 작가는 부산에서 실험미술을 개척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작품을 두 번에 걸쳐 5t 트럭에 실어 버렸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평생 다 보관할 수 없으니, 버리는 것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작품 가치가 클 경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작품이 곧 도시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김원'과 '김홍석'이라는 부산의 보물

부산은 어떤 문화자산을 갖고 있었을까요? 부산에서는 한국 미술사에서 큰 획을 그을 만한 작가가 여러 명 배출됐습니다. 김청정 작가를 비롯해 1960, 70년대 부산 작가들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이 새롭지 못하다며, 물체의 입체감을 이용한 실험미술을 펼쳐 나갔습니다. 대표적인 부산의 작가 김원은 캔버스에 레코드판, 달걀, 담요, 화투 등을 붙여 파격적인 예술을 시도했습니다. 한가지 색으로만 표현하는 단색화의 대표적인 선구자로 꼽히는 김홍석 선생 역시도 부산의 작가로, 실로 캔버스를 깁고 뚫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더 많은 분이 돌아가시기 이전에 빨리 찾아야 합니다."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를 배출한 부산이지만, 부산 미술의 가치를 잘 아는 이는 드뭅니다. 저 역시 부산시립미술관의 <끝이 없는 시작 - 1960, 70 부산미술> 전시를 취재하며 알게 됐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학예관은 이번 전시 준비가 너무 힘들었다고 제게 털어놨습니다. 6.25 전쟁 이후의 미술사를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검토해 부산의 대표작가로 꼽을 만한 분을 34명으로 가려내 연락했지만 18명의 작가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작가들의 작품도 작가 개인 사정이 여의치 않아 상당수 유실되고 있는데, 돌아가신 작가의 작품은 유족이 보관하고 있지 않은 이상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성백주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단 한 점만이 전시돼 있습니다. 미술관 학예사들이 입을 모아 부산 미술의 역사를 하루빨리 기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2명이 5만 점의 자료 관리, 극한직업은 미술관에도 있다.'

부산 미술 역사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선 기록자들의 연구 환경도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부산시립미술관의 미술정보센터입니다. 정보센터에는 미술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라든가, 당시 전시가 열렸다는 신문기사, 미술 평론지 등 5만여 점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연구 목적에 알맞게 찾아 연구관에게 전달해 주는 작업이 자료 분석 요원의 역할인데, 2명이 전부입니다. 자료는 그냥 보관되지 않습니다. 햇빛과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자료 보관 전문 상자에 담겨 정리돼야 합니다. 5만 점의 자료를 2명이 전문 보존 처리하는 일도 벅찬데, 여기에다 자료 보관 시스템이 디지털화되지 않아서 연구관이 특정 자료를 요청할 경우 보존 처리 작업을 중단하고 필요한 자료를 손수 뒤져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서관 인터넷에서 책을 검색해 찾아 읽는 간단한 일이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인 겁니다.


'몇 년째 검토만…이제 16명 남았다'

1998년 개관한 부산시립미술관에 미술정보센터가 생긴 것은 2008년입니다. 없던 자료실이 생기고, 그곳에 자료가 쌓이고 1명이던 인력이 2명으로 늘어난 것은 미술관과 부산시가 일을 하고 있다는 근거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역을 넘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부산에 있다는 이유로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결국, 부산시와 미술관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2017년부터 미술관은 부산시에 예산과 인력 확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디지털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2~3억 원 정도의 예산을 검토 중이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뚜렷한 답변 없이 3년 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이, 부산의 작가는 떠나고 작품과 자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화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있어도 키우지 못하는 도시입니다."

부산 미술사가 지역 행정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부산 시민의 문화 향유권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지역에 충분한 문화자산이 있지만, 이를 누릴 기회가 시민들께 전달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산에 대단한 작가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시민사회에 공유되면, 시민들의 일상은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말에 카페나 바다 말고는 갈 데가 없다고 여기던 시민들이 미술관이라는 문화 공간으로 일상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 대한 자긍심이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도 봅니다. 부산시립미술관 기혜경 관장은 부산이 문화 불모지가 아니라, 자산이 있어도 키우지 못하는 도시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부산은 영화와 바다의 도시란 수식어를 넘어 '문화의 도시'란 명성도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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