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34년 수사에도 영구미제…스웨덴 최고 미스터리 ‘총리 암살 사건’

입력 2020.06.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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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86년 2월 28일 밤 스웨덴 현직 총리가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목격자도 있었고 이후 총탄과 총기도 발견됐지만, 암살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스웨덴 정부는 살인죄의 공소 시효까지 연장하며 사건을 규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웨덴 최고 미스터리 사건은 34년 만에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스웨덴 검찰, 용의자 특정했지만 이미 사망

스웨덴 검찰청이 현지시간 10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1986년 올로프 팔메 총리 살해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스틱 엥스트룀이란 남자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그가 2000년에 자살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그를 직접 조사할 수 없었고 사건을 종결한다고 말했다.

올로프 팔메 전 총리/스틱 엥스트룀, 사진: AFP/DPA올로프 팔메 전 총리/스틱 엥스트룀, 사진: AFP/DPA

엥스트룀은 보험사 스칸디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그의 사무실은 스톡홀름 스베아베겐으로, 팔메 전 총리가 암살 당한 장소 인근이었다. 암살 직후 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증인이 있었기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이 됐다. 하지만 그는 당시 사건을 직접 본 목격자라며 여러 차례 검찰에서 진술을 했는데, 총을 맞은 팔메 총리를 도우려 했다고 말했다. 엥스트룀은 TV에 출연해 당시 구조 시도에 대해 인터뷰도 했다.

2016년부터 사건을 재수사한 스웨덴 검찰은, 1986년 당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증거가 없어 풀려났던 엥스트룀을 다시 살해 용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이 여러 차례 바뀌고 다른 증인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만 밝혔을 뿐, 이번에도 살해의 결정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1986년 현직 총리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에서 암살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암살 사건은 스웨덴의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현직 총리가 수도 한복판 최대 번화가에서 숨졌지만, 사건의 진실을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6년 2월 28일 밤 올로프 팔메 총리는 부인 리스베트 팔메와 함께 스톡홀름 시내에서 영화를 보고 걸어서 귀가하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등에 총을 맞은 팔메 총리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고, 총리 부인 리스베트는 총알이 스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다. 총리 경호원은 퇴근한 상황이었다. 팔메 총리는 당시 59세였다. 사건 직후 용의자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있었고 총탄도 발견됐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암살 용의자로 지목됐다 석방된 크리스터 페테르손, 사진: AFP암살 용의자로 지목됐다 석방된 크리스터 페테르손, 사진: AFP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경찰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인 크리스터 페테르손(Christer Pettersson)이란 남자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1989년 페테르손은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페테르손 측은 항소했고, 최고법원은 뚜렷한 살해 동기가 없고, 암살에 사용한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페테르손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2006년엔 한 호수에서 낡은 권총 1자루가 발견됐다. 총탄 분석을 통해 팔메 총리 암살에 사용된 권총과 같은 종류의 총기로 확인됐지만,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실제 총리 암살에 쓰인 권총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총리 암살 사건은 이처럼 사건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채 2011년 종결될 위기에 처했다. 스웨덴의 살인사건 공소 시효 25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사안이 심각한 특정 범죄에 대해 공소 시효를 없애기로 법을 바꾸면서 수사를 이어갔다.

암살 이후 30년이 흐른 2016년, 스웨덴 정부는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하고 크리스터(Krister) 페테르손 검사를 수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현 검찰총장인 페테르손은 조직 범죄 수사로 이름을 알린 베테랑 검사여서 재수사에 대한 스웨덴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민주주의·복지 완성…'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팔메 전 총리 암살 30주년(2016년), 사진: EPA연합팔메 전 총리 암살 30주년(2016년), 사진: EPA연합

1927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올로프 팔메 전 총리는 1967~1976년, 1982~1986년 암살 당시까지 두 번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을 완성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미국의 사회적 부조리를 목격하고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1969년 총리직을 맡은 이후 보편적 복지와 고용보장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스웨덴의 중립 노선을 강화하며 미국과 옛 소련 등 강대국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이 때문에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살해 배후로 숱한 음모론 제기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오랫동안 암살범이 잡히지 않자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선 수많은 억측과 음모론이 제기됐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을 팔메 총리가 강력하게 비판하자 미국 CIA가 움직였다", "팔메 총리가 소련의 핵무기 보유를 문제 삼으니 소련이 KGB 요원을 보냈다", "팔메 총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강력 비난하자 남아공 당국이 정보기관을 파견했다", "팔메 총리의 부의 재분배 정책에 반감을 품은 스웨덴 대기업이 극우주의자들을 동원했다" 등의 출처 불명의 음모론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됐다.

공소 시효까지 연장했건만…끝내 영구 미제로

암살 현장에 새긴 동판암살 현장에 새긴 동판

34년 전 스웨덴 사회를 뒤흔든 현직 총리 암살 사건, 이후 34년간 스웨덴 국민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줬지만, 이제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수사 당국이 목격자를 포함해 1만 명 이상을 조사했고, 축적된 관련 조사 서류철이 250m에 이르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스웨덴 국민들은 당국의 수사 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사건 발생 2년 만에 유력한 용의자로 재판에 세웠던 사람은 증거 불충분으로 재심에서 석방됐다.

공소 시효를 연장하면서까지 수사를 계속했지만, 당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을 다시 특정하는 데 그쳤고, 그마저 당사자가 오래전에 사망해 직접 조사하지도 못했다.

암살범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건의 배후는 누구이고, 실체는 무엇인가? 스웨덴 국민들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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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34년 수사에도 영구미제…스웨덴 최고 미스터리 ‘총리 암살 사건’
    • 입력 2020-06-11 11:39:21
    특파원 리포트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86년 2월 28일 밤 스웨덴 현직 총리가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목격자도 있었고 이후 총탄과 총기도 발견됐지만, 암살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스웨덴 정부는 살인죄의 공소 시효까지 연장하며 사건을 규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웨덴 최고 미스터리 사건은 34년 만에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스웨덴 검찰, 용의자 특정했지만 이미 사망

스웨덴 검찰청이 현지시간 10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1986년 올로프 팔메 총리 살해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스틱 엥스트룀이란 남자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그가 2000년에 자살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그를 직접 조사할 수 없었고 사건을 종결한다고 말했다.

올로프 팔메 전 총리/스틱 엥스트룀, 사진: AFP/DPA
엥스트룀은 보험사 스칸디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그의 사무실은 스톡홀름 스베아베겐으로, 팔메 전 총리가 암살 당한 장소 인근이었다. 암살 직후 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증인이 있었기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이 됐다. 하지만 그는 당시 사건을 직접 본 목격자라며 여러 차례 검찰에서 진술을 했는데, 총을 맞은 팔메 총리를 도우려 했다고 말했다. 엥스트룀은 TV에 출연해 당시 구조 시도에 대해 인터뷰도 했다.

2016년부터 사건을 재수사한 스웨덴 검찰은, 1986년 당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증거가 없어 풀려났던 엥스트룀을 다시 살해 용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이 여러 차례 바뀌고 다른 증인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만 밝혔을 뿐, 이번에도 살해의 결정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1986년 현직 총리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에서 암살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암살 사건은 스웨덴의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현직 총리가 수도 한복판 최대 번화가에서 숨졌지만, 사건의 진실을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6년 2월 28일 밤 올로프 팔메 총리는 부인 리스베트 팔메와 함께 스톡홀름 시내에서 영화를 보고 걸어서 귀가하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등에 총을 맞은 팔메 총리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고, 총리 부인 리스베트는 총알이 스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다. 총리 경호원은 퇴근한 상황이었다. 팔메 총리는 당시 59세였다. 사건 직후 용의자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있었고 총탄도 발견됐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암살 용의자로 지목됐다 석방된 크리스터 페테르손, 사진: AFP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경찰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인 크리스터 페테르손(Christer Pettersson)이란 남자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1989년 페테르손은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페테르손 측은 항소했고, 최고법원은 뚜렷한 살해 동기가 없고, 암살에 사용한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페테르손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2006년엔 한 호수에서 낡은 권총 1자루가 발견됐다. 총탄 분석을 통해 팔메 총리 암살에 사용된 권총과 같은 종류의 총기로 확인됐지만,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실제 총리 암살에 쓰인 권총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총리 암살 사건은 이처럼 사건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채 2011년 종결될 위기에 처했다. 스웨덴의 살인사건 공소 시효 25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사안이 심각한 특정 범죄에 대해 공소 시효를 없애기로 법을 바꾸면서 수사를 이어갔다.

암살 이후 30년이 흐른 2016년, 스웨덴 정부는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하고 크리스터(Krister) 페테르손 검사를 수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현 검찰총장인 페테르손은 조직 범죄 수사로 이름을 알린 베테랑 검사여서 재수사에 대한 스웨덴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민주주의·복지 완성…'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팔메 전 총리 암살 30주년(2016년), 사진: EPA연합
1927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올로프 팔메 전 총리는 1967~1976년, 1982~1986년 암살 당시까지 두 번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을 완성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미국의 사회적 부조리를 목격하고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1969년 총리직을 맡은 이후 보편적 복지와 고용보장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스웨덴의 중립 노선을 강화하며 미국과 옛 소련 등 강대국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이 때문에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살해 배후로 숱한 음모론 제기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오랫동안 암살범이 잡히지 않자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선 수많은 억측과 음모론이 제기됐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을 팔메 총리가 강력하게 비판하자 미국 CIA가 움직였다", "팔메 총리가 소련의 핵무기 보유를 문제 삼으니 소련이 KGB 요원을 보냈다", "팔메 총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강력 비난하자 남아공 당국이 정보기관을 파견했다", "팔메 총리의 부의 재분배 정책에 반감을 품은 스웨덴 대기업이 극우주의자들을 동원했다" 등의 출처 불명의 음모론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됐다.

공소 시효까지 연장했건만…끝내 영구 미제로

암살 현장에 새긴 동판
34년 전 스웨덴 사회를 뒤흔든 현직 총리 암살 사건, 이후 34년간 스웨덴 국민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줬지만, 이제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수사 당국이 목격자를 포함해 1만 명 이상을 조사했고, 축적된 관련 조사 서류철이 250m에 이르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스웨덴 국민들은 당국의 수사 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사건 발생 2년 만에 유력한 용의자로 재판에 세웠던 사람은 증거 불충분으로 재심에서 석방됐다.

공소 시효를 연장하면서까지 수사를 계속했지만, 당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을 다시 특정하는 데 그쳤고, 그마저 당사자가 오래전에 사망해 직접 조사하지도 못했다.

암살범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건의 배후는 누구이고, 실체는 무엇인가? 스웨덴 국민들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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