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길…‘사라지기’ 택했지만 ‘전설’로 남다

입력 2020.06.1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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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 여기도 이 사람 얘기가 나오네'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원효 스님과 매월당 김시습, 세조, 그리고 최치원(857~?)이다. 통일신라 시대 사람인데 참 많이도 돌아다닌 것 같다. 곳곳에 그와 얽힌 장소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추억이 전설로 전해진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 (사진 출처: 고운사 누리집)고운사 (사진 출처: 고운사 누리집)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고운사 가운루고운사 가운루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해인사해인사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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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치원의 길…‘사라지기’ 택했지만 ‘전설’로 남다
    • 입력 2020-06-12 08:01:30
    취재K
지방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 여기도 이 사람 얘기가 나오네'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원효 스님과 매월당 김시습, 세조, 그리고 최치원(857~?)이다. 통일신라 시대 사람인데 참 많이도 돌아다닌 것 같다. 곳곳에 그와 얽힌 장소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추억이 전설로 전해진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 (사진 출처: 고운사 누리집)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고운사 가운루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해인사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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