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 여기도 이 사람 얘기가 나오네'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원효 스님과 매월당 김시습, 세조, 그리고 최치원(857~?)이다. 통일신라 시대 사람인데 참 많이도 돌아다닌 것 같다. 곳곳에 그와 얽힌 장소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추억이 전설로 전해진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 (사진 출처: 고운사 누리집)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고운사 가운루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해인사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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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길…‘사라지기’ 택했지만 ‘전설’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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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0-06-12 08:01:30
지방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 여기도 이 사람 얘기가 나오네'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원효 스님과 매월당 김시습, 세조, 그리고 최치원(857~?)이다. 통일신라 시대 사람인데 참 많이도 돌아다닌 것 같다. 곳곳에 그와 얽힌 장소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추억이 전설로 전해진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는데, 언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물던 그가 신라에 귀국한 것이 885년, 28세였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으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겠지만, 조국 신라의 현실은 암울했다. 진성여왕 시대에 최치원은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개혁 정책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6두품이었고, 골품제의 틀에 꽉 잡혀 있었던 신라라는 나라에서 6두품이 제시하는 개혁 정책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의 선택은 하나. '사라지기'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역사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상당함에도, 사망 시기는 물음표로 남았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가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공원은 경남 함양 중심가에 길고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자리 잡은 숲이다. 120여 종의 나무 2만 그루가 제대로, 옹골차게 자리 잡아 그 숲길을 따라 걸으면 여름에도 햇빛 한 자락 볼 수 없다.
상림은 흔히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 기다란 숲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는 것. 실제로 상림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기도 하다.
이 상림공원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그는 당시 이 고을의 태수였는데,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그것이 천 년 넘게 살아남아 상림공원이라는 유산으로 전해졌다.
상림을 조성한 뒤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를 나무에 걸어두었는데, 아직 그 금 호미를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둔 그 금 호미를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무들을 살펴보곤 한다.
상림공원에서 강원도 쪽으로 180㎞ 정도 이동하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마늘의 고장, 경북 의성에 속한다. 고운사는 조계종 16교구 본사이기도 한데, 본사는 그 아래에 숱한 말사를 거느리는 일종의 '수뇌부' 격의 사찰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규모가 큰 절이다.
681년에 건립된 고운사의 '고운(孤雲)'은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인데, '외로운 구름-고운'은 최치원의 자이기도 하다. '자(字)'라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는 제2의 이름이다. 최치원의 '자'로 절의 이름을 삼았으니 이곳도 최치원과 연관돼 있다는 뜻이고, 그것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운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가운루(駕雲樓)'이다. 절은 작은 시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데, 가운루는 시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나무 기둥 위에 누각을 세워 그 누각을 통해 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1,300년도 전에 최치원이란 사람의 상상력과 낭만적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보통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징검다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각을 만들어 그 누각이 절의 입구이자, 교각이자, 전망대가 되도록 건축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이다.
최치원의 '자'가 하나 더 있는데, '해운'도 그의 '자'이다. 해운, 해운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그 유명한 부산의 해수욕장이다. 알려졌기에는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그의 '자'를 따 지명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는 최치원의 또 다른 자인 '고운'을 따서, '고운바다길'이라는 관광 코스도 생긴 지 2년 정도 됐다.
함양과 의성과 부산을 지나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가 있는 곳 근처에 그가 머물렀다는 정자도 있고, 그가 걸었다는 길도 있다. 해인사 경내에도 곳곳에 그의 얘기가 묻혀 있다. 그는 끝내 이곳 어딘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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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희 기자 an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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