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지구의 허파’에서 산소 없어 숨지는 페루의 비극

입력 2020.06.15 (07:00) 수정 2020.06.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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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를 판매하는 업소마다 긴 줄이 생겼습니다. 텅빈 산소통에 산소를 채워가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산소 판매 업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미의 페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입니다.

산소통에 산소를 채우려면 7~8시간씩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한나절을 꼬박 기다려야 산소통 하나를 겨우 충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루 종일 줄을 서서 산소통을 채워 가려면 생업은 포기해야 합니다.

지난 3일 페루 칼라오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빈 산소통에 산소를 채우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AP=연합]지난 3일 페루 칼라오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빈 산소통에 산소를 채우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AP=연합]

페루 사람들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산소 구하기 전쟁을 벌이는 까닭은 코로나19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산소 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산소 치료가 필수적입니다. 제때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코로나19 환자의 15%는 산소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 산소 구하려 '장사진' 치는 이유는?

페루 리마의 한 가정에서 아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된 남편을 산소 호흡기 등을 이용해 간호하고 있다. [AP=연합]페루 리마의 한 가정에서 아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된 남편을 산소 호흡기 등을 이용해 간호하고 있다. [AP=연합]

페루인 상당수는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집 안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 가족에게 산소 치료를 해주기 위해 산소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페루 사람들은 코로나19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고 왜 집에서 돌보는 것일까요?

오랜 기간 의료시설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의료 환경이 열악한 페루는 인구 천 명 당 병상 수가 2개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마저도 코로나19 환자들이 넘쳐나면서 입원 치료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설령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더라도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병원 역시 산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페루 수도 리마의 한 병원에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입원시킨 한 여성은 "병원에 산소가 없으니까 밖에 나가서 산소를 직접 구해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AP통신에 전했습니다. 그러더니 한밤 중에 의사가 불러서 갔더니 "산소 탱크 하나를 120달러에 팔테니까 사겠느냐"고 흥정하듯이 물어왔다고 기가 막혀 했습니다. 페루의 의료시스템은 사실상 붕괴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페루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차라리 집 안에서 보살피면서 매일같이 '산소 찾아 삼만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 치솟는 산소 가격…암시장에서 웃돈 거래도

지난 11일 페루 리마에서 7시간 동안 기다린 뒤 산소통을 충전해온 한 남성이 산소통을 집으로 힘겹게 옮기고 있다. [AP=연합]지난 11일 페루 리마에서 7시간 동안 기다린 뒤 산소통을 충전해온 한 남성이 산소통을 집으로 힘겹게 옮기고 있다. [AP=연합]

페루 정부는 전국에서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하루에 필요한 산소량이 173톤이라고 추산하고 있지만 산소 생산량은 20%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산소 가격은 치솟고 있습니다.

350달러에 살 수 있었던 산소통 하나 가격이 지금은 1천470달러까지 뛰었습니다. 업자들은 가격이 폭등한 산소를 암시장을 통해 은밀하게 거래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고,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도 산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싼 가격에 산소통을 사더라도 고작 6~8시간이면 산소통 하나가 소진됩니다. 산소통을 다시 채우는 데도 50달러가 듭니다. 산소 치료를 24시간 끊기지 않고 받으려면 하루에 적어도 산소통 3개가 필요한 셈입니다. 페루의 1인당 GDP는 6천9백 달러 수준인데, 그에 비하면 산소 값은 부담하기에 너무나 큰 비용입니다.

페루는 세계 최대의 아마존강이 발원하는 나라입니다. 아마존강 유역은 무성한 삼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산소 덕분에 '지구의 허파'라고 불립니다. 그런 아마존강을 품고 있는 나라에서 국민들이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첫 대응 빨랐지만…결국 남미 두번째 최다 확진국

지난달 26일 페루 리마 변두리 지역에서 코로나19로 숨진 환자의 주검을 매장하기 위해 인부들이 관을 옮기고 있다. [AP=연합]지난달 26일 페루 리마 변두리 지역에서 코로나19로 숨진 환자의 주검을 매장하기 위해 인부들이 관을 옮기고 있다. [AP=연합]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페루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은 신속성 면에서는 나무랄 것이 없었습니다. 페루는 3월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봉쇄령과 함께 국경을 걸어잠갔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페루 국민들은 집 안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빈곤율이 높은 페루에서 일자리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집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를 보유한 페루 가정은 전체의 49%에 불과합니다. 음식을 각 가정에 비축할 수 없다보니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특히 페루 정부가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페루 정부는 은행을 통해 지원금을 나눠줬는데, 은행 계좌가 있는 페루 국민은 전체 인구의 38%에 불과합니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면 은행에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행에 몰려든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5월 말로 접어들면서 하루 5천 명을 넘은 신규 확진자는 지난 11일에는 6천 명에 육박했습니다. 병의 확산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것입니다. 결국 페루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21만 여 명으로, 전세계에서 8번째, 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번째로 많아졌습니다.

하루 사망자도 2백 명을 넘어서며 누적 사망자는 6천 명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 '타산지석' 삼지 못한 페루의 비극

지난달 27일 페루 리마의 공동묘지에서 한 남성이 코로나19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AP=연합]지난달 27일 페루 리마의 공동묘지에서 한 남성이 코로나19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AP=연합]

마르틴 비스카라 페루 대통령은 지난 5일에서야 산소를 전략 보건물자로 선포하고 산소 확보에 2천5백만 달러(약 3백억 원)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외국에서라도 산소를 사오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 정부의 대책은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환자 급증으로 인공호흡기 등 심각한 의료 물자 부족 사태에 직면해 발을 동동 구르던 3~4월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데, 페루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손을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페루에는 감염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페루의 의료시스템은 장기간의 투자 부족과 부실 관리, 부패 문제 등으로 극도로 열악한 실정이었습니다.

때문에 페루 정부가 두세 달만 일찍 산소와 같은 의료 물자를 넉넉히 확보했더라면 지금처럼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맞아 국민들이 산소가 없어 죽어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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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5 07:00:12
    • 수정2020-06-15 1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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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를 판매하는 업소마다 긴 줄이 생겼습니다. 텅빈 산소통에 산소를 채워가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산소 판매 업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미의 페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입니다.

산소통에 산소를 채우려면 7~8시간씩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한나절을 꼬박 기다려야 산소통 하나를 겨우 충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루 종일 줄을 서서 산소통을 채워 가려면 생업은 포기해야 합니다.

지난 3일 페루 칼라오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빈 산소통에 산소를 채우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AP=연합]
페루 사람들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산소 구하기 전쟁을 벌이는 까닭은 코로나19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산소 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산소 치료가 필수적입니다. 제때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코로나19 환자의 15%는 산소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 산소 구하려 '장사진' 치는 이유는?

페루 리마의 한 가정에서 아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된 남편을 산소 호흡기 등을 이용해 간호하고 있다. [AP=연합]
페루인 상당수는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집 안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 가족에게 산소 치료를 해주기 위해 산소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페루 사람들은 코로나19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고 왜 집에서 돌보는 것일까요?

오랜 기간 의료시설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의료 환경이 열악한 페루는 인구 천 명 당 병상 수가 2개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마저도 코로나19 환자들이 넘쳐나면서 입원 치료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설령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더라도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병원 역시 산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페루 수도 리마의 한 병원에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입원시킨 한 여성은 "병원에 산소가 없으니까 밖에 나가서 산소를 직접 구해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AP통신에 전했습니다. 그러더니 한밤 중에 의사가 불러서 갔더니 "산소 탱크 하나를 120달러에 팔테니까 사겠느냐"고 흥정하듯이 물어왔다고 기가 막혀 했습니다. 페루의 의료시스템은 사실상 붕괴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페루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걸린 가족을 차라리 집 안에서 보살피면서 매일같이 '산소 찾아 삼만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 치솟는 산소 가격…암시장에서 웃돈 거래도

지난 11일 페루 리마에서 7시간 동안 기다린 뒤 산소통을 충전해온 한 남성이 산소통을 집으로 힘겹게 옮기고 있다. [AP=연합]
페루 정부는 전국에서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하루에 필요한 산소량이 173톤이라고 추산하고 있지만 산소 생산량은 20%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산소 가격은 치솟고 있습니다.

350달러에 살 수 있었던 산소통 하나 가격이 지금은 1천470달러까지 뛰었습니다. 업자들은 가격이 폭등한 산소를 암시장을 통해 은밀하게 거래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고,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도 산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싼 가격에 산소통을 사더라도 고작 6~8시간이면 산소통 하나가 소진됩니다. 산소통을 다시 채우는 데도 50달러가 듭니다. 산소 치료를 24시간 끊기지 않고 받으려면 하루에 적어도 산소통 3개가 필요한 셈입니다. 페루의 1인당 GDP는 6천9백 달러 수준인데, 그에 비하면 산소 값은 부담하기에 너무나 큰 비용입니다.

페루는 세계 최대의 아마존강이 발원하는 나라입니다. 아마존강 유역은 무성한 삼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산소 덕분에 '지구의 허파'라고 불립니다. 그런 아마존강을 품고 있는 나라에서 국민들이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첫 대응 빨랐지만…결국 남미 두번째 최다 확진국

지난달 26일 페루 리마 변두리 지역에서 코로나19로 숨진 환자의 주검을 매장하기 위해 인부들이 관을 옮기고 있다. [AP=연합]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페루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은 신속성 면에서는 나무랄 것이 없었습니다. 페루는 3월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봉쇄령과 함께 국경을 걸어잠갔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페루 국민들은 집 안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빈곤율이 높은 페루에서 일자리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집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를 보유한 페루 가정은 전체의 49%에 불과합니다. 음식을 각 가정에 비축할 수 없다보니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특히 페루 정부가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페루 정부는 은행을 통해 지원금을 나눠줬는데, 은행 계좌가 있는 페루 국민은 전체 인구의 38%에 불과합니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면 은행에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행에 몰려든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5월 말로 접어들면서 하루 5천 명을 넘은 신규 확진자는 지난 11일에는 6천 명에 육박했습니다. 병의 확산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것입니다. 결국 페루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21만 여 명으로, 전세계에서 8번째, 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번째로 많아졌습니다.

하루 사망자도 2백 명을 넘어서며 누적 사망자는 6천 명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 '타산지석' 삼지 못한 페루의 비극

지난달 27일 페루 리마의 공동묘지에서 한 남성이 코로나19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AP=연합]
마르틴 비스카라 페루 대통령은 지난 5일에서야 산소를 전략 보건물자로 선포하고 산소 확보에 2천5백만 달러(약 3백억 원)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외국에서라도 산소를 사오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 정부의 대책은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환자 급증으로 인공호흡기 등 심각한 의료 물자 부족 사태에 직면해 발을 동동 구르던 3~4월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데, 페루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손을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페루에는 감염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페루의 의료시스템은 장기간의 투자 부족과 부실 관리, 부패 문제 등으로 극도로 열악한 실정이었습니다.

때문에 페루 정부가 두세 달만 일찍 산소와 같은 의료 물자를 넉넉히 확보했더라면 지금처럼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맞아 국민들이 산소가 없어 죽어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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