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장편소설 낸 김훈 “문명과 야만의 뒤엉킴을 그리고 싶었다”

입력 2020.06.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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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작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시대와 호흡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온 작가. 결벽에 가까운 그의 문장론은 다음과 같은 짧은 문구에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죠.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 새 장편소설 집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뜻하지 않은 병고를 겪었다는 김훈 작가가 오랜만에 작가로서 기자간담회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사말은 예상대로(?) 이런 자리의 불편함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죠.

"책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면 그걸로 끝을 내야 하는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글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쑥스럽고 어색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속세의 일이란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고 해서 나오게 됐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과 같은 역사 소설로 흔히 기억되는 김훈 작가의 새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 2020)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작품입니다. 출판사는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굳이 장르를 밝힌다면, 이 소설은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선사 시대의 어느 지점으로 보입니다.


유목 생활을 위주로 하는 초(草)라는 나라와 농경 정착 생활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단(旦)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가기 전에 작가는 앞머리에 두 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멍석'을 까는데요. 물론 우리 역사에도 없고,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가공의 역사일 뿐이죠. 그래서 작가는 초와 단, 두 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것일까.

"후기에도 썼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 집단들 사이의 존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 이 적개심의 뿌리에 대한 무서움, 이 세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그 야만적 폭력, 그 양 폭력이 부딪쳐서 서로 무(無)가 되는 그런 모습들을 그리려고 했죠. 그런 야만의 과정에서 문화라든지 문명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인간의 운명을 그릴 뿐이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작가는 이런 예를 들더군요.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100년을 꼬박 싸운다고. 거의 매달,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고. 『삼국사기』를 보면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떠내려갔다고, 김부식이 썼다고. 한국의 고대는 불교와 부처님의 자비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면서도 핏물에 방패가 떠내려가도록 싸웠다. 왜? 그 적개심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작가를 역사 너머의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 적개심의 뿌리는 도대체 뭔지를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아마 지역이나 혈연에 의한 공동체 의식일 텐데 그렇게 피가 뿌려서 방패가 떠내려가도록 싸울 수 있는지, 그런 뿌리가 무엇인지. 역사를 가지고는 여기서 설명을 못 합니다. 그 야만의 과정에서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비롯되고 하는 그런 세계의 모습을 그렸고, 거기에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끝없이 짓밟혀 가면서도 거기에 저항하고 또 짓밟히고 또 도망치고 다시 잡혀 오고 짓밟히는 그런 저항하는 생명의 모습, 그런 것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소설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나옵니다. 동시에 말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죠. 작가는 아예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과 말을 책 앞머리에 소개해놓기까지 했습니다. 왜 말에게 이토록 큰 자리를 주었을까. 나중에 책을 읽게 될 독자들도 작가의 의도가 무척 궁금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10여 년 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을 여행하다가 거기서 야생마들을 봤어요. 저녁 무렵이었는데 말 수백 마리가 각각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죠. 조용하게. 내가 저 말에 대해서 뭔가를 써야겠구나, 강한 충동을 받았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말에 관한 자료들을 읽었고, 한국마사회 도서관에 있는 여러 책들을 읽었습니다. 말의 습성, 말의 역사, 말이 인간에 의해 사육된 과정, 인간의 문명과 야만을 말이 감당해나가는 모습들… 말들이 거기에 저항하고, 도망치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향해서 나가는 그것은 역사에 없는 것이고, 내 마음속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쓰려고 했던 것이죠."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 '야만'이라는 말에 담긴 탓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야만이 뭐냐는 질문에 작가는 "약육강식을 제도화하고 심화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스스로 청산하기 어렵다"고도 말했죠. "약자가 살기 위해 내 고기를 강자의 먹이로 내주어야 한다면, 그래야 살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 아닌가."라고 작가는 반문했습니다.

작가는 지금도 스마트폰 대신 구식 폴더폰을 쓰고, 집필할 때는 철저하게 펜을 고집합니다. 자기 글에 대해선 무서울 정도로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 있죠. 그러면서 스스로 유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초(草)와 단(旦) 둘 가운데 유목을 근간으로 하는 초의 손을 들어준 셈이죠. 작가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는 일에서 얻은 즐거움이 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내가 쓰는 언어가 정보 전달이나 서사의 전개뿐 아니라 화가가 물감을 쓰듯이, 음악가가 음을 쓰듯이, 그렇게 한번 언어를 전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화가의 물감이, 음악가의 음처럼, 거기에서 언어의 정보적 기능과 서사 전달의 기능을 합쳐서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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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장편소설 낸 김훈 “문명과 야만의 뒤엉킴을 그리고 싶었다”
    • 입력 2020-06-17 08:00:41
    취재K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작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시대와 호흡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온 작가. 결벽에 가까운 그의 문장론은 다음과 같은 짧은 문구에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죠.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 새 장편소설 집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뜻하지 않은 병고를 겪었다는 김훈 작가가 오랜만에 작가로서 기자간담회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사말은 예상대로(?) 이런 자리의 불편함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죠.

"책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면 그걸로 끝을 내야 하는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글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쑥스럽고 어색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속세의 일이란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고 해서 나오게 됐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과 같은 역사 소설로 흔히 기억되는 김훈 작가의 새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 2020)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작품입니다. 출판사는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굳이 장르를 밝힌다면, 이 소설은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선사 시대의 어느 지점으로 보입니다.


유목 생활을 위주로 하는 초(草)라는 나라와 농경 정착 생활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단(旦)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가기 전에 작가는 앞머리에 두 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멍석'을 까는데요. 물론 우리 역사에도 없고,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가공의 역사일 뿐이죠. 그래서 작가는 초와 단, 두 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것일까.

"후기에도 썼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 집단들 사이의 존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 이 적개심의 뿌리에 대한 무서움, 이 세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그 야만적 폭력, 그 양 폭력이 부딪쳐서 서로 무(無)가 되는 그런 모습들을 그리려고 했죠. 그런 야만의 과정에서 문화라든지 문명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인간의 운명을 그릴 뿐이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작가는 이런 예를 들더군요.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100년을 꼬박 싸운다고. 거의 매달,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고. 『삼국사기』를 보면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떠내려갔다고, 김부식이 썼다고. 한국의 고대는 불교와 부처님의 자비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면서도 핏물에 방패가 떠내려가도록 싸웠다. 왜? 그 적개심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작가를 역사 너머의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 적개심의 뿌리는 도대체 뭔지를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아마 지역이나 혈연에 의한 공동체 의식일 텐데 그렇게 피가 뿌려서 방패가 떠내려가도록 싸울 수 있는지, 그런 뿌리가 무엇인지. 역사를 가지고는 여기서 설명을 못 합니다. 그 야만의 과정에서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비롯되고 하는 그런 세계의 모습을 그렸고, 거기에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끝없이 짓밟혀 가면서도 거기에 저항하고 또 짓밟히고 또 도망치고 다시 잡혀 오고 짓밟히는 그런 저항하는 생명의 모습, 그런 것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소설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나옵니다. 동시에 말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죠. 작가는 아예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과 말을 책 앞머리에 소개해놓기까지 했습니다. 왜 말에게 이토록 큰 자리를 주었을까. 나중에 책을 읽게 될 독자들도 작가의 의도가 무척 궁금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10여 년 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을 여행하다가 거기서 야생마들을 봤어요. 저녁 무렵이었는데 말 수백 마리가 각각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죠. 조용하게. 내가 저 말에 대해서 뭔가를 써야겠구나, 강한 충동을 받았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말에 관한 자료들을 읽었고, 한국마사회 도서관에 있는 여러 책들을 읽었습니다. 말의 습성, 말의 역사, 말이 인간에 의해 사육된 과정, 인간의 문명과 야만을 말이 감당해나가는 모습들… 말들이 거기에 저항하고, 도망치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향해서 나가는 그것은 역사에 없는 것이고, 내 마음속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쓰려고 했던 것이죠."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 '야만'이라는 말에 담긴 탓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야만이 뭐냐는 질문에 작가는 "약육강식을 제도화하고 심화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스스로 청산하기 어렵다"고도 말했죠. "약자가 살기 위해 내 고기를 강자의 먹이로 내주어야 한다면, 그래야 살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 아닌가."라고 작가는 반문했습니다.

작가는 지금도 스마트폰 대신 구식 폴더폰을 쓰고, 집필할 때는 철저하게 펜을 고집합니다. 자기 글에 대해선 무서울 정도로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 있죠. 그러면서 스스로 유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초(草)와 단(旦) 둘 가운데 유목을 근간으로 하는 초의 손을 들어준 셈이죠. 작가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는 일에서 얻은 즐거움이 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내가 쓰는 언어가 정보 전달이나 서사의 전개뿐 아니라 화가가 물감을 쓰듯이, 음악가가 음을 쓰듯이, 그렇게 한번 언어를 전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화가의 물감이, 음악가의 음처럼, 거기에서 언어의 정보적 기능과 서사 전달의 기능을 합쳐서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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