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후손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20.06.1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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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사람 주도(周鍍)가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합니다. 그를 주왕(周王)이라 부릅니다. 당나라 군대에 대패한 주왕은 신라로 도망왔고, 기암과 동굴이 많은 신라의 한 산에 숨어들었습니다. 그 후 이 산은 주왕산이라 불립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청송군에 속합니다.

포항에서 넘어갔더니 굽이굽이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 뺨치는 좁고 험한 영(嶺)을 넘느라 한 시간을 꼬박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허리 디스크가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날 정도로 요동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의 끝에, 주왕의 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바람 부는 언덕에, 그곳이 있었습니다.

주왕산(왼쪽)과 항일의병 기념공원(오른쪽)주왕산(왼쪽)과 항일의병 기념공원(오른쪽)

구한말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드러낼 때, 우리 민족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정식 군대가 아닌 민간인이 주축이 돼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런 분들을 '의병'이라고 부릅니다. 명성황후 시해 직후, 그리고 을사늑약 직후 의병은 두 차례에 걸쳐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흔히 낫이나 죽창 등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들고 의분에 넘쳐 일제와 싸운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 의병 조직은 상당히 짜임새가 있었습니다. 의병장이 있었고, 모집을 담당하는 지역 유지도 있었고,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먹여 살릴 식량을 조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 의진(義陳)을 형성했고, 일제에 조직적으로 대항했습니다.

시사기획 창 〈의병장의 나라〉 중에서시사기획 창 〈의병장의 나라〉 중에서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기'가 문제였죠. 당시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라고 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쏘게 돼 있는 구식 총기였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불을 붙일 수 없었고, 유효 사거리가 20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총은 유효 사거리가 200m였지요. 사거리가 20m 밖에 안 되는 화승총으로 일본군의 조총을 상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 일본군 3명만 있으면 의병 300명을 죽일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는 무기로 싸웠으니, 일방적이어도 너무 일방적인 싸움을 벌였던 겁니다.

항일의병기념공원항일의병기념공원

그 의병을 기념하는 공간이 주왕산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항일의병기념공원입니다. 1896년 청송 지역에서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라는 직함으로 의병을 이끈 서효원(徐孝源, 1839~1897)의 후손인 서점 씨가 주축이 돼 조성한 것입니다. 청송 지역 의병 활동을 기록한 <적원일기(赤猿日記)>가 발견되면서, 청송 지역 의병 후손들이 유족회를 결성하고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합니다.

국비 등 63억 원을 지원받아 이곳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2012년 완공됩니다. 서효원 의병장은 1996년 건국 포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1996년이면 해방이 되고 50년이 지나서인데요, 이것도 현손인 서점 씨가 당시 대구에 보관돼 있던 <적원일기>를 찾아서 조상의 공적을 정부에 직접 증명하고 난 연후에야 가능했다고 합니다.

적원일기적원일기

의병의 경우 활동한 지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투 중 순국해도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판결문과 문집, 의병일기, 폭도(일제는 의병을 폭도라 지칭했습니다)에 관한 일제의 기록 등이 있어야 심사가 가능하니, 후손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료를 찾는지에 따라 서훈을 받는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셈입니다.

많은 의병이 후손 없이 사망하거나 후손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명을 많이 썼는데, 가명을 쓴 사람들은 의병 활동을 증명할 수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1913년 일제가 펴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는 의병 규모를 만 8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의병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사례는 2019년 3월 기준 2,638명에 불과합니다.

의병과 의병장은 한 사람 한 사람 사연이 구만리이지만, 강원도 고성에서 활동한 의병장 권형원(權亨源, 1854~1907)의 사연은 가히 '충격' 그 자체입니다. 권형원 의병장의 후손인 권순제 전 성균관대 교수. 그는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일본에 간다고 합니다. 아예 일본어를 배워,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어에 능숙해졌습니다. 왜일까요? 1907년 일제는 권형원 의병장의 시신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박민영 박사는 2016년 <한말 고성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단두 부전 수난>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합니다.

"권형원은 고성 전투 후 남강 송림에서 피살 순국한 것으로 인정되고, 또 그를 학살한 일본군이 시신에서 두부를 잘라내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만행을 저질렀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일본군에 의해 권형원의 두골이 일본으로 강제 반출되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강릉 관동의원 원장이 사립 이와테의학전문학교 재학 때 수학여행에서 모 신사에 전시된 권형원의 두골을 직접 보았다고 밝혀 놓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권순제 교수는 또 일본에 갈 예정입니다. 조상의 두개골을 찾는 일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 잊힌 이름들을 찾아내고, 기록을 바로잡고, 공훈을 증명하고, 순절의 정신을 기리는 이런 일들이 직계 후손들의 몫으로만 남아선 안 되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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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후손으로 산다는 것
    • 입력 2020-06-19 08:01:44
    취재K
당나라 사람 주도(周鍍)가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합니다. 그를 주왕(周王)이라 부릅니다. 당나라 군대에 대패한 주왕은 신라로 도망왔고, 기암과 동굴이 많은 신라의 한 산에 숨어들었습니다. 그 후 이 산은 주왕산이라 불립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청송군에 속합니다.

포항에서 넘어갔더니 굽이굽이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 뺨치는 좁고 험한 영(嶺)을 넘느라 한 시간을 꼬박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허리 디스크가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날 정도로 요동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의 끝에, 주왕의 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바람 부는 언덕에, 그곳이 있었습니다.

주왕산(왼쪽)과 항일의병 기념공원(오른쪽)
구한말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드러낼 때, 우리 민족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정식 군대가 아닌 민간인이 주축이 돼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런 분들을 '의병'이라고 부릅니다. 명성황후 시해 직후, 그리고 을사늑약 직후 의병은 두 차례에 걸쳐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흔히 낫이나 죽창 등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들고 의분에 넘쳐 일제와 싸운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 의병 조직은 상당히 짜임새가 있었습니다. 의병장이 있었고, 모집을 담당하는 지역 유지도 있었고,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먹여 살릴 식량을 조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 의진(義陳)을 형성했고, 일제에 조직적으로 대항했습니다.

시사기획 창 〈의병장의 나라〉 중에서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기'가 문제였죠. 당시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라고 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쏘게 돼 있는 구식 총기였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불을 붙일 수 없었고, 유효 사거리가 20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총은 유효 사거리가 200m였지요. 사거리가 20m 밖에 안 되는 화승총으로 일본군의 조총을 상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 일본군 3명만 있으면 의병 300명을 죽일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는 무기로 싸웠으니, 일방적이어도 너무 일방적인 싸움을 벌였던 겁니다.

항일의병기념공원
그 의병을 기념하는 공간이 주왕산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항일의병기념공원입니다. 1896년 청송 지역에서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라는 직함으로 의병을 이끈 서효원(徐孝源, 1839~1897)의 후손인 서점 씨가 주축이 돼 조성한 것입니다. 청송 지역 의병 활동을 기록한 <적원일기(赤猿日記)>가 발견되면서, 청송 지역 의병 후손들이 유족회를 결성하고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합니다.

국비 등 63억 원을 지원받아 이곳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2012년 완공됩니다. 서효원 의병장은 1996년 건국 포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1996년이면 해방이 되고 50년이 지나서인데요, 이것도 현손인 서점 씨가 당시 대구에 보관돼 있던 <적원일기>를 찾아서 조상의 공적을 정부에 직접 증명하고 난 연후에야 가능했다고 합니다.

적원일기
의병의 경우 활동한 지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투 중 순국해도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판결문과 문집, 의병일기, 폭도(일제는 의병을 폭도라 지칭했습니다)에 관한 일제의 기록 등이 있어야 심사가 가능하니, 후손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료를 찾는지에 따라 서훈을 받는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셈입니다.

많은 의병이 후손 없이 사망하거나 후손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명을 많이 썼는데, 가명을 쓴 사람들은 의병 활동을 증명할 수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1913년 일제가 펴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는 의병 규모를 만 8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의병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사례는 2019년 3월 기준 2,638명에 불과합니다.

의병과 의병장은 한 사람 한 사람 사연이 구만리이지만, 강원도 고성에서 활동한 의병장 권형원(權亨源, 1854~1907)의 사연은 가히 '충격' 그 자체입니다. 권형원 의병장의 후손인 권순제 전 성균관대 교수. 그는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일본에 간다고 합니다. 아예 일본어를 배워,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어에 능숙해졌습니다. 왜일까요? 1907년 일제는 권형원 의병장의 시신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박민영 박사는 2016년 <한말 고성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단두 부전 수난>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합니다.

"권형원은 고성 전투 후 남강 송림에서 피살 순국한 것으로 인정되고, 또 그를 학살한 일본군이 시신에서 두부를 잘라내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만행을 저질렀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일본군에 의해 권형원의 두골이 일본으로 강제 반출되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강릉 관동의원 원장이 사립 이와테의학전문학교 재학 때 수학여행에서 모 신사에 전시된 권형원의 두골을 직접 보았다고 밝혀 놓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권순제 교수는 또 일본에 갈 예정입니다. 조상의 두개골을 찾는 일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 잊힌 이름들을 찾아내고, 기록을 바로잡고, 공훈을 증명하고, 순절의 정신을 기리는 이런 일들이 직계 후손들의 몫으로만 남아선 안 되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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