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수호자’가 들려주는 독서의 ‘쓸모’

입력 2020.06.2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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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김동식의 첫 소설집에 실린 첫 단편소설의 첫 문장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회색인간>의 첫 문장은 '문화의 쓸모'를 언급하죠. 땅속 세상, 즉 지저(地底) 세계에 납치된 지상(地上)의 인간들은 땅 파는 노동을 강제당합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추락한' 인간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희망이라곤 안 보이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느 날, 누군가,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에게 돌을 던지듯,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 여인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죠. 제 배를 채우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빵을 누군가가 노래하는 여인에게 준 겁니다. 노인은 화가에게, 중년 여인은 소설가에게 빵을 줍니다. 기적이 또 다른 기적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 갑니다. 문화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이 짧은 소설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 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글쓰기를 배운 적 없는 주물공장 노동자라는 특별한, 아니 특별할 것 없는 이력을 가진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생애 첫 책의 맨 앞자리에 두었을까. 낮에는 성수동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소설을 쓴, 말하자면 '주경야독'하는 작가에게 밥보다 중한 것은 글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인상적인 이야기에 매료된 교사들이 학교 독서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읽힌 까닭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읽어야 알 수 있고, 읽어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시대에 책이 처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지하철입니다. 백이면 백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신문 읽는 사람은 아예 자취를 감춘 지 오래. 그나마 책 읽는 사람은 간혹 보이긴 합니다. 독서 문화를 위축시키는 최대의 적은 명실공히 '스마트폰'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 놀라운 전자장치의 등장으로 적어도 지하철이란 공간에서 책은 '추방'됐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이미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는 '읽기'를 '고향집'이라 부릅니다. 똑같이 먹고, 싸고, 자는 동물들의 세계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능력, 그것은 '읽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문해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이게 뭘까요. 언뜻 봐선 아기 신발을 판다는 광고 문구 같습니다. 사용한 적 없다는 건 새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강조한 표현이죠. 아마도 아기에게 신기려고 샀거나 선물을 받은 어느 엄마가 아이가 훌쩍 커버리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고, 그냥 누구 줘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맘 카페에 팔려고 올린 글의 제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로 그 유명한 작가입니다. 어라,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달리 해석해야 하겠군요. 헤밍웨이가 아기 신발을 팔아보려고 쓴 게 아니라면, 이 짧은 한 줄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소설입니다. 여섯 단어로 된 초단편소설. 자, 이제 상상력의 회로를 분주하게 돌려봅니다.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가 그려지시나요?

이렇게 생각해 보죠. 혹시 저 신발을 내놓은 엄마는 사실 엄마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어렵사리 생긴 아이를 유산하고 말죠. 아기가 태어나면 꼭 신겨봐야지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샀을 저 신발은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여인의 슬픔, 아픔을 떠올리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헤밍웨이라도 고작 여섯 단어로 소설을 쓸 수 있겠어? 하고 내기를 걸었던 친구들도 '역시 헤밍웨이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한 줄짜리 소설. 저자는 헤밍웨이의 초단편 소설을 통해 생각하고 환기하는 '깊이 읽기'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독서가 '공감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E. M. 포스터는 읽는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한 감정을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 했고,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연극 <섀도우 랜드>에서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읽습니다.'란 대사가 나온다고 하죠. 읽기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길'이란 겁니다. 읽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자는 말합니다.

평생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은 지식의 저수지에 더해져서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아홉 통의 편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저자는 '디지털 기기를 통한 읽기'의 한계와 부작용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맥락을 보지 못하는 단편적인 읽기가 습관이 된 이들이 '가짜 뉴스'에 얼마나 취약한지는 한때 '팩트체크'가 유행처럼 번진 현상으로도 분명히 확인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등장했을까요. "아이패드는 새로운 고무 젖꼭지가 되었습니다."

정보는 너무나 많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죠. 정보와 인간의 관계는 역전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필요에 의해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게 아니라, 정보가 사람을 표적 삼아 찾아 나서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점점 더 알기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스스로 사실을, 진실을 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런 취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것이 바로 가짜 뉴스인 겁니다.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종이책을 읽은 학생의 '문맥 이해력'이 전자책을 읽은 학생보다 더 뛰어납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구체적인 과학적 근거를 최대한 상세하게 소개해 놓았습니다. 막연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왜 읽어야 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지극히 사려 깊은 말로 친절하게, 그러면서 간절하게 설명합니다.

"책은 집이다. 당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실재하는 물리적 사물이다." - 마이클 더다(문학평론가)

1년에 100권이 넘는 책을 읽어오고 있는 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종이책 읽기를 권합니다. 새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그 신비로운 촉감, 갓 인쇄된 종이가 풍기는 특유의 향기, 잘 만들어진 표지의 디자인과 색감이 주는 시각적 만족감…. 종이책을 읽는 행위는 시각, 촉각, 후각을 모두 가동시키는 '공감각적 행위'라고 말이죠.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책은 외형마저 '스마트폰'에 맞서 변하고 있습니다. 책의 크기는 (핸드백에 들어갈 만큼) 점점 작아집니다.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 수는 점점 줄고, 반대로 글자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죠. 장편소설 분량도 점점 줄어서 요즘은 중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장편도 꽤 많습니다. 책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이 책도 디지털이라는 대세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읽기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저자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쓴 이 편지들을 더 많은 이가 읽고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이가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부모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기억력이 나빠지고, 갈수록 주의력도 떨어지고, 하루하루 사는 일이 내 것 같지 않아 걱정하는 분들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가 책을 읽는 이유가 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뒤로한 채 저의 상상 너머, 저의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읽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Reader, Come Home'. 독자여, 집으로 돌아오라. 우리말 제목을 <다시, 책으로>라 붙인 까닭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지만, 원래 제목에 담긴 저 간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죠. 그런 절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읽기입니다. 이 책은 '읽기의 수호자'가 '읽기'에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입니다.

저자가 첫 번째 편지에 소개한,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카나리아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카나리아는 탄광 갱도 안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에 민감해서,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가기 전에 카나리아를 보내 유독 가스가 나오는지 확인했다고 하죠. 예술가도 바로 그런 카나리아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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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기의 수호자’가 들려주는 독서의 ‘쓸모’
    • 입력 2020-06-22 07:03:07
    취재K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김동식의 첫 소설집에 실린 첫 단편소설의 첫 문장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회색인간>의 첫 문장은 '문화의 쓸모'를 언급하죠. 땅속 세상, 즉 지저(地底) 세계에 납치된 지상(地上)의 인간들은 땅 파는 노동을 강제당합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추락한' 인간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희망이라곤 안 보이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느 날, 누군가,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에게 돌을 던지듯,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 여인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죠. 제 배를 채우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빵을 누군가가 노래하는 여인에게 준 겁니다. 노인은 화가에게, 중년 여인은 소설가에게 빵을 줍니다. 기적이 또 다른 기적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 갑니다. 문화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이 짧은 소설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 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글쓰기를 배운 적 없는 주물공장 노동자라는 특별한, 아니 특별할 것 없는 이력을 가진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생애 첫 책의 맨 앞자리에 두었을까. 낮에는 성수동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소설을 쓴, 말하자면 '주경야독'하는 작가에게 밥보다 중한 것은 글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인상적인 이야기에 매료된 교사들이 학교 독서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읽힌 까닭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읽어야 알 수 있고, 읽어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시대에 책이 처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지하철입니다. 백이면 백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신문 읽는 사람은 아예 자취를 감춘 지 오래. 그나마 책 읽는 사람은 간혹 보이긴 합니다. 독서 문화를 위축시키는 최대의 적은 명실공히 '스마트폰'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 놀라운 전자장치의 등장으로 적어도 지하철이란 공간에서 책은 '추방'됐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이미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는 '읽기'를 '고향집'이라 부릅니다. 똑같이 먹고, 싸고, 자는 동물들의 세계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능력, 그것은 '읽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문해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이게 뭘까요. 언뜻 봐선 아기 신발을 판다는 광고 문구 같습니다. 사용한 적 없다는 건 새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강조한 표현이죠. 아마도 아기에게 신기려고 샀거나 선물을 받은 어느 엄마가 아이가 훌쩍 커버리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고, 그냥 누구 줘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맘 카페에 팔려고 올린 글의 제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로 그 유명한 작가입니다. 어라,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달리 해석해야 하겠군요. 헤밍웨이가 아기 신발을 팔아보려고 쓴 게 아니라면, 이 짧은 한 줄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소설입니다. 여섯 단어로 된 초단편소설. 자, 이제 상상력의 회로를 분주하게 돌려봅니다.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가 그려지시나요?

이렇게 생각해 보죠. 혹시 저 신발을 내놓은 엄마는 사실 엄마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어렵사리 생긴 아이를 유산하고 말죠. 아기가 태어나면 꼭 신겨봐야지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샀을 저 신발은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여인의 슬픔, 아픔을 떠올리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헤밍웨이라도 고작 여섯 단어로 소설을 쓸 수 있겠어? 하고 내기를 걸었던 친구들도 '역시 헤밍웨이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한 줄짜리 소설. 저자는 헤밍웨이의 초단편 소설을 통해 생각하고 환기하는 '깊이 읽기'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독서가 '공감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E. M. 포스터는 읽는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한 감정을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 했고,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연극 <섀도우 랜드>에서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읽습니다.'란 대사가 나온다고 하죠. 읽기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길'이란 겁니다. 읽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자는 말합니다.

평생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은 지식의 저수지에 더해져서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아홉 통의 편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저자는 '디지털 기기를 통한 읽기'의 한계와 부작용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맥락을 보지 못하는 단편적인 읽기가 습관이 된 이들이 '가짜 뉴스'에 얼마나 취약한지는 한때 '팩트체크'가 유행처럼 번진 현상으로도 분명히 확인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등장했을까요. "아이패드는 새로운 고무 젖꼭지가 되었습니다."

정보는 너무나 많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죠. 정보와 인간의 관계는 역전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필요에 의해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게 아니라, 정보가 사람을 표적 삼아 찾아 나서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점점 더 알기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스스로 사실을, 진실을 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런 취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것이 바로 가짜 뉴스인 겁니다.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종이책을 읽은 학생의 '문맥 이해력'이 전자책을 읽은 학생보다 더 뛰어납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구체적인 과학적 근거를 최대한 상세하게 소개해 놓았습니다. 막연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왜 읽어야 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지극히 사려 깊은 말로 친절하게, 그러면서 간절하게 설명합니다.

"책은 집이다. 당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실재하는 물리적 사물이다." - 마이클 더다(문학평론가)

1년에 100권이 넘는 책을 읽어오고 있는 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종이책 읽기를 권합니다. 새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그 신비로운 촉감, 갓 인쇄된 종이가 풍기는 특유의 향기, 잘 만들어진 표지의 디자인과 색감이 주는 시각적 만족감…. 종이책을 읽는 행위는 시각, 촉각, 후각을 모두 가동시키는 '공감각적 행위'라고 말이죠.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책은 외형마저 '스마트폰'에 맞서 변하고 있습니다. 책의 크기는 (핸드백에 들어갈 만큼) 점점 작아집니다.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 수는 점점 줄고, 반대로 글자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죠. 장편소설 분량도 점점 줄어서 요즘은 중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장편도 꽤 많습니다. 책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이 책도 디지털이라는 대세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읽기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저자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쓴 이 편지들을 더 많은 이가 읽고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이가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부모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기억력이 나빠지고, 갈수록 주의력도 떨어지고, 하루하루 사는 일이 내 것 같지 않아 걱정하는 분들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가 책을 읽는 이유가 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뒤로한 채 저의 상상 너머, 저의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읽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Reader, Come Home'. 독자여, 집으로 돌아오라. 우리말 제목을 <다시, 책으로>라 붙인 까닭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지만, 원래 제목에 담긴 저 간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죠. 그런 절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읽기입니다. 이 책은 '읽기의 수호자'가 '읽기'에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입니다.

저자가 첫 번째 편지에 소개한,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카나리아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카나리아는 탄광 갱도 안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에 민감해서,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가기 전에 카나리아를 보내 유독 가스가 나오는지 확인했다고 하죠. 예술가도 바로 그런 카나리아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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