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 373개’ 과수원이 사라졌다

입력 2020.06.22 (21:02) 수정 2020.06.2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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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화상병 피해로 과수원 매몰 중인 농민.과수화상병 피해로 과수원 매몰 중인 농민.

"자식을 내 손으로 끌어 묻는 거죠. 아들이 농사지으러 온다고 했을 때 '농사도 전망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싶어요."

수확을 두 달 앞두고 과수원 통째로 사과나무를 갈아엎을 줄 몰랐습니다. 화상을 입은 듯 순식간에 나무를 검게 말려 죽인다는 과수화상병이 마을에 들이닥친 지 20여 일. 박선하(충북 충주시 산척면) 씨는 매몰 작업이 이뤄지는 과수원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나무들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갈아엎고 묻고…뿌리째 흔들리는 사과 주산지

충북 충주시 산척면은 지난달(5월) 중순 올해 첫 과수화상병 의심 신고가 나온 뒤 한 달 만에 그야말로 초토화됐습니다. 의심증세를 보인 과수원이 백이면 백, 모두 '확진 판정'을 받아, 전체 사과 농가 147곳 가운데 130여 곳이 사과를 땅에 묻어야 합니다.

재배 면적으로는 전체 102.1ha 가운데 74.3ha, 축구장 106개 크기입니다(6월 19일 집계 기준). 10곳 남짓, 화를 겨우 면한 농가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충북 충주시 산척면. 맹지가 된 과수원.충북 충주시 산척면. 맹지가 된 과수원.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과 주산지인 충주, 제천 등 충북 지역의 올해 과수화상병 피해는 겨우 보름여 만에 지난해 전체 피해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역대 최악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던 지난해 피해를 훌쩍 넘어, 확진 농가 수와 과수원 면적이 3배에 육박합니다. 지난해 처음 발병했던 충북 음성군에서도 어김없이 피해 농가가 발생했고, 충북 진천에서도 첫 확진 농가가 나왔습니다.

올해 피해의 90% 이상이 충북에 집중됐지만, 역대 주요 발병지였던 경기도 안성과 충남 천안 이외 지역에서도 화상병이 속출하면서 피해는 시·도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와 강원도 내에서도 신규 발병 지역이 잇따르더니, 지난 1일 전북에서는 처음으로 익산에서 피해 농가가 나와 방제 당국의 확산 방어선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매몰 작업 중인 과수원매몰 작업 중인 과수원

치료제 없는 과수계 코로나19…"안 걸리는 게 상책"

'화상병'이 과수계의 '구제역', '에이즈',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불리는 건 원인균에 감염되면 빠르게 확산하는 반면 검증된 치료제는 없어섭니다. 한번 발병하면, 나무를 매몰하고 최소 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사과와 배나무 등 과수화상병의 원인균이 주로 기생하는 식물을 심을 수 없습니다.

현재로선 애초에 안 걸리는 게 상책.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발병 현황을 보면, 국내에선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는 한 이제 과수화상병 박멸은 어렵다는 게 학계와 방제 당국의 우려 섞인 관측입니다.


과수화상병 피해 사과나무과수화상병 피해 사과나무

과수화상병은 장미과 과수에만 발생하는 세균병으로, 검역 금지 외래 병해충. 2015년 경기도 안성(32 농가), 충남 천안(10 농가), 충북 제천(1 농가)에서 처음 확인됐지만, 유전자 분석 결과 그보다 4~5년 앞서 국내에 유입된 뒤 묘목을 통해 확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과 충남 천안을 중심으로 해마다 발병하다가 2018년부터 전국적인 확산세를 보였는데, 올해는 일단 기상 조건이 세균 증식과 발현에 유리했다는 분석입니다. 지난해 발병지 주변에 남아있던 세균들이 평년보다 고온다습했던 겨울을 나면서 증식했고, 초봄 냉해로 나무의 저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급격히 발현했다는 겁니다.

실제 올해 확진된 과수원은 기존 발생지 반경 2km 내에 집중돼, 잠복 세균이 꿀벌 등 곤충이나 비바람에 의해 퍼졌을 것으로 점쳐집니다.

토착화한 과수화상병에 '타드는 농심'

하지만 인접 지역에서의 재발이 아닌, 신규 발병지에서의 잇단 확진은 사람에 의한 전파가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전정 가위를 소독하지 않고 가지치기하는 등 여러 과수원이 농작업을 교류하면서 세균이 확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과수 재배 농민과 작업자들에게 강조하는 방제 지침이 일선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요 집단 발병지는 사실상 과수화상병이 토착화했기 때문에, 당분간 '공존'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 하지만 금지 병해충에 대한 국내 연구 자체가 이제 막 발을 뗀 상황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과수원을 갈아엎어야 할지 농심은 애끓고 있습니다.

과수화상병 한 달 만에 사라진 과수원은 전국 480곳, 축구장 373개 면적에 달합니다 (6월 21일 집계 기준, 261.6ha).


화상병 피해 과수원화상병 피해 과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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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장 373개’ 과수원이 사라졌다
    • 입력 2020-06-22 21:02:30
    • 수정2020-06-22 21:03:03
    취재K
과수화상병 피해로 과수원 매몰 중인 농민.
"자식을 내 손으로 끌어 묻는 거죠. 아들이 농사지으러 온다고 했을 때 '농사도 전망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싶어요."

수확을 두 달 앞두고 과수원 통째로 사과나무를 갈아엎을 줄 몰랐습니다. 화상을 입은 듯 순식간에 나무를 검게 말려 죽인다는 과수화상병이 마을에 들이닥친 지 20여 일. 박선하(충북 충주시 산척면) 씨는 매몰 작업이 이뤄지는 과수원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나무들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갈아엎고 묻고…뿌리째 흔들리는 사과 주산지

충북 충주시 산척면은 지난달(5월) 중순 올해 첫 과수화상병 의심 신고가 나온 뒤 한 달 만에 그야말로 초토화됐습니다. 의심증세를 보인 과수원이 백이면 백, 모두 '확진 판정'을 받아, 전체 사과 농가 147곳 가운데 130여 곳이 사과를 땅에 묻어야 합니다.

재배 면적으로는 전체 102.1ha 가운데 74.3ha, 축구장 106개 크기입니다(6월 19일 집계 기준). 10곳 남짓, 화를 겨우 면한 농가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충북 충주시 산척면. 맹지가 된 과수원.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과 주산지인 충주, 제천 등 충북 지역의 올해 과수화상병 피해는 겨우 보름여 만에 지난해 전체 피해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역대 최악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던 지난해 피해를 훌쩍 넘어, 확진 농가 수와 과수원 면적이 3배에 육박합니다. 지난해 처음 발병했던 충북 음성군에서도 어김없이 피해 농가가 발생했고, 충북 진천에서도 첫 확진 농가가 나왔습니다.

올해 피해의 90% 이상이 충북에 집중됐지만, 역대 주요 발병지였던 경기도 안성과 충남 천안 이외 지역에서도 화상병이 속출하면서 피해는 시·도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와 강원도 내에서도 신규 발병 지역이 잇따르더니, 지난 1일 전북에서는 처음으로 익산에서 피해 농가가 나와 방제 당국의 확산 방어선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매몰 작업 중인 과수원
치료제 없는 과수계 코로나19…"안 걸리는 게 상책"

'화상병'이 과수계의 '구제역', '에이즈',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불리는 건 원인균에 감염되면 빠르게 확산하는 반면 검증된 치료제는 없어섭니다. 한번 발병하면, 나무를 매몰하고 최소 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사과와 배나무 등 과수화상병의 원인균이 주로 기생하는 식물을 심을 수 없습니다.

현재로선 애초에 안 걸리는 게 상책.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발병 현황을 보면, 국내에선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는 한 이제 과수화상병 박멸은 어렵다는 게 학계와 방제 당국의 우려 섞인 관측입니다.


과수화상병 피해 사과나무
과수화상병은 장미과 과수에만 발생하는 세균병으로, 검역 금지 외래 병해충. 2015년 경기도 안성(32 농가), 충남 천안(10 농가), 충북 제천(1 농가)에서 처음 확인됐지만, 유전자 분석 결과 그보다 4~5년 앞서 국내에 유입된 뒤 묘목을 통해 확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과 충남 천안을 중심으로 해마다 발병하다가 2018년부터 전국적인 확산세를 보였는데, 올해는 일단 기상 조건이 세균 증식과 발현에 유리했다는 분석입니다. 지난해 발병지 주변에 남아있던 세균들이 평년보다 고온다습했던 겨울을 나면서 증식했고, 초봄 냉해로 나무의 저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급격히 발현했다는 겁니다.

실제 올해 확진된 과수원은 기존 발생지 반경 2km 내에 집중돼, 잠복 세균이 꿀벌 등 곤충이나 비바람에 의해 퍼졌을 것으로 점쳐집니다.

토착화한 과수화상병에 '타드는 농심'

하지만 인접 지역에서의 재발이 아닌, 신규 발병지에서의 잇단 확진은 사람에 의한 전파가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전정 가위를 소독하지 않고 가지치기하는 등 여러 과수원이 농작업을 교류하면서 세균이 확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과수 재배 농민과 작업자들에게 강조하는 방제 지침이 일선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요 집단 발병지는 사실상 과수화상병이 토착화했기 때문에, 당분간 '공존'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 하지만 금지 병해충에 대한 국내 연구 자체가 이제 막 발을 뗀 상황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과수원을 갈아엎어야 할지 농심은 애끓고 있습니다.

과수화상병 한 달 만에 사라진 과수원은 전국 480곳, 축구장 373개 면적에 달합니다 (6월 21일 집계 기준, 261.6ha).


화상병 피해 과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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