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에 쓸려간 ‘왕의 얼굴’…전쟁이 남긴 상처

입력 2020.06.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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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발생한 부산 용두산 화재로 말미암아 소개 중에 있던 구 황실 서적, 기명 등이 소실됐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이에 구 황실 재산 관리종국과 치안국 측에서는 급거 그 진상을 조사한 바 있는데 12대 임금 어진(御眞)과 궁중일기 등 약 4천 점 중 3천5백 점이 화마에 의해 재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일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 자 신문에 실린 기사 「재로 화한 국보」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있던 국보와 보물 등 각종 문화재 또한 부산 피란길에 올랐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문화재들은 한동안 부산에 계속 머뭅니다. 그런데 1954년 12월 26일에 궁중 문화재 4천여 점이 보관돼 있던 부산시 동광동 부산국악원 창고에 불이 납니다. 위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4천여 점에 이르는 유물 가운데 자그마치 3천4백 점이 잿더미가 되는 대참사가 일어나죠.

《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 기사《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 기사

이 가운데는 48점이나 되는 조선 역대 임금의 초상화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나마 불에 타고 남은 조각이라도 건진 것은 다 합쳐서 18점. 나머지 30점은 화마(火魔)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판명된 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25 동탄으로 말미암아 소개 중인 여러 가지 국보 중 창덕궁 선원전에 비장 중이던 역대 임금의 어진과 친필, 역대 재상 초상화와 궁중 일기, 서적, 기타 은제기 등 무려 4천여 점이 부산 동광동 부산국악원 창고에 보관 중이던 바 이번 2차 용두산 화재로 말미암아 손댈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 전부가 소실되어 버렸다는데….


조선 왕조를 연 초대 임금 태조(太祖)의 어진은 사진에서 보듯 왼쪽 절반이 타버렸습니다. 가운데 그을린 흔적이 일정한 무늬를 이루고 있는 건 그림을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서 보관하던 상태에서 불에 탔기 때문이죠. <태조어진>이 이것 말고도 전주 경기전에 따로 남아 전해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게 없었다면 후손들은 영영 태조의 얼굴을 못 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은 왼쪽 귀와 눈만 남았지만, 그 형형한 눈빛은 한 왕조를 개창한 위대한 군주의 위용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이 <태조어진>은 1900년에 기존 어진을 보고 다시 베껴 그린 겁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이다. 1900년(광무 4년)에 옮겨 그렸다(太祖高皇帝御眞 光武四年庚子移摸)'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원종어진 (1872년)원종어진 (1872년)

이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원종(元宗)입니다. 생소하죠. 실제로 임금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니까요. 원종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의 아버지입니다. 살아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반정(反正)을 통해 왕이 되자 사후에 예우를 받아 왕으로 추존됐습니다.

원종은 왕이 된 적이 없으므로 생전에 공신 복장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나중에 어진으로 격상됩니다. 그래서 조선 역대 임금 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임금의 복장이 아니죠. <원종어진>은 앞에서 본 <태조어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얼굴 부분을 아예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죠. 화면 오른쪽 상단에 남아 있는 글씨를 통해 1872년에 그려진 원종의 초상화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1935년에 이당 김은호가 베껴 그린 초상화가 한 점 더 남아 있었고,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그림은 화면 오른쪽이 불에 탔음에도 얼굴은 비교적 온전하죠. 가슴에는 왕자 신분임을 나타내는 백택(白澤, 덕 있는 임금 치세에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신령한 동물)이 수 놓여 있습니다. 임금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예우한 겁니다.

두 차례 왜란과 호란의 아픔을 딛고 다시 어진 제작에 열의를 보인 왕은 숙종(肅宗)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의 모습을 그린 <숙종어진>은 3분의 2 가까이 타서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조선 역대 임금 금 가운데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한 인물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였습니다.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 연잉군(延礽君) 시절인 1714년에 그려진 <연잉군초상>과 왕위에 오른 뒤 51세 때 모습을 그린 <영조어진> 두 점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죠.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좌) 연잉군초상 (1714년) (우) 영조어진 (1900년)(좌) 연잉군초상 (1714년) (우) 영조어진 (1900년)

<연잉군초상>은 화면 오른쪽 4분의 1가량이 화재 피해를 봤지만, 얼굴은 물론 전체적인 모습까지 고스란히 살아남았습니다. 화면 왼쪽 상단 글씨를 통해 영조의 21살 때 모습을 그렸음을 알 수 있죠. 가슴에는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백택이 그려져 있는 게 보입니다. <영조어진>은 가장자리에 일부 불에 탄 흔적이 있지만, 이만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영조어진>은 1900년에 다시 그려진 겁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영조대왕의 어진이다. 1900년(광무 4년)에 옮겨 그렸다.(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庚子移摸)'고 적혀 있습니다. 앞에서 본 <태조어진>과 같이 그려진 겁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1900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불이 나 조선 일곱 임금의 어진이 모두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당시에 남아 있던 어진을 보고 일곱 분의 초상화를 새로 제작합니다.

순조어진순조어진

영조의 손자 정조의 어진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으로 정조의 아들 순조의 초상화가 추정작까지 포함해서 모두 넉 점 있는데요. <순조어진>은 넉 점 모두 큰 피해를 당해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이른 시기인 1830년에 그려진 <순조어진>은 말할 것도 없고, 1900년에 다시 그려진 어진 또한 얼굴이 안 보입니다. 왼쪽 귀만 남아 있죠.


<순조어진>으로 추정되는 한 점은 1808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 초상화는 입술 부분만 간신히 보일 뿐인데, 자세히 보면 수염이 많지 않아서 순조의 젊은 시절을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초상화 또한 비슷한 운명을 겪었죠. 새 시대를 이끌어갈 군주로 큰 기대를 모았던 효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문조(익종)어진>이 바로 효명의 초상화입니다. 살아서 임금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후에 아들 헌종이 익종(翌宗)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격상해 추존했습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글씨를 통해 효명세자의 18살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왼쪽 귀와 눈썹뿐입니다. 1900년에 다시 그린 어진 가운데 <문조(익종)어진>으로 추정되는 한 점이 더 있지만, 너무 많이 타버려서 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1861년에 그려진 <철종어진>은 얼굴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았지만, 입 부분만 불에 그슬려 사라졌습니다. 철종의 31살 때 모습으로 군복 입은 모습을 그린 어진으로는 유일합니다. 이밖에 <철조어진>이 두 점 더 있는데, 거의 다 타버려서 실체를 알아보기가 불가능합니다. 꽤 많은 초상화가 남아 있는 고종의 어진도 4분의 3 이상이 화마에 사라졌습니다.

순종어진 (1928년)순종어진 (1928년)

조선 최후의 임금 순종(純宗)의 어진은 황제의 복장인 황룡포를 입은 모습을 그린 유일한 그림입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황제를 상징하는 복식인 황룡포를 입은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임금은 고종과 순종 둘밖에 없죠. 1928년에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남아 있는 얼굴을 보면 순종임에 틀림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죠.


마지막으로 살펴볼 그림은 순종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워낙에 화재 피해를 크게 입어 인물의 절반도 채 안 남았지만, 용케도 왼쪽 귀 일부와 눈만은 살아남았습니다. 앞에서 본 <태조어진>도 그렇듯, 표정도 없이 덩그러니 남은 저 눈동자는 실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일까요. 보면 볼수록 가슴에 뭔가 와 닿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조선 역대 임금들의 어진 가운데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것들은 그동안 이런저런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도 여러 차례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에 피해가 크고 보존 상태마저 좋지 않은 것들은 일반인들이 볼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타고 남은 것까지 모두 합해서 어진 18점을 모두 공개한 도록 『궁중서화 II』를 발간한 덕분에 그동안의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장장 10년여에 걸쳐 어진 보존처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일부 어진을 복원 모사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길도 마련했죠. 2015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을 통해 어진 7점이 한꺼번에 공개된 것은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도록이 발간됨으로써 화마가 할퀴고 간 조선 역대 임금 초상화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거죠.

전쟁은 사람에게만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궁궐이 깡그리 불에 타면서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도 한 줌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건 사치였죠. 게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은 마당이었으니, 다시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전통을 이어간 건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꼭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참상은 불에 타고 그을려 누더기가 된 왕의 초상화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되죠. 화마에 속절없이 쓸려가 버린 '왕의 얼굴'은 다시는 이 땅에 또다시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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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마에 쓸려간 ‘왕의 얼굴’…전쟁이 남긴 상처
    • 입력 2020-06-24 07:00:45
    취재K
지난 26일 발생한 부산 용두산 화재로 말미암아 소개 중에 있던 구 황실 서적, 기명 등이 소실됐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이에 구 황실 재산 관리종국과 치안국 측에서는 급거 그 진상을 조사한 바 있는데 12대 임금 어진(御眞)과 궁중일기 등 약 4천 점 중 3천5백 점이 화마에 의해 재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일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 자 신문에 실린 기사 「재로 화한 국보」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있던 국보와 보물 등 각종 문화재 또한 부산 피란길에 올랐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문화재들은 한동안 부산에 계속 머뭅니다. 그런데 1954년 12월 26일에 궁중 문화재 4천여 점이 보관돼 있던 부산시 동광동 부산국악원 창고에 불이 납니다. 위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4천여 점에 이르는 유물 가운데 자그마치 3천4백 점이 잿더미가 되는 대참사가 일어나죠.

《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 기사
이 가운데는 48점이나 되는 조선 역대 임금의 초상화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나마 불에 타고 남은 조각이라도 건진 것은 다 합쳐서 18점. 나머지 30점은 화마(火魔)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판명된 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25 동탄으로 말미암아 소개 중인 여러 가지 국보 중 창덕궁 선원전에 비장 중이던 역대 임금의 어진과 친필, 역대 재상 초상화와 궁중 일기, 서적, 기타 은제기 등 무려 4천여 점이 부산 동광동 부산국악원 창고에 보관 중이던 바 이번 2차 용두산 화재로 말미암아 손댈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 전부가 소실되어 버렸다는데….


조선 왕조를 연 초대 임금 태조(太祖)의 어진은 사진에서 보듯 왼쪽 절반이 타버렸습니다. 가운데 그을린 흔적이 일정한 무늬를 이루고 있는 건 그림을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서 보관하던 상태에서 불에 탔기 때문이죠. <태조어진>이 이것 말고도 전주 경기전에 따로 남아 전해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게 없었다면 후손들은 영영 태조의 얼굴을 못 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은 왼쪽 귀와 눈만 남았지만, 그 형형한 눈빛은 한 왕조를 개창한 위대한 군주의 위용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이 <태조어진>은 1900년에 기존 어진을 보고 다시 베껴 그린 겁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이다. 1900년(광무 4년)에 옮겨 그렸다(太祖高皇帝御眞 光武四年庚子移摸)'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원종어진 (1872년)
이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원종(元宗)입니다. 생소하죠. 실제로 임금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니까요. 원종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의 아버지입니다. 살아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반정(反正)을 통해 왕이 되자 사후에 예우를 받아 왕으로 추존됐습니다.

원종은 왕이 된 적이 없으므로 생전에 공신 복장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나중에 어진으로 격상됩니다. 그래서 조선 역대 임금 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임금의 복장이 아니죠. <원종어진>은 앞에서 본 <태조어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얼굴 부분을 아예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죠. 화면 오른쪽 상단에 남아 있는 글씨를 통해 1872년에 그려진 원종의 초상화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1935년에 이당 김은호가 베껴 그린 초상화가 한 점 더 남아 있었고,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그림은 화면 오른쪽이 불에 탔음에도 얼굴은 비교적 온전하죠. 가슴에는 왕자 신분임을 나타내는 백택(白澤, 덕 있는 임금 치세에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신령한 동물)이 수 놓여 있습니다. 임금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예우한 겁니다.

두 차례 왜란과 호란의 아픔을 딛고 다시 어진 제작에 열의를 보인 왕은 숙종(肅宗)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의 모습을 그린 <숙종어진>은 3분의 2 가까이 타서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조선 역대 임금 금 가운데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한 인물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였습니다.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 연잉군(延礽君) 시절인 1714년에 그려진 <연잉군초상>과 왕위에 오른 뒤 51세 때 모습을 그린 <영조어진> 두 점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죠.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좌) 연잉군초상 (1714년) (우) 영조어진 (1900년)
<연잉군초상>은 화면 오른쪽 4분의 1가량이 화재 피해를 봤지만, 얼굴은 물론 전체적인 모습까지 고스란히 살아남았습니다. 화면 왼쪽 상단 글씨를 통해 영조의 21살 때 모습을 그렸음을 알 수 있죠. 가슴에는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백택이 그려져 있는 게 보입니다. <영조어진>은 가장자리에 일부 불에 탄 흔적이 있지만, 이만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영조어진>은 1900년에 다시 그려진 겁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영조대왕의 어진이다. 1900년(광무 4년)에 옮겨 그렸다.(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庚子移摸)'고 적혀 있습니다. 앞에서 본 <태조어진>과 같이 그려진 겁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1900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불이 나 조선 일곱 임금의 어진이 모두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당시에 남아 있던 어진을 보고 일곱 분의 초상화를 새로 제작합니다.

순조어진
영조의 손자 정조의 어진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으로 정조의 아들 순조의 초상화가 추정작까지 포함해서 모두 넉 점 있는데요. <순조어진>은 넉 점 모두 큰 피해를 당해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이른 시기인 1830년에 그려진 <순조어진>은 말할 것도 없고, 1900년에 다시 그려진 어진 또한 얼굴이 안 보입니다. 왼쪽 귀만 남아 있죠.


<순조어진>으로 추정되는 한 점은 1808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 초상화는 입술 부분만 간신히 보일 뿐인데, 자세히 보면 수염이 많지 않아서 순조의 젊은 시절을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초상화 또한 비슷한 운명을 겪었죠. 새 시대를 이끌어갈 군주로 큰 기대를 모았던 효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문조(익종)어진>이 바로 효명의 초상화입니다. 살아서 임금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후에 아들 헌종이 익종(翌宗)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격상해 추존했습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글씨를 통해 효명세자의 18살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왼쪽 귀와 눈썹뿐입니다. 1900년에 다시 그린 어진 가운데 <문조(익종)어진>으로 추정되는 한 점이 더 있지만, 너무 많이 타버려서 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1861년에 그려진 <철종어진>은 얼굴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았지만, 입 부분만 불에 그슬려 사라졌습니다. 철종의 31살 때 모습으로 군복 입은 모습을 그린 어진으로는 유일합니다. 이밖에 <철조어진>이 두 점 더 있는데, 거의 다 타버려서 실체를 알아보기가 불가능합니다. 꽤 많은 초상화가 남아 있는 고종의 어진도 4분의 3 이상이 화마에 사라졌습니다.

순종어진 (1928년)
조선 최후의 임금 순종(純宗)의 어진은 황제의 복장인 황룡포를 입은 모습을 그린 유일한 그림입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황제를 상징하는 복식인 황룡포를 입은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임금은 고종과 순종 둘밖에 없죠. 1928년에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남아 있는 얼굴을 보면 순종임에 틀림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죠.


마지막으로 살펴볼 그림은 순종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워낙에 화재 피해를 크게 입어 인물의 절반도 채 안 남았지만, 용케도 왼쪽 귀 일부와 눈만은 살아남았습니다. 앞에서 본 <태조어진>도 그렇듯, 표정도 없이 덩그러니 남은 저 눈동자는 실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일까요. 보면 볼수록 가슴에 뭔가 와 닿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조선 역대 임금들의 어진 가운데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것들은 그동안 이런저런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도 여러 차례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에 피해가 크고 보존 상태마저 좋지 않은 것들은 일반인들이 볼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타고 남은 것까지 모두 합해서 어진 18점을 모두 공개한 도록 『궁중서화 II』를 발간한 덕분에 그동안의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장장 10년여에 걸쳐 어진 보존처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일부 어진을 복원 모사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길도 마련했죠. 2015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을 통해 어진 7점이 한꺼번에 공개된 것은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도록이 발간됨으로써 화마가 할퀴고 간 조선 역대 임금 초상화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거죠.

전쟁은 사람에게만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궁궐이 깡그리 불에 타면서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도 한 줌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건 사치였죠. 게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은 마당이었으니, 다시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전통을 이어간 건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꼭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참상은 불에 타고 그을려 누더기가 된 왕의 초상화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되죠. 화마에 속절없이 쓸려가 버린 '왕의 얼굴'은 다시는 이 땅에 또다시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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