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도 예술”이라고 한 조영남…‘대작 그림’ 무죄 이유

입력 2020.06.2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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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즐기는 '화투'를 소재로 한 회화 작품들을 발표해 화제가 됐던 가수 조영남 씨.

그런데 이 그림 중 상당수가 조 씨가 아닌 다른 작가가 대부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법정공방에 휘말렸습니다.

조 씨는 송 모 씨 등 대작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은 가벼운 덧칠만 해 21점을 팔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벌어들인 돈만 1억 5천만 원이 넘어 사기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조영남 씨는 송 씨 등은 조수이며, 조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미술계 관행이라고 맞섰습니다.

이 같은 '그림 대작'은 정당한 창작활동일까요, 아니면 구매자를 속인 사기일까요. 오늘 법원의 최종 결론이 나왔습니다.

조영남 씨 작품 ‘병마용갱’조영남 씨 작품 ‘병마용갱’

■ 조영남 "앤디 워홀·데미안 허스트도 조수 쓴다.. 아이디어는 내 것"

조영남 작품인가 아닌가? '아이디어' vs '표현'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은 예술의 의미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보조 작가에게 시켜 그린 그림을 자신의 그림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를 둘러싼 찬반 싸움이 법정을 넘어 예술계로까지 확산됐습니다.

먼저 정당하다는 의견. 조 씨 측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자신이 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비록 표현 작업 과정에서 조수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술의 핵심 가치는 '아이디어'와 '개념'일 뿐 '실행행위'는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작품은 조영남 씨의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세계적인 예술가인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은 작품을 만들 때 본인들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표현작업은 다수의 조수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작가가 제자나 조수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만드는 일은 오래전 서양의 르네상스 시절부터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조 씨 측은 주장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조 씨 사건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대량 생산된 소변기에 서명만 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습니다. "작가의 확실한 작품 개념과 철학이 있을 때 조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입니다.

앞서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작품들은 조 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으므로 조 씨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조영남 씨 작품들조영남 씨 작품들

■ "작가 양심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 행위"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검찰은 해당 작품은 보조 작가인 송 씨의 것이지 조영남 씨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작적 표현 작업'을 누가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외부에 드러내는 게 '표현 작업'이죠. 이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화풍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또 작가의 실력과 감각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회화 실력으로 볼 때 보조 작가들이 조영남 씨의 조수나 제자 수준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가 됐습니다. 특히 송 씨는 미국 뉴욕 등지에서 20년 넘게 작품활동을 해왔고, 미술 대전 수상과 100여 차례 전시회 경력을 갖춘 직업화가였습니다.

앞서 공개변론에서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장도 "아이디어는 작가적 역량이 함께 해야 작품으로 인정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작가의 작업실도 아닌 먼 곳에 있는 조수가 그린 작품에 조금 손을 본 척하고 서명하는 것은 작가적 양심이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 조수 썼다는 사실 구매자들에게 알려야 하나?

또 다른 쟁점은 조 씨가 작품 구매자들에게 이 같은 제작 방식을 알려야 하는지 여부였습니다.

실제로 상당수 구매자들은 조 씨가 작품을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 TV 등에서 피고인 조영남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주로 봤기 때문에 당연히 피고인 조영남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깁니다.

또 대부분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사건 미술작품을 구매하지 않았거나 그와 같이 높은 가격으로는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반면 작가들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형상화 작업은 기계나 보조인력을 이용해 대량생산하는 현대미술의 특성상 제작 방식을 알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 엇갈린 1, 2심 판결

조영남 씨의 작품 세계를 둘러싼 치열한 쟁점 싸움. 1, 2심 재판부의 판결도 온도 차가 컸습니다.

1심 재판부는 "조 씨의 창작적 표현물로 보기 어렵고, 송 씨는 조수가 아닌 독자적 작가이므로, 그림 대작은 구매자들을 속인 행위"라며 조 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조 씨에게 "피해자들에게 충격과 실망감을 안겼고 문제가 불거진 후에도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사려 깊지 못한 발언으로 미술계에 대한 신뢰성을 훼손했다"고 판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은 2심에서 뒤집혔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미술 작품의 소재인 화투는 조영남의 고유 아이디어"라면서 "조수 송 모 씨는 조 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 보조일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 "미술사적으로도 도제 교육의 하나로 조수를 두고 그 과정에서 제작을 보조하게 하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보조자를 사용한 제작 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하는 이상 이를 범죄라고 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판시했습니다.


■ 대법원 '무죄' 최종 결론

그리고 오늘 대법원은 조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 지었습니다. 조영남 씨는 사기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겁니다.

대법원 1부는 미술작품의 거래에서 작품이 작가 자신의 작품인지 혹은 보조자를 사용해 제작되었는지는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해당 미술작품이 '조영남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이를 구입했고, 조 씨의 친작(親作)으로 잘못 알고 구매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번 판결은 미술작품 제작에 제3자가 관여했지만 이를 구매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판매했다면 사기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를 판단한 최초 사례였습니다.

법원은 미술작품을 둘러싼 위작이나 저작권 다툼 등의 사정이 없는 한 작품의 가치 평가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한편 조영남 씨는 무죄를 선고받은 오늘 현대미술에 대한 책을 한 권 내놨습니다. 이 책에서 조 씨는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을 언급했는데요.

조 씨는 작가의 똥을 캔에 담아 전시한 작품이 금값이 됐다면서 "똥조차 훌륭한 예술"이라고 현대미술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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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똥도 예술”이라고 한 조영남…‘대작 그림’ 무죄 이유
    • 입력 2020-06-25 13:42:00
    취재K
한국인이 즐기는 '화투'를 소재로 한 회화 작품들을 발표해 화제가 됐던 가수 조영남 씨.

그런데 이 그림 중 상당수가 조 씨가 아닌 다른 작가가 대부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법정공방에 휘말렸습니다.

조 씨는 송 모 씨 등 대작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은 가벼운 덧칠만 해 21점을 팔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벌어들인 돈만 1억 5천만 원이 넘어 사기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조영남 씨는 송 씨 등은 조수이며, 조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미술계 관행이라고 맞섰습니다.

이 같은 '그림 대작'은 정당한 창작활동일까요, 아니면 구매자를 속인 사기일까요. 오늘 법원의 최종 결론이 나왔습니다.

조영남 씨 작품 ‘병마용갱’
■ 조영남 "앤디 워홀·데미안 허스트도 조수 쓴다.. 아이디어는 내 것"

조영남 작품인가 아닌가? '아이디어' vs '표현'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은 예술의 의미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보조 작가에게 시켜 그린 그림을 자신의 그림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를 둘러싼 찬반 싸움이 법정을 넘어 예술계로까지 확산됐습니다.

먼저 정당하다는 의견. 조 씨 측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자신이 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비록 표현 작업 과정에서 조수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술의 핵심 가치는 '아이디어'와 '개념'일 뿐 '실행행위'는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작품은 조영남 씨의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세계적인 예술가인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은 작품을 만들 때 본인들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표현작업은 다수의 조수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작가가 제자나 조수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만드는 일은 오래전 서양의 르네상스 시절부터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조 씨 측은 주장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조 씨 사건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대량 생산된 소변기에 서명만 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습니다. "작가의 확실한 작품 개념과 철학이 있을 때 조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입니다.

앞서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작품들은 조 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으므로 조 씨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조영남 씨 작품들
■ "작가 양심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 행위"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검찰은 해당 작품은 보조 작가인 송 씨의 것이지 조영남 씨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작적 표현 작업'을 누가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외부에 드러내는 게 '표현 작업'이죠. 이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화풍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또 작가의 실력과 감각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회화 실력으로 볼 때 보조 작가들이 조영남 씨의 조수나 제자 수준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가 됐습니다. 특히 송 씨는 미국 뉴욕 등지에서 20년 넘게 작품활동을 해왔고, 미술 대전 수상과 100여 차례 전시회 경력을 갖춘 직업화가였습니다.

앞서 공개변론에서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장도 "아이디어는 작가적 역량이 함께 해야 작품으로 인정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작가의 작업실도 아닌 먼 곳에 있는 조수가 그린 작품에 조금 손을 본 척하고 서명하는 것은 작가적 양심이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 조수 썼다는 사실 구매자들에게 알려야 하나?

또 다른 쟁점은 조 씨가 작품 구매자들에게 이 같은 제작 방식을 알려야 하는지 여부였습니다.

실제로 상당수 구매자들은 조 씨가 작품을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 TV 등에서 피고인 조영남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주로 봤기 때문에 당연히 피고인 조영남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깁니다.

또 대부분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사건 미술작품을 구매하지 않았거나 그와 같이 높은 가격으로는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반면 작가들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형상화 작업은 기계나 보조인력을 이용해 대량생산하는 현대미술의 특성상 제작 방식을 알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 엇갈린 1, 2심 판결

조영남 씨의 작품 세계를 둘러싼 치열한 쟁점 싸움. 1, 2심 재판부의 판결도 온도 차가 컸습니다.

1심 재판부는 "조 씨의 창작적 표현물로 보기 어렵고, 송 씨는 조수가 아닌 독자적 작가이므로, 그림 대작은 구매자들을 속인 행위"라며 조 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조 씨에게 "피해자들에게 충격과 실망감을 안겼고 문제가 불거진 후에도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사려 깊지 못한 발언으로 미술계에 대한 신뢰성을 훼손했다"고 판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은 2심에서 뒤집혔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미술 작품의 소재인 화투는 조영남의 고유 아이디어"라면서 "조수 송 모 씨는 조 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 보조일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 "미술사적으로도 도제 교육의 하나로 조수를 두고 그 과정에서 제작을 보조하게 하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보조자를 사용한 제작 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하는 이상 이를 범죄라고 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판시했습니다.


■ 대법원 '무죄' 최종 결론

그리고 오늘 대법원은 조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 지었습니다. 조영남 씨는 사기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겁니다.

대법원 1부는 미술작품의 거래에서 작품이 작가 자신의 작품인지 혹은 보조자를 사용해 제작되었는지는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해당 미술작품이 '조영남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이를 구입했고, 조 씨의 친작(親作)으로 잘못 알고 구매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번 판결은 미술작품 제작에 제3자가 관여했지만 이를 구매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판매했다면 사기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를 판단한 최초 사례였습니다.

법원은 미술작품을 둘러싼 위작이나 저작권 다툼 등의 사정이 없는 한 작품의 가치 평가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한편 조영남 씨는 무죄를 선고받은 오늘 현대미술에 대한 책을 한 권 내놨습니다. 이 책에서 조 씨는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을 언급했는데요.

조 씨는 작가의 똥을 캔에 담아 전시한 작품이 금값이 됐다면서 "똥조차 훌륭한 예술"이라고 현대미술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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