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불패의 신화’ 이순신의 필승 전략과 ‘승자총통’

입력 2020.06.29 (07:00) 수정 2020.06.29 (07:0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鎭浦) 입구에 들어와서는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병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에 상륙하여 주군(州郡)으로 흩어져 들어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자행하였으니,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면서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한 자나 쌓였다.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진포에 이르러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사용하여 그 배를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 왜구가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우왕 6년(1380년) 8월 기록입니다. 낯익은 이름이 보이죠. 최무선.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화약을 국산화한 인물. 그래서 '화약의 아버지', '최초의 화약발명가'로 불립니다. 당연히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보면 하루가 멀다고 왜적이 침략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구의 침범과 약탈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뜻이죠.

화약 무기를 만드는 일이 그래서 절실했던 겁니다. 최무선은 화약의 국산화를 이뤘을 뿐 아니라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해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주국방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위 기록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해전(海戰)으로 꼽히는 '진포해전'에 관한 내용입니다.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사용하여 그 배를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고 전합니다.

'진포해전'은 우리 해군이 외부의 침략 세력에 맞서 국산화한 화약 무기로 처음 치른 전투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해상 전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는 점입니다. 기존 해군의 전투 방식은 배를 가까이 붙인 뒤 적선에 올라타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이른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약 무기를 쓸 수 있게 되자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적당한 거리 안에서 얼마든지 화약 무기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죠.

고려 말기의 소형 화기인 〈고총통(古銃筒) 〉 [국립청주박물관]고려 말기의 소형 화기인 〈고총통(古銃筒) 〉 [국립청주박물관]

그전까지 해상 근접전에서 발사할 수 있었던 무기는 불화살 정도였을 겁니다. 화약은 바로 그 '유효 사거리' 문제를 단박에 해결했습니다. 조금 더 멀리서 조금 더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게 된 거죠. 물론 당시 화약 무기는 우리 흔히 생각하는 대포는 아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연구자들은 '화약을 장착한 화살'을 쏴 목표물을 불사르는 형태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쏘는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효 사거리가 늘고 타격 효과도 높아졌겠죠. 최무선의 업적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10여 년 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순신의 첫 백의종군 사실을 일러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때는 1587년.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수비대장이었던 이순신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당시 함경도 지역 군대 총사령관이던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 1538~1601)은 전투에서 졌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 가두고 조정에 보고합니다. 하지만 임금의 판단은 위에서 보듯 패배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곤장 몇 대 치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명령하죠.

만약 북병사의 주장을 임금이 받아들였다면, 이순신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이었죠. 그렇게 관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이후 어떻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을까요. 그 이유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비단에 채색, 145.5×109.0cm, 삼성미술관 리움〈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비단에 채색, 145.5×109.0cm, 삼성미술관 리움

그림 상단 제목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입니다. 장양공(壯襄公)은 앞서 소개해 드린 북병사 이일의 시호(諡號)입니다. 정토(征討)는 정벌(征伐), 토벌(討伐)과 같은 말이고요. 시전부호(時錢部胡)는 시전 부락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장양공이 시전 부락 오랑캐를 토벌하는 그림'입니다.

북쪽 국경 지역에서 여진족이 활개를 치자 북병사 이일은 1588년 초에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마을인 시전 부락을 공격합니다. 당시 여진족이 모여 살던 여러 부락 가운데서도 시전은 꽤 강성한 부락으로 조선에 큰 골칫거리였죠. 북병사 이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 1588년 정월, 시전 부락을 포위한 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입니다. 가장 강한 부락 중 한 곳을 본보기로 쳐서 여진족의 기를 납작하게 꺾어놓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도대체 이순신과 어떤 관계란 말인가. 그림 하단에 좌목(座目)이라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의 명단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이름 석 자가 보입니다.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

북병사 이일의 여진족 토벌대는 왼쪽의 좌위(左衛)와 오른쪽의 우위(右衛)로 이뤄졌습니다. 이순신은 우위에서 우화열장이란 직책으로 참전합니다. 우화열장은 '우측 화기 부대의 대장'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습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죠. 승자총통에 관한 기록은 1583년에 처음 실록에 등장합니다.

고(故) 병사(兵使) 김지(金墀)가 새로 만든 승자총통(勝字銃筒)이 지금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으므로, 상이 그에게 증직(贈職)을 명하고 또 그의 아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바로 그 해에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이 1월부터 7월까지 끊임없이 조선을 상대로 도발합니다. 이 변란을 '니탕개(尼湯介)의 난'이라 부릅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이 겪은 가장 큰 규모의 전란이었죠. 이때 김지가 개발한 승자총통이 큰 위력을 발휘한 사실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승자총통(勝字銃筒)〉, 조선 중기, 보물 제648호, 국립중앙박물관〈승자총통(勝字銃筒)〉, 조선 중기, 보물 제648호, 국립중앙박물관

승자총통은 기존의 다른 소형 화약 무기보다 월등하게 개선된 성능을 뽐냈습니다. 평균 길이가 56.5cm로 기존 총통보다 훨씬 길어져 유효 사거리가 늘었습니다. 격발 방식도 진일보해 장전 시간이 빨라졌고, 철 탄환은 크기가 작아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가지고 다닐 수 있었기에 운용 효율도 높아졌죠. 뒤이어 성능을 더 개선한 별승자총통, 별양자총통, 그리고 최종 단계인 소승자총통까지 개발돼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됐습니다.


이순신의 변방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이순신은 여진족을 상대로 한 전투를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는 것. 더구나 전투 지휘관으로 화약 무기를 실전에서 직접 운용해봄으로써 그 위력과 장단점을 명확하게 파악했으리란 것.

훗날 두 차례 왜란에서 이순신이 펼쳐 보인 교전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원거리 타격'입니다. 최무선이 처음 실전에 사용한 화약 무기의 유용성을 이순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죠. 게다가 조선 수군이 칼을 다루는 데 능한 왜군을 상대로 한 육박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모든 전투에서 철저하게 '거리 두기' 전략을 씁니다.

여진족을 공포에 떨게 하고, 바다에서 왜군의 전선을 침몰시킨 것은 조선의 화약 무기였습니다. 이순신은 실전에서 사용해본 승자총통 등의 화약 무기를 수군 운용 전략에 맞게 다양하게 변형하고 응용했습니다. 화약 무기야말로 조선 수군 전력의 핵심이자, 수군 운용 전략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위대한 군인이 조선의 바다를 지켜냈습니다. 최무선이 원거리 타격' 전술의 선구자였다면, 이순신은 '원거리 타격' 전술의 완성자였던 거죠. 백전불패의 신화는 그냥 이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최근에 펴낸 《조선무기 조사연구 보고서I: 소형화약무기》는 박물관이 추진하는 우리나라 전통 화약 무기 조사 사업의 첫 결실입니다. 국내 19개 기관에 소장된 소형 화약 무기 275건 292점과 조총 48건 50점의 사진과 제원이 상세하게 실려 있죠. 보고서에 수록된 소형 화약 무기는 모두 748점에 이릅니다.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귀중한 유물들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백전불패의 신화’ 이순신의 필승 전략과 ‘승자총통’
    • 입력 2020-06-29 07:00:45
    • 수정2020-06-29 07:09:26
    취재K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鎭浦) 입구에 들어와서는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병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에 상륙하여 주군(州郡)으로 흩어져 들어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자행하였으니,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면서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한 자나 쌓였다.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진포에 이르러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사용하여 그 배를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 왜구가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우왕 6년(1380년) 8월 기록입니다. 낯익은 이름이 보이죠. 최무선.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화약을 국산화한 인물. 그래서 '화약의 아버지', '최초의 화약발명가'로 불립니다. 당연히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보면 하루가 멀다고 왜적이 침략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구의 침범과 약탈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뜻이죠.

화약 무기를 만드는 일이 그래서 절실했던 겁니다. 최무선은 화약의 국산화를 이뤘을 뿐 아니라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해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주국방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위 기록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해전(海戰)으로 꼽히는 '진포해전'에 관한 내용입니다.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사용하여 그 배를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고 전합니다.

'진포해전'은 우리 해군이 외부의 침략 세력에 맞서 국산화한 화약 무기로 처음 치른 전투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해상 전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는 점입니다. 기존 해군의 전투 방식은 배를 가까이 붙인 뒤 적선에 올라타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이른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약 무기를 쓸 수 있게 되자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적당한 거리 안에서 얼마든지 화약 무기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죠.

고려 말기의 소형 화기인 〈고총통(古銃筒) 〉 [국립청주박물관]
그전까지 해상 근접전에서 발사할 수 있었던 무기는 불화살 정도였을 겁니다. 화약은 바로 그 '유효 사거리' 문제를 단박에 해결했습니다. 조금 더 멀리서 조금 더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게 된 거죠. 물론 당시 화약 무기는 우리 흔히 생각하는 대포는 아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연구자들은 '화약을 장착한 화살'을 쏴 목표물을 불사르는 형태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쏘는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효 사거리가 늘고 타격 효과도 높아졌겠죠. 최무선의 업적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10여 년 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순신의 첫 백의종군 사실을 일러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때는 1587년.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수비대장이었던 이순신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당시 함경도 지역 군대 총사령관이던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 1538~1601)은 전투에서 졌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 가두고 조정에 보고합니다. 하지만 임금의 판단은 위에서 보듯 패배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곤장 몇 대 치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명령하죠.

만약 북병사의 주장을 임금이 받아들였다면, 이순신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이었죠. 그렇게 관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이후 어떻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을까요. 그 이유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비단에 채색, 145.5×109.0cm, 삼성미술관 리움
그림 상단 제목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입니다. 장양공(壯襄公)은 앞서 소개해 드린 북병사 이일의 시호(諡號)입니다. 정토(征討)는 정벌(征伐), 토벌(討伐)과 같은 말이고요. 시전부호(時錢部胡)는 시전 부락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장양공이 시전 부락 오랑캐를 토벌하는 그림'입니다.

북쪽 국경 지역에서 여진족이 활개를 치자 북병사 이일은 1588년 초에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마을인 시전 부락을 공격합니다. 당시 여진족이 모여 살던 여러 부락 가운데서도 시전은 꽤 강성한 부락으로 조선에 큰 골칫거리였죠. 북병사 이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 1588년 정월, 시전 부락을 포위한 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입니다. 가장 강한 부락 중 한 곳을 본보기로 쳐서 여진족의 기를 납작하게 꺾어놓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도대체 이순신과 어떤 관계란 말인가. 그림 하단에 좌목(座目)이라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의 명단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이름 석 자가 보입니다.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

북병사 이일의 여진족 토벌대는 왼쪽의 좌위(左衛)와 오른쪽의 우위(右衛)로 이뤄졌습니다. 이순신은 우위에서 우화열장이란 직책으로 참전합니다. 우화열장은 '우측 화기 부대의 대장'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습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죠. 승자총통에 관한 기록은 1583년에 처음 실록에 등장합니다.

고(故) 병사(兵使) 김지(金墀)가 새로 만든 승자총통(勝字銃筒)이 지금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으므로, 상이 그에게 증직(贈職)을 명하고 또 그의 아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바로 그 해에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이 1월부터 7월까지 끊임없이 조선을 상대로 도발합니다. 이 변란을 '니탕개(尼湯介)의 난'이라 부릅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이 겪은 가장 큰 규모의 전란이었죠. 이때 김지가 개발한 승자총통이 큰 위력을 발휘한 사실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승자총통(勝字銃筒)〉, 조선 중기, 보물 제648호, 국립중앙박물관
승자총통은 기존의 다른 소형 화약 무기보다 월등하게 개선된 성능을 뽐냈습니다. 평균 길이가 56.5cm로 기존 총통보다 훨씬 길어져 유효 사거리가 늘었습니다. 격발 방식도 진일보해 장전 시간이 빨라졌고, 철 탄환은 크기가 작아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가지고 다닐 수 있었기에 운용 효율도 높아졌죠. 뒤이어 성능을 더 개선한 별승자총통, 별양자총통, 그리고 최종 단계인 소승자총통까지 개발돼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됐습니다.


이순신의 변방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이순신은 여진족을 상대로 한 전투를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는 것. 더구나 전투 지휘관으로 화약 무기를 실전에서 직접 운용해봄으로써 그 위력과 장단점을 명확하게 파악했으리란 것.

훗날 두 차례 왜란에서 이순신이 펼쳐 보인 교전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원거리 타격'입니다. 최무선이 처음 실전에 사용한 화약 무기의 유용성을 이순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죠. 게다가 조선 수군이 칼을 다루는 데 능한 왜군을 상대로 한 육박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모든 전투에서 철저하게 '거리 두기' 전략을 씁니다.

여진족을 공포에 떨게 하고, 바다에서 왜군의 전선을 침몰시킨 것은 조선의 화약 무기였습니다. 이순신은 실전에서 사용해본 승자총통 등의 화약 무기를 수군 운용 전략에 맞게 다양하게 변형하고 응용했습니다. 화약 무기야말로 조선 수군 전력의 핵심이자, 수군 운용 전략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위대한 군인이 조선의 바다를 지켜냈습니다. 최무선이 원거리 타격' 전술의 선구자였다면, 이순신은 '원거리 타격' 전술의 완성자였던 거죠. 백전불패의 신화는 그냥 이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최근에 펴낸 《조선무기 조사연구 보고서I: 소형화약무기》는 박물관이 추진하는 우리나라 전통 화약 무기 조사 사업의 첫 결실입니다. 국내 19개 기관에 소장된 소형 화약 무기 275건 292점과 조총 48건 50점의 사진과 제원이 상세하게 실려 있죠. 보고서에 수록된 소형 화약 무기는 모두 748점에 이릅니다.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귀중한 유물들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