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볼턴 회고록 파장…북미 외교 30년

입력 2020.07.04 (08:07) 수정 2020.07.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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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북미협상에 대한 진실 공방이 뜨겁습니다.

북미 외교가 본격화 된 지 30년, 북미대화 테이블에 앉은 미국 인사 중 가장 큰 논란을 낳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역대 북미대화 임했던 미국 인사들은 어떠한 관점으로 북한을, 또 한반도를 바라 봤을까요?

클로즈업 북한이 북미대화 30년의 이면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두 정상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했다.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8개월만.

다소 긴장되고 굳은 표정이 포착되기도 했지만 두 정상은 최선을 다해 회담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2019년 2월 :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그런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2019년 2월 : "저는 북한이 엄청난 경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그러한 성공을 계속 보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고 그렇게 되도록 돕고 싶습니다."]

호텔 정원을 함께 산책하면서 밝게 웃는 두 정상과 참모들의 모습, 그리고 비핵화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대답까지 하면서 회담 타결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고조됐다.

["(김위원장님 비핵화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들었습니까? 최고의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은 회담장의 분위기.

그러나 그 사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계속 써 내려 가는 한 남자.

바로 존 볼턴 당시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다.

["비핵화를 위해서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할 결심이 되어 있습니까?"]

주요 질문마다 볼턴의 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후 희망으로 시작된 하노이 회담은 결렬이라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리고 1년 4개월 뒤, 볼턴은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이유를 회고록을 통해 폭로했다.

그는 모호한 비핵화 성명만 담은 합의문 초안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예기치 못한 양보를 막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레이건 대통령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영상을 보여줬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장거리 미사일 제거를 할 수 있겠냐고 제안했을 때는 핵-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전부에 대한 기본적인 신고가 필요하다며 두 정상의 대화에 끼어들었음을 고백했다.

그 밖에도 전혀 좁혀지지 않았던 두 정상의 의견차와 정교하지도 않았던 회담 등을 언급하며 북미 회담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한 볼턴의 회고록.

그러나 전문가들은 볼턴의 회고록을 두고 날 선 공방만 벌일 것이 아니라 그 기록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데는 서로의 협상 카드에 대한 완벽한 무지 때문에 나왔던 거라고 보거든요. 북한은 자기들이 준비한 협상 카드를 가지고 충분히 미국과 협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은 그 협상 카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 있잖아요. 그러면 볼턴 회고록은 결국 양쪽의 생각을 접근 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북미 회담이 본격화된 것은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부터다.

1989년. 프랑스 위성 ‘스팟 2호’가 북한의 영변 핵 단지를 촬영했고, 이는 곧 국제사회에 공개됐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끝내 거부했고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냉전 종식 후 핵확산 방지가 외교정책의 최우선이었던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 전면에 나선 이유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IAEA는 공정하며 우리는 이 기구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 사찰과 관련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고, 그건 앞으로 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에 대한 기구의 공정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히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 특사는 회고록을 통해 북한의 NPT 탈퇴와 핵 개발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밝혔다.

1992년 걸프전 이후의 북한 지도부가 가진 위기감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으로의 권력 승계 시기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이라크의 걸프전에서의 참패는 북한에게는 상당히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아마 핵보유국이 돼야겠다는 그러한 원인 제공을 상당히 했지 않았나 싶고 또 NPT 탈퇴 직전에는 국방위원장직을 김일성으로부터 물려받는 상태에서 당시 김정일이 상당히 우려했던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을 완전 장악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군을 뭔가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뭔가 NPT 탈퇴라든지 그런 위기를 조성한 국면이 있다고 봐야겠죠."]

이후 1994년, 남북 실무회담 중 나온 북한 대표단의 ‘불바다’ 발언.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다행히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또 한 번 극적 전환점을 맞았다.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북한 주석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 역시 훗날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김일성 주석이 모든 사안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핵문제를 상세히 토론했다고 밝힌 것이다.

북한과의 갈등을 협상을 통해 풀어낸 새로운 접근이었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북한이 필요한 여러 가지 어떤 물자들을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문제가 제네바 합의를 위하는 것도 초안 안에 다 들어가 있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런 협상 카드를 들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협상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판단할 수 있거든요.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결국 일 년 정도 끌고 오던 한반도의 전쟁 분위기, 위기상황, 제1차 북핵 위기의 엄청난 영향을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이후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북-미 제네바 합의를 도출했다.

[로버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제네바 합의로 잠시 가라앉았던 북미 갈등은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다시 폭발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 : "(2002년 국정연설)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이라크 이란 북한을 WMD를 보유하고 운반 체계를 보유하고 따라서 핵위협이라든지 핵미사일 위협, 또는 핵 확산으로 인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그런 국가들이다 이렇게 정했던 것이고 이러한 미국의 WMD나 핵테러 중심의 안보 정책은 9.11 테러를 통해 더 가속화가 된 것이죠."]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고 판단,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미국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 제기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맞섰고, 미국은 북한에 중유 50만 톤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재개했다.

제네바 합의 체제는 붕괴됐고, 갈등은 다시 고조됐다.

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자 북-미는 6자회담을 통해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당시 미국과 북한의 대표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었다.

[크리스토퍼 힐/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경수로가 협상 테이블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김계관/당시 북한 수석대표 : "미국이 이 휴회 기간에 우리가 어떠한 핵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바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음번 회담 진전의 열쇠입니다."]

두 사람은 기존의 북-미 기싸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9.19 공동 성명의 최종 타결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할 것을, 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았다.

그리고 2008년 6월,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이후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선언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결국 북핵 검증의 지속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거대한 이벤트를 벌이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냉각탑 폭파한다고 해서 영변 핵시설장이 완전히 폐쇄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갔다는 것, 그리고 그걸 통해서 뭔가 국제사회에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보여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북한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그러한 이벤트였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 북미간 협상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이 아니냐."]

볼턴의 회고록은 북미는 물론 남과 북, 한미 관계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북미 회담을 이끌었던 미국 인사들도 북핵 전문가들도 북미 관계를 이어갈 방법에는 공통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바로 긴밀한 협력과 지속적인 대화다.

[크리스토퍼 힐/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우리는 북한에게 핵을 지닌 미래보다 비핵화한 미래가 더 긍정적이라는 것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비핵화 과정에서는 미국이 북한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도발하지 않습니다. 핵실험도 하지 않고 미사일 실험도 하지 않고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까 협상은 계속되는 게 좋다고 보고 서로에게 크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면 북핵 문제에 아주 완벽하게 접근하지 않는 피상적인 조치라도 합의를 하고 다음 협상을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동안 북미 대화는 긴장 고조와 극적 합의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돌아 왔다.

희망으로 시작돼 소득 없이 끝난 북미 회담에서 여전히 극명한 입장차를 확인시켜 준 볼턴의 회고록.

회고록을 둘러싼 논란을 떠나, 이번 회고록이 진정성과 정교함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북미 대화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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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볼턴 회고록 파장…북미 외교 30년
    • 입력 2020-07-04 08:23:40
    • 수정2020-07-04 08:32:02
    남북의 창
[앵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북미협상에 대한 진실 공방이 뜨겁습니다.

북미 외교가 본격화 된 지 30년, 북미대화 테이블에 앉은 미국 인사 중 가장 큰 논란을 낳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역대 북미대화 임했던 미국 인사들은 어떠한 관점으로 북한을, 또 한반도를 바라 봤을까요?

클로즈업 북한이 북미대화 30년의 이면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두 정상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했다.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8개월만.

다소 긴장되고 굳은 표정이 포착되기도 했지만 두 정상은 최선을 다해 회담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2019년 2월 :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그런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2019년 2월 : "저는 북한이 엄청난 경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그러한 성공을 계속 보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고 그렇게 되도록 돕고 싶습니다."]

호텔 정원을 함께 산책하면서 밝게 웃는 두 정상과 참모들의 모습, 그리고 비핵화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대답까지 하면서 회담 타결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고조됐다.

["(김위원장님 비핵화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들었습니까? 최고의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은 회담장의 분위기.

그러나 그 사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계속 써 내려 가는 한 남자.

바로 존 볼턴 당시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다.

["비핵화를 위해서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할 결심이 되어 있습니까?"]

주요 질문마다 볼턴의 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후 희망으로 시작된 하노이 회담은 결렬이라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리고 1년 4개월 뒤, 볼턴은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이유를 회고록을 통해 폭로했다.

그는 모호한 비핵화 성명만 담은 합의문 초안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예기치 못한 양보를 막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레이건 대통령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영상을 보여줬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장거리 미사일 제거를 할 수 있겠냐고 제안했을 때는 핵-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전부에 대한 기본적인 신고가 필요하다며 두 정상의 대화에 끼어들었음을 고백했다.

그 밖에도 전혀 좁혀지지 않았던 두 정상의 의견차와 정교하지도 않았던 회담 등을 언급하며 북미 회담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한 볼턴의 회고록.

그러나 전문가들은 볼턴의 회고록을 두고 날 선 공방만 벌일 것이 아니라 그 기록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데는 서로의 협상 카드에 대한 완벽한 무지 때문에 나왔던 거라고 보거든요. 북한은 자기들이 준비한 협상 카드를 가지고 충분히 미국과 협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은 그 협상 카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 있잖아요. 그러면 볼턴 회고록은 결국 양쪽의 생각을 접근 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북미 회담이 본격화된 것은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부터다.

1989년. 프랑스 위성 ‘스팟 2호’가 북한의 영변 핵 단지를 촬영했고, 이는 곧 국제사회에 공개됐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끝내 거부했고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냉전 종식 후 핵확산 방지가 외교정책의 최우선이었던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 전면에 나선 이유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IAEA는 공정하며 우리는 이 기구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 사찰과 관련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고, 그건 앞으로 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에 대한 기구의 공정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히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 특사는 회고록을 통해 북한의 NPT 탈퇴와 핵 개발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밝혔다.

1992년 걸프전 이후의 북한 지도부가 가진 위기감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으로의 권력 승계 시기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이라크의 걸프전에서의 참패는 북한에게는 상당히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아마 핵보유국이 돼야겠다는 그러한 원인 제공을 상당히 했지 않았나 싶고 또 NPT 탈퇴 직전에는 국방위원장직을 김일성으로부터 물려받는 상태에서 당시 김정일이 상당히 우려했던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을 완전 장악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군을 뭔가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뭔가 NPT 탈퇴라든지 그런 위기를 조성한 국면이 있다고 봐야겠죠."]

이후 1994년, 남북 실무회담 중 나온 북한 대표단의 ‘불바다’ 발언.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다행히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또 한 번 극적 전환점을 맞았다.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북한 주석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 역시 훗날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김일성 주석이 모든 사안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핵문제를 상세히 토론했다고 밝힌 것이다.

북한과의 갈등을 협상을 통해 풀어낸 새로운 접근이었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북한이 필요한 여러 가지 어떤 물자들을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문제가 제네바 합의를 위하는 것도 초안 안에 다 들어가 있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런 협상 카드를 들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협상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판단할 수 있거든요.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결국 일 년 정도 끌고 오던 한반도의 전쟁 분위기, 위기상황, 제1차 북핵 위기의 엄청난 영향을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이후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북-미 제네바 합의를 도출했다.

[로버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제네바 합의로 잠시 가라앉았던 북미 갈등은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다시 폭발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 : "(2002년 국정연설)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이라크 이란 북한을 WMD를 보유하고 운반 체계를 보유하고 따라서 핵위협이라든지 핵미사일 위협, 또는 핵 확산으로 인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그런 국가들이다 이렇게 정했던 것이고 이러한 미국의 WMD나 핵테러 중심의 안보 정책은 9.11 테러를 통해 더 가속화가 된 것이죠."]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고 판단,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미국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 제기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맞섰고, 미국은 북한에 중유 50만 톤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재개했다.

제네바 합의 체제는 붕괴됐고, 갈등은 다시 고조됐다.

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자 북-미는 6자회담을 통해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당시 미국과 북한의 대표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었다.

[크리스토퍼 힐/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경수로가 협상 테이블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김계관/당시 북한 수석대표 : "미국이 이 휴회 기간에 우리가 어떠한 핵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바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음번 회담 진전의 열쇠입니다."]

두 사람은 기존의 북-미 기싸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9.19 공동 성명의 최종 타결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할 것을, 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았다.

그리고 2008년 6월,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이후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선언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결국 북핵 검증의 지속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거대한 이벤트를 벌이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냉각탑 폭파한다고 해서 영변 핵시설장이 완전히 폐쇄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갔다는 것, 그리고 그걸 통해서 뭔가 국제사회에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보여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북한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그러한 이벤트였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 북미간 협상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이 아니냐."]

볼턴의 회고록은 북미는 물론 남과 북, 한미 관계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북미 회담을 이끌었던 미국 인사들도 북핵 전문가들도 북미 관계를 이어갈 방법에는 공통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바로 긴밀한 협력과 지속적인 대화다.

[크리스토퍼 힐/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우리는 북한에게 핵을 지닌 미래보다 비핵화한 미래가 더 긍정적이라는 것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비핵화 과정에서는 미국이 북한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김진무/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도발하지 않습니다. 핵실험도 하지 않고 미사일 실험도 하지 않고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까 협상은 계속되는 게 좋다고 보고 서로에게 크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면 북핵 문제에 아주 완벽하게 접근하지 않는 피상적인 조치라도 합의를 하고 다음 협상을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동안 북미 대화는 긴장 고조와 극적 합의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돌아 왔다.

희망으로 시작돼 소득 없이 끝난 북미 회담에서 여전히 극명한 입장차를 확인시켜 준 볼턴의 회고록.

회고록을 둘러싼 논란을 떠나, 이번 회고록이 진정성과 정교함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북미 대화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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