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도시 부산이라지만, 근대건축은 매번 헐리는 중

입력 2020.07.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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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철거 전(출처: 부산일보 자료사진), 우/ 철거 후 신축 공사

좌/ 철거 전(출처: 부산일보 자료사진), 우/ 철거 후 신축 공사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됐다던 동래 근대 건조물, 하룻밤 사이 철거됐다.

우리나라 제2 도시 부산은 그 특성에 따라 다양한 별칭으로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대 항만도시가 대표적입니다.

좀 낯설지만 '근대도시'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일제가 부산을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해안을 메웠고 그 자리엔 철도, 항만, 물류창고 등 근대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부산에만 근대건조물 219개가 자리했고, 이들은 대부분 일본 고관이 살던 곳이거나 부산의 인적, 물적 수탈을 위해 세워진 관리 감독 기관 역할을 한 곳들입니다.

이 때문에 보존과 기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도 있지만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현장으로 위상이 정립된 근대건축물들도 상당하므로 보존과 기록을 통해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조물의 하나가 동래구 온천동의 서양풍 가옥, 이른바 권호성 별장입니다(이 건물이 한 중견기업 창업자 아들인 권호성의 별장이라 이렇게 불립니다).

1936년 건립 이후 일본인 히가시하라 가지로의 별장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당시 일본인들의 별장지로 개발됐던 '동래별장'과 함께 중요한 근대건축물로 꼽혔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서양식 외양에 내부는 일식 가옥 구조를 지닌 독특한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별장은 2016년 1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신축 건물 공사 현장으로 뒤바뀌었습니다. 별장과 함께 있던 고려 5층 석탑은 경기도의 사유지로 옮겨간 상태입니다.

인근 주민은 취재진에게 밤에 가림막이 설치되더니, 다음 날 별장이 사라지고 없었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권호성 별장을 포함해 사라진 부산의 근대건조물은 44곳이나 됩니다.

(좌/ 대저 수리조합 공사 기념비, 우/ 대저 수리조합 사무동)(좌/ 대저 수리조합 공사 기념비, 우/ 대저 수리조합 사무동)

잠시만요! 또 철거하게요?.. 항일농민의 역사지라고요.

사라진 동래구의 권호성 별장과 함께, 강서구에도 중요한 근대건조물이 있습니다. 바로 대저 수리조합입니다.

작고 허름한 사무실과 창고로 보이는 이곳은 사실, 일제의 한국 농민 지배와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념적인 곳입니다. 1927년에 건립된 대저 수리조합을 포함해 전국의 수리조합은 산미 증식계획의 하나로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농작물을 효과적으로 빼앗기 위해 설치한 근대 농업 관리 시스템입니다.

짐작할 수 있듯, 물길을 이롭게 한다는 수리(水利)조합은 우리나라 소작농들을 괴롭혔습니다. 수리조합이 일본의 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식민수탈체제의 핵심 기관이었음에도,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은 수리조합 건설비와 물세를 조선 소작농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소작농들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농민운동을 벌였고 그 흔적이 대저 수리조합 기념 비석에도 남아있습니다. 기념비의 글자가 긁혀 지워진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깃든 곳임에도, 부산시와 해당 지역 지자체인 강서구는 대저 수리조합을 헐어버릴 예정입니다. 사무실과 창고로 이뤄진 수리조합이 현재는 ‘강서 도시재생 열린 지원센터’와 ‘문화창고’로 각각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서부산 영상 미디어센터'를 포함한 문화센터와 카페, 금융업소를 입주시키겠다는 겁니다.

이를 알게 된 전문가와 시민들이 반발하자, 강서구는 활용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했지만, 취재 결과 허문다는 계획은 변함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강서구 관계자는 이 건물이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2년에 폭격으로 파괴된 뒤 56년에 새로 지어져 보존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부산시의 조례에 따른 보존 근대건조물 목록에도 없다는 점 등을 철거 이유로 들었습니다.

(좌/민족 자본 설립 한성은행 한국지점이 부산생활문화센터, 한성 1918로 재탄생. 우/김종식 화백 기념관은 대표적 근대건축물이지만 멸실 우려 목록에 올라.)(좌/민족 자본 설립 한성은행 한국지점이 부산생활문화센터, 한성 1918로 재탄생. 우/김종식 화백 기념관은 대표적 근대건축물이지만 멸실 우려 목록에 올라.)

조례 제정 10년 지났지만, 딱 한 곳만 매입한 부산시

부산시는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 건조물을 우선 시 지정 근대건조물로 관리하자는 조례를 2010년 제정했습니다. 당장, 문화재가 아니어서 철거되는 비극을 막고 시 차원에서라도 보호 조치를 하자는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건축물 44곳이 완전히 사라졌고 곳곳에서 근대건조물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부산시의 담당 부서는 대부분 근대건조물이 민간 소유의 사적 재산이라 매입을 위한 설득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산시의 의지와 실행력 부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먼저 부산시는 조례에 따른 기본계획조차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성이 있는 건축물을 지키겠다는 지자체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겁니다.

5년마다 새로 작성되는 기본계획 보고서에는 근대건조물을 보존 상태에 따라 A~D등급으로 나누고 A등급은 구매, D등급은 디지털 복원을 하자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리기 위한 백산기념관 옆에 자리한 '한성 1918'(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한국은행, 구 한성은행 부산지점) 외에 시비로 매입한 A등급 근대건조물은 없습니다.

김기수 동아대 석당박물관장은 "체계적으로 관리, 조사할 체계 수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습니다. 이 내용은 2012년 처음으로 발표된 근대건조물 보호에 관한 기본계획에 이미 제시된 내용입니다. 부산의 근대건조물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호 방안을 고민하는 전담팀을 꾸리자는 말입니다. 조례 제정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보존과 기록의 가치를 되새겨 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떠올려 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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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도시 부산이라지만, 근대건축은 매번 헐리는 중
    • 입력 2020-07-05 09:02:00
    취재K

좌/ 철거 전(출처: 부산일보 자료사진), 우/ 철거 후 신축 공사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됐다던 동래 근대 건조물, 하룻밤 사이 철거됐다.

우리나라 제2 도시 부산은 그 특성에 따라 다양한 별칭으로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대 항만도시가 대표적입니다.

좀 낯설지만 '근대도시'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일제가 부산을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해안을 메웠고 그 자리엔 철도, 항만, 물류창고 등 근대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부산에만 근대건조물 219개가 자리했고, 이들은 대부분 일본 고관이 살던 곳이거나 부산의 인적, 물적 수탈을 위해 세워진 관리 감독 기관 역할을 한 곳들입니다.

이 때문에 보존과 기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도 있지만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현장으로 위상이 정립된 근대건축물들도 상당하므로 보존과 기록을 통해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조물의 하나가 동래구 온천동의 서양풍 가옥, 이른바 권호성 별장입니다(이 건물이 한 중견기업 창업자 아들인 권호성의 별장이라 이렇게 불립니다).

1936년 건립 이후 일본인 히가시하라 가지로의 별장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당시 일본인들의 별장지로 개발됐던 '동래별장'과 함께 중요한 근대건축물로 꼽혔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서양식 외양에 내부는 일식 가옥 구조를 지닌 독특한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별장은 2016년 1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신축 건물 공사 현장으로 뒤바뀌었습니다. 별장과 함께 있던 고려 5층 석탑은 경기도의 사유지로 옮겨간 상태입니다.

인근 주민은 취재진에게 밤에 가림막이 설치되더니, 다음 날 별장이 사라지고 없었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권호성 별장을 포함해 사라진 부산의 근대건조물은 44곳이나 됩니다.

(좌/ 대저 수리조합 공사 기념비, 우/ 대저 수리조합 사무동)
잠시만요! 또 철거하게요?.. 항일농민의 역사지라고요.

사라진 동래구의 권호성 별장과 함께, 강서구에도 중요한 근대건조물이 있습니다. 바로 대저 수리조합입니다.

작고 허름한 사무실과 창고로 보이는 이곳은 사실, 일제의 한국 농민 지배와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념적인 곳입니다. 1927년에 건립된 대저 수리조합을 포함해 전국의 수리조합은 산미 증식계획의 하나로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농작물을 효과적으로 빼앗기 위해 설치한 근대 농업 관리 시스템입니다.

짐작할 수 있듯, 물길을 이롭게 한다는 수리(水利)조합은 우리나라 소작농들을 괴롭혔습니다. 수리조합이 일본의 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식민수탈체제의 핵심 기관이었음에도,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은 수리조합 건설비와 물세를 조선 소작농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소작농들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농민운동을 벌였고 그 흔적이 대저 수리조합 기념 비석에도 남아있습니다. 기념비의 글자가 긁혀 지워진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깃든 곳임에도, 부산시와 해당 지역 지자체인 강서구는 대저 수리조합을 헐어버릴 예정입니다. 사무실과 창고로 이뤄진 수리조합이 현재는 ‘강서 도시재생 열린 지원센터’와 ‘문화창고’로 각각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서부산 영상 미디어센터'를 포함한 문화센터와 카페, 금융업소를 입주시키겠다는 겁니다.

이를 알게 된 전문가와 시민들이 반발하자, 강서구는 활용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했지만, 취재 결과 허문다는 계획은 변함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강서구 관계자는 이 건물이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2년에 폭격으로 파괴된 뒤 56년에 새로 지어져 보존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부산시의 조례에 따른 보존 근대건조물 목록에도 없다는 점 등을 철거 이유로 들었습니다.

(좌/민족 자본 설립 한성은행 한국지점이 부산생활문화센터, 한성 1918로 재탄생. 우/김종식 화백 기념관은 대표적 근대건축물이지만 멸실 우려 목록에 올라.)
조례 제정 10년 지났지만, 딱 한 곳만 매입한 부산시

부산시는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 건조물을 우선 시 지정 근대건조물로 관리하자는 조례를 2010년 제정했습니다. 당장, 문화재가 아니어서 철거되는 비극을 막고 시 차원에서라도 보호 조치를 하자는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건축물 44곳이 완전히 사라졌고 곳곳에서 근대건조물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부산시의 담당 부서는 대부분 근대건조물이 민간 소유의 사적 재산이라 매입을 위한 설득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산시의 의지와 실행력 부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먼저 부산시는 조례에 따른 기본계획조차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성이 있는 건축물을 지키겠다는 지자체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겁니다.

5년마다 새로 작성되는 기본계획 보고서에는 근대건조물을 보존 상태에 따라 A~D등급으로 나누고 A등급은 구매, D등급은 디지털 복원을 하자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리기 위한 백산기념관 옆에 자리한 '한성 1918'(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한국은행, 구 한성은행 부산지점) 외에 시비로 매입한 A등급 근대건조물은 없습니다.

김기수 동아대 석당박물관장은 "체계적으로 관리, 조사할 체계 수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습니다. 이 내용은 2012년 처음으로 발표된 근대건조물 보호에 관한 기본계획에 이미 제시된 내용입니다. 부산의 근대건조물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호 방안을 고민하는 전담팀을 꾸리자는 말입니다. 조례 제정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보존과 기록의 가치를 되새겨 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떠올려 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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