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폭로, 꼭 해야 할까?…그녀는 어린 딸을 봤습니다

입력 2020.07.09 (11:40) 수정 2020.07.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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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밤쉘’ [사진 출처 : ‘목요일 아침’ 제공]

영화 ‘밤쉘’ [사진 출처 : ‘목요일 아침’ 제공]

■ 전 세계 휩쓴 "나도 당했다" 미투 운동의 시작

"우리 사회의 한계로 인해 이런 사건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피고인은, 피고인과 같은 또 다른 권력자들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더 큰 괴물이 될 것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결심공판에서 피해자 김지은의 최후 진술 中)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끌어내린 건 한 여성의 폭로였습니다. '안희정 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 폭탄선언이 결국 가해자를 감옥으로 보냈고, '나도 당했다'(me too)는 미투 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습니다.

영화 '밤쉘'은 이 '미투 운동'의 출발점이 된 실화를 다뤘습니다. 미국 언론계 거물,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는 2016년 자신이 성희롱한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에게 고소당해 결국 추락했습니다. 2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26억 원의 합의금을 줘야 했고 불명예스럽게 대표직에서 물러나 2017년에 생을 마감했죠.

승진을 미끼로 여성들에게 섹스를 요구하고 끊임없이 성희롱을 일삼았던 언론계 거물을 끌어내린 힘, 바로 여성들의 연대였습니다. 해고당한 앵커 그레첸 칼슨이 첫 폭로에 나서자 에일스는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즉각 부인합니다. 그러나 현직 인기 앵커였던 메긴 켈리 등 추가 피해자 20여 명의 증언이 잇따르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폭스뉴스 설립자 로저 에일스. 2017년 별세폭스뉴스 설립자 로저 에일스. 2017년 별세

■ "내가 꼭 나서야 할까?" 주저할 때 잠든 딸을 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의 미덕은 "만국의 여성들이여, 연대하라"는 식의 단순한 선동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칼슨의 첫 폭로에 이어 '나도 당했다'는 목소리를 내기까지, 피해자들이 겪는 갈등을 깊이 있고 섬세하게 묘사해 공감을 이끌어내죠.

전직 앵커가 첫 폭로를 했지만, 과거 같은 피해를 본 현직 앵커 메긴 켈리는 "나도 당했다"고 용기를 내는 일을 주저합니다. 직장 상사인 에일스는 과거 자신을 명백하게 성희롱했지만, 때때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폭로에 나설 경우 평생 자신의 이름 앞에 '성추행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 역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켈리는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트럼프와의 TV토론에서 설전을 벌인 유명 앵커였습니다.

'내가 꼭 나서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던 켈리는 그때 차 뒷좌석에서 세상모르고 평안하게 자고 있는 어린 딸을 잠시 바라봅니다. 몇 초간, 아주 짧은 순간이었죠.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관객들은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침묵하면 내 딸에게도 이 끔찍한 현실이 이어질 거란 생각을 했을 거라는….


켈리가 또 한 번 각성하게 된 순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인 후배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는 켈리를 원망하고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당신은 왜 가만히 있었나요. 이런 성추행이 계속될 거라는 걸 몰랐던 건가요?"

나는 상사의 성희롱에 침묵했고, 살아남았고, 승승장구해 간판 앵커가 됐지만, 내가 침묵했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가 이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될 거란 자각이 켈리를 두 번째 폭로자로 나서게 합니다. "나도 당했다" '미투(me too)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 세 여성이 한자리에 모인 장면은 딱 하나, 엘리베이터에 우연히 같이 탔을 때뿐입니다. 술을 '찐하게' 마시며 동료애를 다지는 선후배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데면데면한, 서로의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내 딸, 다른 여성들에 대한 연대 의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끈끈한 '동지'가 됩니다.


■ 안희정 조문 논란에 '김지은 연대'로 맞서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상가에 여권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문 대통령까지 조화를 보낸 것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도의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피해자 김지은 씨의 고통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성범죄 가해자에게 국민의 혈세로 조화를 보낼 수 있었겠느냐,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정치권이 성범죄자에 대해 유독 관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집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을 담은 책 《김지은입니다》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연대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다시 한 번 '연대의 힘은 강하다'는 영화 '밤쉘'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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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9 11:40:07
    • 수정2020-07-09 14:15:14
    취재K

영화 ‘밤쉘’ [사진 출처 : ‘목요일 아침’ 제공]

■ 전 세계 휩쓴 "나도 당했다" 미투 운동의 시작

"우리 사회의 한계로 인해 이런 사건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피고인은, 피고인과 같은 또 다른 권력자들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더 큰 괴물이 될 것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결심공판에서 피해자 김지은의 최후 진술 中)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끌어내린 건 한 여성의 폭로였습니다. '안희정 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 폭탄선언이 결국 가해자를 감옥으로 보냈고, '나도 당했다'(me too)는 미투 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습니다.

영화 '밤쉘'은 이 '미투 운동'의 출발점이 된 실화를 다뤘습니다. 미국 언론계 거물,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는 2016년 자신이 성희롱한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에게 고소당해 결국 추락했습니다. 2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26억 원의 합의금을 줘야 했고 불명예스럽게 대표직에서 물러나 2017년에 생을 마감했죠.

승진을 미끼로 여성들에게 섹스를 요구하고 끊임없이 성희롱을 일삼았던 언론계 거물을 끌어내린 힘, 바로 여성들의 연대였습니다. 해고당한 앵커 그레첸 칼슨이 첫 폭로에 나서자 에일스는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즉각 부인합니다. 그러나 현직 인기 앵커였던 메긴 켈리 등 추가 피해자 20여 명의 증언이 잇따르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폭스뉴스 설립자 로저 에일스. 2017년 별세
■ "내가 꼭 나서야 할까?" 주저할 때 잠든 딸을 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의 미덕은 "만국의 여성들이여, 연대하라"는 식의 단순한 선동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칼슨의 첫 폭로에 이어 '나도 당했다'는 목소리를 내기까지, 피해자들이 겪는 갈등을 깊이 있고 섬세하게 묘사해 공감을 이끌어내죠.

전직 앵커가 첫 폭로를 했지만, 과거 같은 피해를 본 현직 앵커 메긴 켈리는 "나도 당했다"고 용기를 내는 일을 주저합니다. 직장 상사인 에일스는 과거 자신을 명백하게 성희롱했지만, 때때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폭로에 나설 경우 평생 자신의 이름 앞에 '성추행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 역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켈리는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트럼프와의 TV토론에서 설전을 벌인 유명 앵커였습니다.

'내가 꼭 나서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던 켈리는 그때 차 뒷좌석에서 세상모르고 평안하게 자고 있는 어린 딸을 잠시 바라봅니다. 몇 초간, 아주 짧은 순간이었죠.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관객들은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침묵하면 내 딸에게도 이 끔찍한 현실이 이어질 거란 생각을 했을 거라는….


켈리가 또 한 번 각성하게 된 순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인 후배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는 켈리를 원망하고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당신은 왜 가만히 있었나요. 이런 성추행이 계속될 거라는 걸 몰랐던 건가요?"

나는 상사의 성희롱에 침묵했고, 살아남았고, 승승장구해 간판 앵커가 됐지만, 내가 침묵했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가 이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될 거란 자각이 켈리를 두 번째 폭로자로 나서게 합니다. "나도 당했다" '미투(me too)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 세 여성이 한자리에 모인 장면은 딱 하나, 엘리베이터에 우연히 같이 탔을 때뿐입니다. 술을 '찐하게' 마시며 동료애를 다지는 선후배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데면데면한, 서로의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내 딸, 다른 여성들에 대한 연대 의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끈끈한 '동지'가 됩니다.


■ 안희정 조문 논란에 '김지은 연대'로 맞서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상가에 여권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문 대통령까지 조화를 보낸 것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도의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피해자 김지은 씨의 고통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성범죄 가해자에게 국민의 혈세로 조화를 보낼 수 있었겠느냐,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정치권이 성범죄자에 대해 유독 관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집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을 담은 책 《김지은입니다》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연대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다시 한 번 '연대의 힘은 강하다'는 영화 '밤쉘'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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