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순간] 오케스트라의 ‘양념’, 객석까지 진출하다

입력 2020.07.1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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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과 수석객원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는 지난 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연주했습니다. 위에서 보신 영상은 이날 연주된 '전원 교향곡'의 4악장 일부입니다.

베토벤은 심각한 청력 이상을 감지한 직후 한때 자살까지 결심하지만, 하일리겐슈타트와 바덴 등 빈 외곽의 시골에 머물며 삶의 의욕을 회복합니다. 39살에 작곡을 마친 6번 교향곡에 스스로 '전원 교향곡 혹은 시골 생활의 회상'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가운데 4악장은 부제가 '폭풍우'인데, 말 그대로 전원에 불어닥친 맹렬한 폭풍우를 묘사했습니다.

첼로와 베이스의 트레몰로에 이어 바이올린의 불안정한 화성이 불길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팀파니의 타격으로 폭풍의 시작을 알립니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음악이 극적인 반전을 맞는 순간입니다. 현과 목관이 잇단 16분음표 악절로 긴박함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팀파니의 연타가 모든 악기의 소리를 압도합니다. 타악기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존재감을 과시한 셈입니다.


이날 공연에서 팀파니를 연주한 서울시향 객원 타악기 주자 아드리앙 풰리숑은 팀파니의 역할에 대해 "음색과 리듬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화음을 극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흔히 타악기는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오해하지만, 풰리숑은 "팀파니도 화음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며 "특히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각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악기"라고도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타악기가 음악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멜로디를 노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타악기의 역할이 단지 흥을 돋우는 데 그치는 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전원 교향곡'에서 본 것처럼 타악기가 없으면 표현할 수 없는 주제의식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음악도 있습니다. 심지어 무대뿐 아니라 객석까지 점령했습니다. 같은 날 서울시향이 연주한 헝가리 출신의 현대음악가 죄르지 쿠르탁의 '환상곡 풍으로'입니다.

피아노와 10여 종의 타악기가 주도하는 이 음악은 영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연주자들이 한 데 모여있지 않고, 무대와 객석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분리된 공간에서 연주하는 다양한 타악기가 콘서트홀 전체를 감싸며 입체적인 음향으로 다가오는데, 화성과 선율이 주는 안정감은 없지만, 몽환적이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타악기 하면 흔히 떠올리는 팀파니, 심벌즈, 북 뿐 아니라 마림바, 하모니카,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벨소리, 심지어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곳곳에서 깜짝 등장하는 이 음악, 가히 '타악기 열전'이라 부를 만합니다.


타악기 연주자들은 자신을 음식의 '양념'에 비유합니다. 서울시향 타악기 주자 김미연은 "음식에 양념이 없으면 절대 맛이 날 수 없듯, 타악기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오케스트라에 없어서는 안 될 '주연급 조연'이라고 자평한 셈입니다.

타악기의 분량이 적기 때문에 연주하기는 더 편할 것이란 오해도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곡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면서 "다른 주자들과 똑같이 악보를 공부해서 연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타악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입니다. 원초적인 감정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자극하는 소리가 또 있을까요. 우리에게 가장 쉽게 말을 걸기 때문에 더 친숙하지만, 그래서 더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대에서조차 거리 두기가 적용되고 있는 코로나 시대, 연주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다른 악기와 달리 타악기는 여전히 굳건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양념처럼, 음악의 맛을 좌우하는 타악기에 집중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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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6 0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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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과 수석객원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는 지난 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연주했습니다. 위에서 보신 영상은 이날 연주된 '전원 교향곡'의 4악장 일부입니다.

베토벤은 심각한 청력 이상을 감지한 직후 한때 자살까지 결심하지만, 하일리겐슈타트와 바덴 등 빈 외곽의 시골에 머물며 삶의 의욕을 회복합니다. 39살에 작곡을 마친 6번 교향곡에 스스로 '전원 교향곡 혹은 시골 생활의 회상'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가운데 4악장은 부제가 '폭풍우'인데, 말 그대로 전원에 불어닥친 맹렬한 폭풍우를 묘사했습니다.

첼로와 베이스의 트레몰로에 이어 바이올린의 불안정한 화성이 불길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팀파니의 타격으로 폭풍의 시작을 알립니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음악이 극적인 반전을 맞는 순간입니다. 현과 목관이 잇단 16분음표 악절로 긴박함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팀파니의 연타가 모든 악기의 소리를 압도합니다. 타악기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존재감을 과시한 셈입니다.


이날 공연에서 팀파니를 연주한 서울시향 객원 타악기 주자 아드리앙 풰리숑은 팀파니의 역할에 대해 "음색과 리듬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화음을 극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흔히 타악기는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오해하지만, 풰리숑은 "팀파니도 화음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며 "특히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각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악기"라고도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타악기가 음악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멜로디를 노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타악기의 역할이 단지 흥을 돋우는 데 그치는 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전원 교향곡'에서 본 것처럼 타악기가 없으면 표현할 수 없는 주제의식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음악도 있습니다. 심지어 무대뿐 아니라 객석까지 점령했습니다. 같은 날 서울시향이 연주한 헝가리 출신의 현대음악가 죄르지 쿠르탁의 '환상곡 풍으로'입니다.

피아노와 10여 종의 타악기가 주도하는 이 음악은 영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연주자들이 한 데 모여있지 않고, 무대와 객석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분리된 공간에서 연주하는 다양한 타악기가 콘서트홀 전체를 감싸며 입체적인 음향으로 다가오는데, 화성과 선율이 주는 안정감은 없지만, 몽환적이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타악기 하면 흔히 떠올리는 팀파니, 심벌즈, 북 뿐 아니라 마림바, 하모니카,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벨소리, 심지어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곳곳에서 깜짝 등장하는 이 음악, 가히 '타악기 열전'이라 부를 만합니다.


타악기 연주자들은 자신을 음식의 '양념'에 비유합니다. 서울시향 타악기 주자 김미연은 "음식에 양념이 없으면 절대 맛이 날 수 없듯, 타악기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오케스트라에 없어서는 안 될 '주연급 조연'이라고 자평한 셈입니다.

타악기의 분량이 적기 때문에 연주하기는 더 편할 것이란 오해도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곡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면서 "다른 주자들과 똑같이 악보를 공부해서 연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타악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입니다. 원초적인 감정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자극하는 소리가 또 있을까요. 우리에게 가장 쉽게 말을 걸기 때문에 더 친숙하지만, 그래서 더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대에서조차 거리 두기가 적용되고 있는 코로나 시대, 연주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다른 악기와 달리 타악기는 여전히 굳건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양념처럼, 음악의 맛을 좌우하는 타악기에 집중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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