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95세 나치 경비원에게 살인 책임 묻는 독일

입력 2020.07.16 (10:29) 수정 2020.07.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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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

독일이 나치 경비원 출신의 90대 남성을 또다시 법정에 세웠다. 독일 서부 부퍼탈 지방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올해 95세 남성이 수백 건의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돼 재판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남성이 수용소 경비원으로 일할 때 나이는 19세. 1939년 폴란드 그단스크 인근에 세워진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6만여 명이 희생됐다.

경비원 출신 90대 노인 잇따라 법정에

같은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다른 90대 남성도 지난해부터 함부르크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브루노 다이라는 이름의 94세 남성으로, 17세였던 1944년부터 9개월 동안 경비원으로 일했다. 다이 씨는 최소 5,230건의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됐는데, 5,230은 다이 씨가 수용소에서 일한 기간 살해된 유대인 수감자 수라고 한다. 검찰은 지난 6일 다이 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재판에 출석하는 라인홀트 한닝(EPA)재판에 출석하는 라인홀트 한닝(EPA)

2016년엔 94세 라인홀트 한닝 씨가 살인 방조 혐의로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닝 씨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년 6개월 동안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나치 전범수사 중앙본부의 주임 검사는 "단 한 사람의 나치 전범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가 100세일지라도 끝까지 우리의 조사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비원에 실형 선고…직접 증거 없어도 처벌 가능

나치 범죄에 대한 독일의 엄정한 단죄는 2011년 뮌헨 법원 판결이 계기가 됐다. 뮌헨 법원은 폴란드 소비보르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당시 91세 존 뎀얀유크 씨에게 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2012년 항소심 진행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최종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이 판결은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법원은 "수용소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행위를 지켜본 것도 살인 방조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전까지 독일은 전범 처벌 범위를 학살 또는 가혹 행위 등에 직접 가담한 범죄자로 제한했지만, 이 판결 이후로 직접 살해에 가담한 증거가 없어도 전범으로 체포하거나 기소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5년형을 선고받은 뎀얀유크 씨에 대한 증거는 수용소 경비원 인사기록 카드가 유일했다.

전쟁 후 지속된 전범 처벌

뉘른베르크 재판(APA/AFP)뉘른베르크 재판(APA/AFP)

2차대전이 끝나고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이뤄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독일군과 정부기관의 나치 지도자 24명이 기소돼 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독일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분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왔다.

서독에서는 1956년까지 연합군의 동의를 얻어 전쟁 범죄자에 대한 기소를 진행했고, 이후엔 동의 절차 없이 전범자를 기소했다. 주로 수용소에서 수감자에 대한 살해 명령을 지시하고 집행한 사람들이 재판을 받았다. 이 기간에 1,865명이 기소돼 620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전쟁 기간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는 1965년 이후 여러 차례 연장되다가 1979년엔 아예 공소시효가 없어졌다. 1945년부터 2005년까지 36,393건의 사건에 대해 172,294명이 기소됐고, 그중 6,65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독에서도 1964년 나치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이 도입됐다. 1968년 형법 개정 때는 나치 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과 형량을 구체화해, 1989년까지 만여 명을 기소했다.

"전범 처벌엔 시효가 없다"…강력한 과거사 청산 의지

부헨발트 수용소 생체실험실부헨발트 수용소 생체실험실

올해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지 75주년이 된다. 필자는 지난 2월 독일 바이마르 인근에서 운영됐던 부헨발트 수용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시체 공장'이라 불린 이곳에서는 유대인과 정치범 등 28만여 명이 수감돼 5만 6천여 명이 강제노역과 굶주림, 고문 등으로 사망했다. 이곳을 포함해 전쟁 기간 희생된 유대인 숫자는 6백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희생을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연관 기사] “나치 잔혹사도 교훈으로”…독일 최대 강제수용소

10대 시절 불과 몇 달 동안의 경비 업무 수행에 책임을 물어, 무려 70여 년이 지나 지금은 거동조차 힘든 90대 노인에 대해 잇따라 실형을 선고하는 독일 법원…과하다 싶을 정도의 처벌에 독일 사회 일부에서도 반론이 있다. 판결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경비 업무에 대한 처벌치고는 과도한 형량을 부과한다는 지적 등이다.

하지만 공소시효를 없애면서까지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7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혐의가 드러나면 가차 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독일 정부의 태도에서 분명하고도 강력한 과거사 청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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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6 10:29:26
    • 수정2020-07-16 10:38:13
    특파원 리포트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

독일이 나치 경비원 출신의 90대 남성을 또다시 법정에 세웠다. 독일 서부 부퍼탈 지방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올해 95세 남성이 수백 건의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돼 재판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남성이 수용소 경비원으로 일할 때 나이는 19세. 1939년 폴란드 그단스크 인근에 세워진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6만여 명이 희생됐다.

경비원 출신 90대 노인 잇따라 법정에

같은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다른 90대 남성도 지난해부터 함부르크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브루노 다이라는 이름의 94세 남성으로, 17세였던 1944년부터 9개월 동안 경비원으로 일했다. 다이 씨는 최소 5,230건의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됐는데, 5,230은 다이 씨가 수용소에서 일한 기간 살해된 유대인 수감자 수라고 한다. 검찰은 지난 6일 다이 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재판에 출석하는 라인홀트 한닝(EPA)
2016년엔 94세 라인홀트 한닝 씨가 살인 방조 혐의로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닝 씨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년 6개월 동안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나치 전범수사 중앙본부의 주임 검사는 "단 한 사람의 나치 전범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가 100세일지라도 끝까지 우리의 조사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비원에 실형 선고…직접 증거 없어도 처벌 가능

나치 범죄에 대한 독일의 엄정한 단죄는 2011년 뮌헨 법원 판결이 계기가 됐다. 뮌헨 법원은 폴란드 소비보르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당시 91세 존 뎀얀유크 씨에게 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2012년 항소심 진행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최종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이 판결은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법원은 "수용소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행위를 지켜본 것도 살인 방조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전까지 독일은 전범 처벌 범위를 학살 또는 가혹 행위 등에 직접 가담한 범죄자로 제한했지만, 이 판결 이후로 직접 살해에 가담한 증거가 없어도 전범으로 체포하거나 기소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5년형을 선고받은 뎀얀유크 씨에 대한 증거는 수용소 경비원 인사기록 카드가 유일했다.

전쟁 후 지속된 전범 처벌

뉘른베르크 재판(APA/AFP)
2차대전이 끝나고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이뤄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독일군과 정부기관의 나치 지도자 24명이 기소돼 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독일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분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왔다.

서독에서는 1956년까지 연합군의 동의를 얻어 전쟁 범죄자에 대한 기소를 진행했고, 이후엔 동의 절차 없이 전범자를 기소했다. 주로 수용소에서 수감자에 대한 살해 명령을 지시하고 집행한 사람들이 재판을 받았다. 이 기간에 1,865명이 기소돼 620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전쟁 기간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는 1965년 이후 여러 차례 연장되다가 1979년엔 아예 공소시효가 없어졌다. 1945년부터 2005년까지 36,393건의 사건에 대해 172,294명이 기소됐고, 그중 6,65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독에서도 1964년 나치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이 도입됐다. 1968년 형법 개정 때는 나치 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과 형량을 구체화해, 1989년까지 만여 명을 기소했다.

"전범 처벌엔 시효가 없다"…강력한 과거사 청산 의지

부헨발트 수용소 생체실험실
올해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지 75주년이 된다. 필자는 지난 2월 독일 바이마르 인근에서 운영됐던 부헨발트 수용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시체 공장'이라 불린 이곳에서는 유대인과 정치범 등 28만여 명이 수감돼 5만 6천여 명이 강제노역과 굶주림, 고문 등으로 사망했다. 이곳을 포함해 전쟁 기간 희생된 유대인 숫자는 6백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희생을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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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 불과 몇 달 동안의 경비 업무 수행에 책임을 물어, 무려 70여 년이 지나 지금은 거동조차 힘든 90대 노인에 대해 잇따라 실형을 선고하는 독일 법원…과하다 싶을 정도의 처벌에 독일 사회 일부에서도 반론이 있다. 판결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경비 업무에 대한 처벌치고는 과도한 형량을 부과한다는 지적 등이다.

하지만 공소시효를 없애면서까지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7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혐의가 드러나면 가차 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독일 정부의 태도에서 분명하고도 강력한 과거사 청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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