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대신 중고거래 사기꾼 잡은 시민…‘집념의 추적기’

입력 2020.07.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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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 장난감 30만 원어치가 올라왔습니다. 세 아이의 아빠인 박중원 씨는 저렴하게 살 수 있겠다 싶어 혹했습니다. 중고거래 사기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의심하진 않았습니다. 거래자가 신분증은 물론 신분증에 적힌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 심지어 편의점 택배 송장 사진까지 보내줬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던 택배는커녕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사기였습니다. 지난 7월 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이진 않았습니다. 박 씨는 "당시 경찰은 전형적인 중고거래 사기이고 계좌 추적해봤자 대포 통장이라 잡기 쉽지 않을 거다, 이런 애들은 다 해외에 있다고 말하더라"라며 "관련 증거를 제출한다고 해도 배정 전이니 사건 배정되고 나서 다시 제출하라더라"라고 했습니다. 나쁜 경험 했다 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 씨는 스스로 잡기로 했습니다.

'그놈' 잡기 위해 5시간 동안 편의점 돌며 택배 송장 뽑아

박 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피해자 5명과 채팅방을 만들어 자료를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장 번호는 다르지만, 그 밑에 있는 '코드번호'가 다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은 같은 편의점에서 보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분증과 택배 송장 코드번호를 근거로 해당 지역 편의점들을 5시간 넘게 돌아다녔습니다. 편의점에서 뽑아본 택배 송장이 차 한 편에 수북이 쌓일 정도였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사기꾼 '그놈'이 68만 원짜리 휴대전화기를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박 씨는 '그놈'에게 휴대전화기를 사겠다고 연락했습니다. 역시나 '그놈'은 신분증과 계좌번호는 물론 택배 송장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박 씨는 '그놈'이 어디에서 택배를 보내는지 추적하기 위해 택배 영수증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놈'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부러 흔들리게 찍어 초점이 나간 영수증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박 씨는 굴하지 않고 "영수증을 제대로 한 번만 찍어서 보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제야 '그놈'은 찢어버린 영수증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찢어지고 초점 나간 영수증 사진 보며 편의점 전화번호 알아내


박 씨는 초점이 나간 영수증과 찢어진 영수증에서 전화번호를 조합해 3~4곳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연결이 안 되거나 없는 번호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편의점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평택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편의점이었습니다.

박 씨는 일단 '그놈'에게 "다른 사람과 직거래하기로 한 게 불발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여지를 남기고 즉시 평택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편의점에서 택배 송장을 뽑아봤습니다. 코드 번호가 일치했습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영수증 결제 시간대에 취소된 영수증이 있느냐고 물으니 있다며 확인을 해줬습니다.

박 씨는 '그놈'에게 다시 연락했습니다. '다른 거래가 불발됐다, 다시 휴대전화 사고 싶다, 돈을 5만 원 더 줄 테니 거래하자'고 꾀었습니다. 3시간 설득 끝에 한 남성이 편의점으로 다가왔습니다. 편의점 밖에서 그를 계속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뒤를 밟았습니다. 그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갈 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가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아닌 중간책에 불과했던 겁니다. 박 씨에게 전화를 걸고 사기를 치는 '그놈'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간책인 차 모 씨가 박 씨 같은 피해자에게 돈을 받으면 4를 가지고 6을 '그놈'에게 보내는 구조였습니다.


박 씨는 중간책 차 씨를 설득했습니다. "사기 치려고 하지 않았냐"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평택경찰서에서 들은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박 씨가 실제 입금을 하지 않았고,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차 씨에게 접근했다 보니 사기나 사기 미수, 사기 방조 등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경찰이 판단이었습니다. "사실상 함정수사를 했기 때문에 차 씨를 처벌하기 힘들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좌절할 만도 했지만,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퀵 기사 쫓아가 '그놈' 검거...잡고 보니 고등학생

박 씨는 차 씨를 설득해 '그놈'에게 연락하게 했습니다. 돈을 받았는데 무통장 입금이 힘드니 퀵을 보내주면 현금을 보내겠다고 한 겁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박 씨는 ATM에서 68만 원을 뽑아 사진까지 보내줬습니다. '그놈'은 퀵을 보내왔습니다. 퀵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놈' 연락처를 보여줬습니다. 퀵 기사가 받은 연락처와 박 씨에게 연락해 사기를 친 번호가 일치했습니다.

박 씨는 다시 경찰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퀵 배달지까지 동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경찰과 박 씨는 퀵 기사를 따라갔습니다. 퀵 배달은 서울 서초구의 한 독서실 건물 앞에 섰습니다. 어려 보이는 남성이 건물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퀵 기사에게 상자를 받고 그 자리에서 뜯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경찰이 둘러쌌습니다. 그때 박 씨는 '그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 진동이 울렸습니다.

경찰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자 '그놈'은 학생증을 꺼냈습니다. '그놈'은 17살 고등학생 이 모 씨였습니다. 학생증 속 이름은 중간책인 차 씨가 무통장 입금을 하려고 했던 계좌명과 일치했습니다. 시민인 박 씨가 집념을 갖고 추적해 3일도 안 돼 '그놈'을 잡은 겁니다.

현재 경기 평택경찰서는 이 씨를 사기 혐의로 입건해 불구속 수사 중입니다. 박 씨는 "경찰이 바쁜 것은 알지만 '대포통장이나 해외로 송금하는 계좌이니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 내리지 않고 소액의 중고거래 사건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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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 대신 중고거래 사기꾼 잡은 시민…‘집념의 추적기’
    • 입력 2020-07-26 10:05:59
    취재K
지난달 27일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 장난감 30만 원어치가 올라왔습니다. 세 아이의 아빠인 박중원 씨는 저렴하게 살 수 있겠다 싶어 혹했습니다. 중고거래 사기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의심하진 않았습니다. 거래자가 신분증은 물론 신분증에 적힌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 심지어 편의점 택배 송장 사진까지 보내줬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던 택배는커녕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사기였습니다. 지난 7월 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이진 않았습니다. 박 씨는 "당시 경찰은 전형적인 중고거래 사기이고 계좌 추적해봤자 대포 통장이라 잡기 쉽지 않을 거다, 이런 애들은 다 해외에 있다고 말하더라"라며 "관련 증거를 제출한다고 해도 배정 전이니 사건 배정되고 나서 다시 제출하라더라"라고 했습니다. 나쁜 경험 했다 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 씨는 스스로 잡기로 했습니다.

'그놈' 잡기 위해 5시간 동안 편의점 돌며 택배 송장 뽑아

박 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피해자 5명과 채팅방을 만들어 자료를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장 번호는 다르지만, 그 밑에 있는 '코드번호'가 다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은 같은 편의점에서 보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분증과 택배 송장 코드번호를 근거로 해당 지역 편의점들을 5시간 넘게 돌아다녔습니다. 편의점에서 뽑아본 택배 송장이 차 한 편에 수북이 쌓일 정도였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사기꾼 '그놈'이 68만 원짜리 휴대전화기를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박 씨는 '그놈'에게 휴대전화기를 사겠다고 연락했습니다. 역시나 '그놈'은 신분증과 계좌번호는 물론 택배 송장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박 씨는 '그놈'이 어디에서 택배를 보내는지 추적하기 위해 택배 영수증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놈'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부러 흔들리게 찍어 초점이 나간 영수증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박 씨는 굴하지 않고 "영수증을 제대로 한 번만 찍어서 보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제야 '그놈'은 찢어버린 영수증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찢어지고 초점 나간 영수증 사진 보며 편의점 전화번호 알아내


박 씨는 초점이 나간 영수증과 찢어진 영수증에서 전화번호를 조합해 3~4곳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연결이 안 되거나 없는 번호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편의점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평택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편의점이었습니다.

박 씨는 일단 '그놈'에게 "다른 사람과 직거래하기로 한 게 불발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여지를 남기고 즉시 평택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편의점에서 택배 송장을 뽑아봤습니다. 코드 번호가 일치했습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영수증 결제 시간대에 취소된 영수증이 있느냐고 물으니 있다며 확인을 해줬습니다.

박 씨는 '그놈'에게 다시 연락했습니다. '다른 거래가 불발됐다, 다시 휴대전화 사고 싶다, 돈을 5만 원 더 줄 테니 거래하자'고 꾀었습니다. 3시간 설득 끝에 한 남성이 편의점으로 다가왔습니다. 편의점 밖에서 그를 계속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뒤를 밟았습니다. 그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갈 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가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아닌 중간책에 불과했던 겁니다. 박 씨에게 전화를 걸고 사기를 치는 '그놈'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간책인 차 모 씨가 박 씨 같은 피해자에게 돈을 받으면 4를 가지고 6을 '그놈'에게 보내는 구조였습니다.


박 씨는 중간책 차 씨를 설득했습니다. "사기 치려고 하지 않았냐"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평택경찰서에서 들은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박 씨가 실제 입금을 하지 않았고,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차 씨에게 접근했다 보니 사기나 사기 미수, 사기 방조 등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경찰이 판단이었습니다. "사실상 함정수사를 했기 때문에 차 씨를 처벌하기 힘들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좌절할 만도 했지만,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퀵 기사 쫓아가 '그놈' 검거...잡고 보니 고등학생

박 씨는 차 씨를 설득해 '그놈'에게 연락하게 했습니다. 돈을 받았는데 무통장 입금이 힘드니 퀵을 보내주면 현금을 보내겠다고 한 겁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박 씨는 ATM에서 68만 원을 뽑아 사진까지 보내줬습니다. '그놈'은 퀵을 보내왔습니다. 퀵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놈' 연락처를 보여줬습니다. 퀵 기사가 받은 연락처와 박 씨에게 연락해 사기를 친 번호가 일치했습니다.

박 씨는 다시 경찰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퀵 배달지까지 동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경찰과 박 씨는 퀵 기사를 따라갔습니다. 퀵 배달은 서울 서초구의 한 독서실 건물 앞에 섰습니다. 어려 보이는 남성이 건물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퀵 기사에게 상자를 받고 그 자리에서 뜯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경찰이 둘러쌌습니다. 그때 박 씨는 '그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 진동이 울렸습니다.

경찰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자 '그놈'은 학생증을 꺼냈습니다. '그놈'은 17살 고등학생 이 모 씨였습니다. 학생증 속 이름은 중간책인 차 씨가 무통장 입금을 하려고 했던 계좌명과 일치했습니다. 시민인 박 씨가 집념을 갖고 추적해 3일도 안 돼 '그놈'을 잡은 겁니다.

현재 경기 평택경찰서는 이 씨를 사기 혐의로 입건해 불구속 수사 중입니다. 박 씨는 "경찰이 바쁜 것은 알지만 '대포통장이나 해외로 송금하는 계좌이니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 내리지 않고 소액의 중고거래 사건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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