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이후①] “직장에서 잘리고 2차 가해”…고통은 ‘현재 진행형’

입력 2020.07.27 (06:0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취급되던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운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성착취물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추진되고 있지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은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지금까지 괴롭히는 것은 비단 법정에 있는 가해자만은 아닙니다. n번방 사건 이후 그들은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착취 영상 찾아 밤새 모니터링...'성착취물' 삭제 규정 확대해야

'n번방' 피해자인 A 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의 성착취물을 연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퍼졌을지 모르기 때문에 온갖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범죄 지원센터와 함께 진행하고 있지만, 저녁이면 센터 업무가 마감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A 씨의 몫입니다. 밤사이 다시 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모니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처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구제 조치는 성착취물의 삭제입니다. 활동가들이 센터 운영을 확대해 24시간 체제로 피해자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A 씨처럼 본인이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영상을 보는 게 힘들어 인터넷에 떠도는 성착취물을 내버려 두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 경우 성착취물 영상으로 의심되더라도 당사자의 신청이 없으면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규정이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고, 올해 1월부터는 직계친족과 형제자매의 경우 대신 요청할 수 있게끔 법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 측의 요청 없이 지원센터 자체적인 모니터링을 통한 삭제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임의로 삭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피해 촬영물 삭제 신청 시 피해자가 직접 신청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들 수 있다"며 "가족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아 지원단체 등 제3자를 통해 신청하는 것을 원할 수 있으나 현재는 본인, 가족 외에는 신청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박사방 피해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계속된 2차 가해

조주빈이 운영한 텔레그램 박사방 피해자 B 씨는 이 사건이 불거진 후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회사는 B 씨에게 '네가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박사방 피해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다'며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처럼 B 씨 역시 신상정보가 텔레그램 등을 통해 유출됐습니다. 그러면서 직장이 어딘지도 공개됐는데, 이에 대해 회사는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명목으로 내쫓은 겁니다.


이뿐 아니라 B 씨는 박사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수많은 이들에게 2차 가해를 당했습니다. SNS 등을 통해 직장동료뿐 아니라 주변 지인들까지 '네가 박사방 피해자가 맞느냐'는 등 온갖 메시지를 수차례 받았습니다.

이런 어려움으로 피해자들은 일상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관련 단체에서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생계비 지급이나 개명, 주민등록번호 변경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조차 지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피해자 C 씨는 생계비 지원을 받기 위해선 직장에 원천징수영수증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C 씨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상태에서 발급 사유를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고, 결국 회사에서 이를 빌미로 불이익을 줄까 봐 신청을 포기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이효린 활동가는 "회사는 박사방 피해자와 연루되고 싶지 않고, 부담스러워 한다. 피해자는 간단한 서류를 발급받는 것조차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피해를 당한 뒤 생계가 어려워 다시 취업해야 하는데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까 봐 이름을 바꾸고, 얼굴까지 바꾸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친구와 밥먹고, 여행가기'...피해자들이 바라는 일상 회복

지난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시민들에게 받은 후원금 4천여만 원을 피해자 58명에게 나눠주고, 어떤 데 쓰고 싶은지 기획서를 받았습니다. 대부분 '친구와 밥 먹기, 여행가기, 요가 배우기, 학원 다니기' 등 보통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일상 속 권리였습니다.


올해 1~6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삭제한 성착취물은 31,324건입니다. 이중 텔레그램 등 클라우드 성격의 플랫폼이 8,33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754건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성인사이트와 P2P 중심으로 성착취물이 퍼졌는데 이제는 텔레그램 등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진 겁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유포 경로는 또다시 변하고 있습니다. 성착취물 영상을 100% 삭제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이 바라는 평온한 일상으로 회복하는 일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그들의 고통에 우리가 모두 공감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N번방이후①] “직장에서 잘리고 2차 가해”…고통은 ‘현재 진행형’
    • 입력 2020-07-27 06:03:59
    취재K
성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취급되던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운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성착취물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추진되고 있지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은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지금까지 괴롭히는 것은 비단 법정에 있는 가해자만은 아닙니다. n번방 사건 이후 그들은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착취 영상 찾아 밤새 모니터링...'성착취물' 삭제 규정 확대해야

'n번방' 피해자인 A 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의 성착취물을 연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퍼졌을지 모르기 때문에 온갖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범죄 지원센터와 함께 진행하고 있지만, 저녁이면 센터 업무가 마감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A 씨의 몫입니다. 밤사이 다시 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모니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처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구제 조치는 성착취물의 삭제입니다. 활동가들이 센터 운영을 확대해 24시간 체제로 피해자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A 씨처럼 본인이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영상을 보는 게 힘들어 인터넷에 떠도는 성착취물을 내버려 두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 경우 성착취물 영상으로 의심되더라도 당사자의 신청이 없으면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규정이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고, 올해 1월부터는 직계친족과 형제자매의 경우 대신 요청할 수 있게끔 법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 측의 요청 없이 지원센터 자체적인 모니터링을 통한 삭제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임의로 삭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피해 촬영물 삭제 신청 시 피해자가 직접 신청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들 수 있다"며 "가족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아 지원단체 등 제3자를 통해 신청하는 것을 원할 수 있으나 현재는 본인, 가족 외에는 신청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박사방 피해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계속된 2차 가해

조주빈이 운영한 텔레그램 박사방 피해자 B 씨는 이 사건이 불거진 후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회사는 B 씨에게 '네가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박사방 피해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다'며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처럼 B 씨 역시 신상정보가 텔레그램 등을 통해 유출됐습니다. 그러면서 직장이 어딘지도 공개됐는데, 이에 대해 회사는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명목으로 내쫓은 겁니다.


이뿐 아니라 B 씨는 박사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수많은 이들에게 2차 가해를 당했습니다. SNS 등을 통해 직장동료뿐 아니라 주변 지인들까지 '네가 박사방 피해자가 맞느냐'는 등 온갖 메시지를 수차례 받았습니다.

이런 어려움으로 피해자들은 일상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관련 단체에서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생계비 지급이나 개명, 주민등록번호 변경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조차 지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피해자 C 씨는 생계비 지원을 받기 위해선 직장에 원천징수영수증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C 씨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상태에서 발급 사유를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고, 결국 회사에서 이를 빌미로 불이익을 줄까 봐 신청을 포기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이효린 활동가는 "회사는 박사방 피해자와 연루되고 싶지 않고, 부담스러워 한다. 피해자는 간단한 서류를 발급받는 것조차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피해를 당한 뒤 생계가 어려워 다시 취업해야 하는데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까 봐 이름을 바꾸고, 얼굴까지 바꾸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친구와 밥먹고, 여행가기'...피해자들이 바라는 일상 회복

지난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시민들에게 받은 후원금 4천여만 원을 피해자 58명에게 나눠주고, 어떤 데 쓰고 싶은지 기획서를 받았습니다. 대부분 '친구와 밥 먹기, 여행가기, 요가 배우기, 학원 다니기' 등 보통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일상 속 권리였습니다.


올해 1~6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삭제한 성착취물은 31,324건입니다. 이중 텔레그램 등 클라우드 성격의 플랫폼이 8,33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754건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성인사이트와 P2P 중심으로 성착취물이 퍼졌는데 이제는 텔레그램 등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진 겁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유포 경로는 또다시 변하고 있습니다. 성착취물 영상을 100% 삭제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이 바라는 평온한 일상으로 회복하는 일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그들의 고통에 우리가 모두 공감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