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이후②] 법정서 상영되는 ‘성착취물’…‘가명’ 소송 왜 안되나요?

입력 2020.07.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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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대대적인 수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4달 넘게 지난 현재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 수많은 가해자가 경찰 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피해자들 역시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각각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재판에서 '성착취물' 영상 상영해야 증거 채택

재판을 진행 중인 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성착취물을 다시 법정에서 시청하는 것입니다. 성착취물 등 불법 촬영물이 증거로 채택되려면 법장에서 함께 확인하는 방식의 조사가 진행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텔레그램 박사방 피해자인 A 씨는 이점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해 재판을 비공개로 하고, 필요한 인원으로 시청을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성착취물이 법정에 공개되고, 다시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재판마다 영상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재판부와 변호인 측의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몇 초나 재생할 것인가, 어느 부분을 재생할 것인가, 또, 정지 화면으로만 확인하는 방법 등 세부 방법을 사전에 정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증거물 확인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고, 이에 대해선 상당 부분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인 측은 판사실에서 확인하는 방법 등을 제안하지만, 재판부는 관련 규정 등을 근거로 대부분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랑 대표는 "성착취물은 다른 증거자료와 똑같이 취급받아선 안 된다"며 "판사실에서 필수 인원만 확인하는 등 피해자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재판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름, 주소 공개해야 가능한 '민사 소송;

형사 재판과는 별개로 일부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 접근금지가처분신청 등 민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명'으로 진행할 수 있는 형사 재판과 달리 민사 재판은 '실명'으로만 소송이 가능합니다.


성폭력 피해 지원 단체에조차 나이와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밝혀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판결문에도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성범죄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고, 피해자의 정보가 대량으로 유포된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박사방 피해자 B 씨는 가해자에게 자신의 신상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소송을 포기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이효린 활동가는 "민사 소송을 실명으로 진행하면 형사 소송을 가명으로 하는 의미가 없다"며 "공익신고자보호법처럼 변호사가 민사 본안소송 등을 대리하는 등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족에게 즉각 통보"...청소년 피해자 의사 우선해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중 상당수는 10대 미성년자입니다. 이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수사기관이 즉각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10대 피해자인 C양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결국 포기했습니다.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지원 단체의 도움을 받아 경찰 신고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경찰은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신고하는 것은 어렵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폭력 범죄보다 디지털 성범죄, 특히 청소년의 경우 '네가 사진을 먼저 올려서 당한 거다', '쉽게 돈 벌려다 당한 거다'는 등 가족과 지인들에게 비난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경찰, 검찰에서 피해 청소년의 동의 없이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는 것과 피해자가 요청하는 곳으로 사건 관련 우편물을 발송하는 것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도 많습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처벌 기준 등이 일선 경찰에 반영되지 않는 겁니다.

최근 온라인에서 알게 된 남성과 성관계를 한 D 양은 의제 강간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처벌이 어렵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의제 강간은 일정 기준의 나이보다 어린 청소년과 성관계를 할 경우, 설사 동의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강간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난 5월부터 기존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더 엄격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 개정 내용을 모르고, D 양의 나이를 확인한 뒤 의제 강간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러면서 경찰은 '합의로 한 성관계기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는 답을 한 채 돌려보냈습니다.

'피해회복' 될 때까지 끝나지 않은 'n번방 사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고,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해 경찰 등 수사 기관에서도 전보다 더욱 피해자 보호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피해자가 재판을 거쳐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되고, 2차 피해를 보는 경우가 이처럼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재판에서 성착취물 증거 사용 문제, 원본의 폐기 문제 등에 대해 더욱 정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반 성폭력 범죄와 다른 디지털 성범죄의 특수성, 청소년과 성인의 개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등 보다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불특정 다수에 의해 언제든 재생산, 재유포될 수 있는 위험을 어쩌면 평생 안고 갈지 모를 피해자들의 궁극적인 '피해회복'을 위해 현 지원 제도 전반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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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번방이후②] 법정서 상영되는 ‘성착취물’…‘가명’ 소송 왜 안되나요?
    • 입력 2020-07-27 07:01:10
    취재K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대대적인 수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4달 넘게 지난 현재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 수많은 가해자가 경찰 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피해자들 역시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각각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재판에서 '성착취물' 영상 상영해야 증거 채택

재판을 진행 중인 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성착취물을 다시 법정에서 시청하는 것입니다. 성착취물 등 불법 촬영물이 증거로 채택되려면 법장에서 함께 확인하는 방식의 조사가 진행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텔레그램 박사방 피해자인 A 씨는 이점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해 재판을 비공개로 하고, 필요한 인원으로 시청을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성착취물이 법정에 공개되고, 다시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재판마다 영상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재판부와 변호인 측의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몇 초나 재생할 것인가, 어느 부분을 재생할 것인가, 또, 정지 화면으로만 확인하는 방법 등 세부 방법을 사전에 정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증거물 확인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고, 이에 대해선 상당 부분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인 측은 판사실에서 확인하는 방법 등을 제안하지만, 재판부는 관련 규정 등을 근거로 대부분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랑 대표는 "성착취물은 다른 증거자료와 똑같이 취급받아선 안 된다"며 "판사실에서 필수 인원만 확인하는 등 피해자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재판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름, 주소 공개해야 가능한 '민사 소송;

형사 재판과는 별개로 일부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 접근금지가처분신청 등 민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명'으로 진행할 수 있는 형사 재판과 달리 민사 재판은 '실명'으로만 소송이 가능합니다.


성폭력 피해 지원 단체에조차 나이와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밝혀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판결문에도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성범죄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고, 피해자의 정보가 대량으로 유포된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박사방 피해자 B 씨는 가해자에게 자신의 신상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소송을 포기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이효린 활동가는 "민사 소송을 실명으로 진행하면 형사 소송을 가명으로 하는 의미가 없다"며 "공익신고자보호법처럼 변호사가 민사 본안소송 등을 대리하는 등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족에게 즉각 통보"...청소년 피해자 의사 우선해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중 상당수는 10대 미성년자입니다. 이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수사기관이 즉각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10대 피해자인 C양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결국 포기했습니다.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지원 단체의 도움을 받아 경찰 신고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경찰은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신고하는 것은 어렵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폭력 범죄보다 디지털 성범죄, 특히 청소년의 경우 '네가 사진을 먼저 올려서 당한 거다', '쉽게 돈 벌려다 당한 거다'는 등 가족과 지인들에게 비난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경찰, 검찰에서 피해 청소년의 동의 없이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는 것과 피해자가 요청하는 곳으로 사건 관련 우편물을 발송하는 것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도 많습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처벌 기준 등이 일선 경찰에 반영되지 않는 겁니다.

최근 온라인에서 알게 된 남성과 성관계를 한 D 양은 의제 강간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처벌이 어렵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의제 강간은 일정 기준의 나이보다 어린 청소년과 성관계를 할 경우, 설사 동의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강간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난 5월부터 기존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더 엄격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 개정 내용을 모르고, D 양의 나이를 확인한 뒤 의제 강간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러면서 경찰은 '합의로 한 성관계기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는 답을 한 채 돌려보냈습니다.

'피해회복' 될 때까지 끝나지 않은 'n번방 사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고,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해 경찰 등 수사 기관에서도 전보다 더욱 피해자 보호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피해자가 재판을 거쳐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되고, 2차 피해를 보는 경우가 이처럼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재판에서 성착취물 증거 사용 문제, 원본의 폐기 문제 등에 대해 더욱 정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반 성폭력 범죄와 다른 디지털 성범죄의 특수성, 청소년과 성인의 개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등 보다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불특정 다수에 의해 언제든 재생산, 재유포될 수 있는 위험을 어쩌면 평생 안고 갈지 모를 피해자들의 궁극적인 '피해회복'을 위해 현 지원 제도 전반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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