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총리가 모델에게 187억 원 선물했던 나라의 참사

입력 2020.08.0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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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폭발 참사가 일어난 레바논에서는 지난해 10월 당시 총리였던 사드 하리리가 사임했습니다. 레바논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2주 동안 이어지자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났습니다.

당시 레바논 반정부 시위를 촉발한 것은 통신요금 정책이었습니다. 레바논 시민들이 문자메시지 요금을 아끼기 위해 무료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인 '왓츠앱'을 사용해 왔는데, 정부가 여기에 하루 약 230원의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하자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신요금 정책에 앞서 시민들을 화나게 만든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하리리 총리가 2013년 한 여행지에서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비키니 모델을 만났는데, 이 모델의 계좌에 1,60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7억 원이 입금됐던 사실이 드러났던 겁니다.

사드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로부터 187억 원을 선물 받은 남아공 모델사드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로부터 187억 원을 선물 받은 남아공 모델

이 모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데, 거액의 현금흐름을 수상하게 여긴 세무당국의 조사가 이어지자 "하리리에게 선물을 받았을 뿐이며, 관계는 끝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순자산이 15억 달러, 1조 8천억 원이나 된다는 전 하리리 총리에게도 187억 원이라는 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겠지만, 35세 미만 청년층의 실업률이 37%에 이르는 상황을 겪고 있는 레바논 시민들에게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액수였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데 대한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통신요금까지 올리겠다고 하자 시민들의 거센 저항은 레바논 전역으로 번졌고, 하리리 총리가 결국 물러난 겁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까지 확산하면서 레바논 통화가치는 9개월 넘게 80%나 폭락하고 물가도 급등했습니다. 레바논 파운드는 은행에서 환전조차 되지 않았고 성난 시민들은 은행에 불을 질렀습니다. 총리가 물러나도 기득권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사회는 바뀐 게 없었습니다.

시민들의 방화로 불타는 레바논 은행시민들의 방화로 불타는 레바논 은행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레바논 정부의 '정파 간 공존'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레바논 주민 682만 명 가운데 이슬람교는 54%, 기독교는 40%인데, 이슬람교는 다시 비슷한 비율의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립니다.

이들 각 종파의 갈등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 동안의 내전으로 이어지자, 이후 레바논은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교 시아파가 맡는다는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언뜻 보면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한 셈인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정치가 발전하려면 정당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정책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정파간 지분이 고정돼 있다 보니 경쟁도 필요가 없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게 된 겁니다.

질산암모늄 폭발로 폐허가 된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질산암모늄 폭발로 폐허가 된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이런 상황에서 130여 명이 숨지고 5천여 명이 다치는 대형 폭발 참사가 일어났는데, 초기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이 항구 관리 부실로 나타나자 레바논 시민들은 또다시 좌절하고 있습니다.

2013년 몰도바 선박에서 압류한 질산암모늄 2,750톤이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에 쌓여있었는데, 세관 공무원들이 위험성을 계속 제기했지만 모두 무시됐고,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항구를 관리하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특별하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으니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질산암모늄을 방치했던 셈인데, 항만업계는 레바논 항만 당국을 세계적으로 부패한 곳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레바논 민심은 다시 술렁이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다시 시작돼 야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인도적 지원을 위해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향해 시민들은 "구호물자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게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고, 한 시민은 차라리 레바논을 통치해달라고 외쳤습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레바논 시민들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레바논 시민들

레바논 국기에는 백향목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막이 많은 다른 중동국가와는 달리 숲이 무성한 아름다운 산을 지니고 있어 중동의 스위스로도 불리고, 수도 베이루트 역시 중동의 파리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레바논 국민들은 이번 참사를 통해 레바논이 환골탈태해 과거의 영예를 다시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부에 고착된 기득권 간 권력 분점은 물론, 레바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서구 열강과 중동 강국들의 대결구도를 해소할 수 있는 묘안을 찾을 수 있기를 레바논 국민들은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의 사고 수습은 레바논 국가 재건의 첫 발걸음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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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총리가 모델에게 187억 원 선물했던 나라의 참사
    • 입력 2020-08-07 17:42:10
    특파원 리포트
초대형 폭발 참사가 일어난 레바논에서는 지난해 10월 당시 총리였던 사드 하리리가 사임했습니다. 레바논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2주 동안 이어지자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났습니다.

당시 레바논 반정부 시위를 촉발한 것은 통신요금 정책이었습니다. 레바논 시민들이 문자메시지 요금을 아끼기 위해 무료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인 '왓츠앱'을 사용해 왔는데, 정부가 여기에 하루 약 230원의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하자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신요금 정책에 앞서 시민들을 화나게 만든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하리리 총리가 2013년 한 여행지에서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비키니 모델을 만났는데, 이 모델의 계좌에 1,60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7억 원이 입금됐던 사실이 드러났던 겁니다.

사드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로부터 187억 원을 선물 받은 남아공 모델
이 모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데, 거액의 현금흐름을 수상하게 여긴 세무당국의 조사가 이어지자 "하리리에게 선물을 받았을 뿐이며, 관계는 끝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순자산이 15억 달러, 1조 8천억 원이나 된다는 전 하리리 총리에게도 187억 원이라는 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겠지만, 35세 미만 청년층의 실업률이 37%에 이르는 상황을 겪고 있는 레바논 시민들에게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액수였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데 대한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통신요금까지 올리겠다고 하자 시민들의 거센 저항은 레바논 전역으로 번졌고, 하리리 총리가 결국 물러난 겁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까지 확산하면서 레바논 통화가치는 9개월 넘게 80%나 폭락하고 물가도 급등했습니다. 레바논 파운드는 은행에서 환전조차 되지 않았고 성난 시민들은 은행에 불을 질렀습니다. 총리가 물러나도 기득권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사회는 바뀐 게 없었습니다.

시민들의 방화로 불타는 레바논 은행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레바논 정부의 '정파 간 공존'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레바논 주민 682만 명 가운데 이슬람교는 54%, 기독교는 40%인데, 이슬람교는 다시 비슷한 비율의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립니다.

이들 각 종파의 갈등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 동안의 내전으로 이어지자, 이후 레바논은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교 시아파가 맡는다는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언뜻 보면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한 셈인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정치가 발전하려면 정당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정책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정파간 지분이 고정돼 있다 보니 경쟁도 필요가 없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게 된 겁니다.

질산암모늄 폭발로 폐허가 된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이런 상황에서 130여 명이 숨지고 5천여 명이 다치는 대형 폭발 참사가 일어났는데, 초기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이 항구 관리 부실로 나타나자 레바논 시민들은 또다시 좌절하고 있습니다.

2013년 몰도바 선박에서 압류한 질산암모늄 2,750톤이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에 쌓여있었는데, 세관 공무원들이 위험성을 계속 제기했지만 모두 무시됐고,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항구를 관리하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특별하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으니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질산암모늄을 방치했던 셈인데, 항만업계는 레바논 항만 당국을 세계적으로 부패한 곳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레바논 민심은 다시 술렁이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다시 시작돼 야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인도적 지원을 위해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향해 시민들은 "구호물자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게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고, 한 시민은 차라리 레바논을 통치해달라고 외쳤습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레바논 시민들
레바논 국기에는 백향목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막이 많은 다른 중동국가와는 달리 숲이 무성한 아름다운 산을 지니고 있어 중동의 스위스로도 불리고, 수도 베이루트 역시 중동의 파리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레바논 국민들은 이번 참사를 통해 레바논이 환골탈태해 과거의 영예를 다시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부에 고착된 기득권 간 권력 분점은 물론, 레바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서구 열강과 중동 강국들의 대결구도를 해소할 수 있는 묘안을 찾을 수 있기를 레바논 국민들은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의 사고 수습은 레바논 국가 재건의 첫 발걸음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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