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침략에 온 가족을 잃은 어느 노파의 한(恨)

입력 2020.08.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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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州城西寒日嚑 동주성 서편으로 차가운 해 지는데
寶蓋山高帶夕雲 보개산 드높이 저녁 구름 띠었네.
皤然老嫗衣藍縷 백발의 노파가 남루한 차림으로
迎客出屋開柴戶 사립문 열고 나와 길손 맞아 하는 말.
自言京城老客婦 "나는 서울 살던 아낙으로
流離破産依客土 재산 잃고 떠돌다 객지에 산다오."

《홍길동전》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許筠, 1569~1618)은 1603년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납니다. 1603년이면 두 차례 왜란이 끝나고도 5년이 지난 뒤였죠. 금강산 가는 길에 허균은 강원도 철원의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집주인 노파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죠. 서울 살던 아낙은 어떤 연유로 강원도의 궁벽한 산골까지 흘러들었을까.

頃者倭奴陷洛陽 "임진년에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할 때
提携一子隨姑郞 아들 손잡고 남편과 시어머니 따라갔소.
重趼百舍竄窮谷 먼 길에 발 부르터 외진 골짜기에 숨었다가
夜出求食晝潛伏 밤이면 나와 밥을 얻고 낮에는 몰래 숨었네.
姑老得病郞負行 시어머니 병들어 남편이 업고 가는데
蹠穿崢山不遑息 험한 산에 발병 나도 쉴 수 없었소."

왜적을 피해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오릅니다. 어딘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를 찾아 양식을 구걸하죠. 멀쩡한 장정도 차마 견디기 힘들었을 피난길의 고생스러움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그렇게 멀리 달아나면 목숨이라도 건지려니 했건만, 왜적의 칼날은 끝내 이 가족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是時天雨夜深黑 "비가 내려 칠흑 같은 밤
坑滑足酸顚不測 땅이 미끄러워 자빠지고 말았네.
揮刀二賊從何來 어디서 왔나 왜놈 둘이 칼을 휘두르는데
闖暗躡蹤如相猜 어둠 속에서 우리 뒤를 밟았나 보오.
怒刃劈脰脰四裂 성난 칼에 목이 잘려
子母幷命流冤血 남편과 시어머니가 원한의 피 흘렸소.
我挈幼兒伏林藪 아이 데리고 숲 속에 숨어 있다
兒啼賊覺驅將去 울음소리 들켜 아이가 잡혀갔네.
只餘一身脫虎口 내 한 몸 호랑이 입을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 경황없이 소리 한 번 못 질렀소."

궁벽한 산속까지 쫓아온 왜적의 칼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죽고,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끝내 왜적에게 잡혀가고 맙니다. 참혹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잔인한 밤을 떠올리는 노파의 갈가리 찢긴 마음이 끝의 두 구절에 고스란히 담겼죠. 소리 한 번 지를 수 없었던 그 끔찍한 날의 기억. 그 슬픔과 고통은 한(恨)이 되어 여인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明朝來視二骸遺 "이튿날 아침 가 보니 시신 둘이 있건만
不辨姑屍與郞屍 뉘가 시어머닌지 뉘가 남편인지.
烏鳶啄腸狗嚙骼 까마귀 솔개가 창자를 쪼고 들개가 뼈를 무니
虆梩欲掩憑伊誰 삼태기로 묻으려 해도 도와줄 사람 없네.
辛勤掘得三尺窞 천신만고 석 자 구덩이 파고
手拾殘骨閉幽坎 남은 뼈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었소."

날이 밝자마자 시신을 수습하러 다시 가보니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돼버렸습니다. 망연자실, 혼자 몸으로 통곡하며, 시어머니와 남편의 시신이 짐승 밥이 되고 있는, 더는 끔찍해질 수도 없는 눈앞의 현실 앞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고 남은 시신을 거둬 묻는 이 여인에게 도대체 무슨 삶의 희망이 남았을까요.


煢煢隻影終何歸 "혈혈단신 이내 몸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 이웃 아낙이 가련히 여겨 나를 돕겠다 하오.
遂從店裏躬井臼 객점에서 물 긷고 방아 찧으며
饋以殘飯衣弊衣 남은 밥 먹으며 해진 옷 입고 살았네.
勞筋煎慮十二年 피곤한 몸으로 노심초사 열두 해
面黧髮禿腰脚頑 검은 얼굴에 머리는 다 빠졌고 허리 다리 팍팍하오."

전쟁통에 온 가족을 잃고 외톨이가 된 여인은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 그 동네에 사는 어느 아낙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죠. 그렇게 참담한 기억이 내려앉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모진 삶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산 지 12년. 갖은 고생을 한 탓에 몸도 마음도 어느새 늙어버린 여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近者京城消息傳 "요사이 서울 소식 듣자니
孤兒賊中幸生還 붙잡혔던 내 자식 살아 돌아왔다네.
投入宮家作蒼頭 궁가(宮家)의 하인 되어
餘帛在囷笥倉稠 상자에는 비단이 가득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聚婦作舍生計足 아내 얻고 집도 짓고 살림 풍족하다는데
不念阿孃客他州 타향 사는 어미는 생각도 못 하겠지.
生兒成長不得力 자식이 커도 도움 얻지 못하니
念之中宵涕橫臆 그 생각 하면 한밤중에도 눈물이 가슴에 가득."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던 자식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서울에서 자리 잡고 제법 번듯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겠죠. 장성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얻고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아들 소식을 12년 만에 접한 어미의 속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모자의 극적인 상봉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我形已瘁兒已壯 "내 모습 초췌해졌고 자식은 어른 되어
縱使相逢詎相識 만난다 한들 알아볼 수 있을지.
老身溝壑不足言 늙은 나야 객사한들 그만이지만
安得汝酒澆父墳 어찌해야 네 술 한 잔 아비 무덤에 올리려나.
嗚呼何代無亂離 아아! 난리 없는 시대 없다지만
未若妾身之抱冤 나만큼 원한 품은 사람 없을 거라오"

금강산 유람 가는 길에 어느 노파에게서 들은 이 기구하고 한 많은 사연을 들은 허균은 그 애달픈 이야기를 담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시집 『풍악기행』(楓嶽紀行)에 실었습니다. 여행시집에 이런 사연을 실은 까닭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허균 자신도 똑같은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이죠.

『풍악기행』은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권에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풍악기행』은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권에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노파와 마찬가지로 허균 또한 왜적이 한양으로 밀고 올라오자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강원도 피난길에 오릅니다. 허균의 가족은 당시 함경도까지 갑니다. 도중에 떡두꺼비 같은 귀한 아들을 낳았지만, 아내는 고생스러운 객지 생활을 못 견디고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도 죽고 말죠.

노파의 애달픈 사연을 들으면서 허균도 필시 자신의 고통스러운 옛 기억과 마주했을 겁니다. 그리고 노파의 한 많은 삶에 깊이 공감했겠죠. 끔찍했던 전쟁 속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것은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그 시대를 산 많은 이가 겪어야 했던 '보편적 체험'이었음을 이 가슴 아픈 시 한 편은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는 정길수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가 허균의 시문을 가려 뽑아 우리말로 옮긴 책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돌베개, 2012)에 수록됐습니다. 이 책에는 허균이 아내 안동 김씨의 1주기를 맞아 서글픈 마음을 담아 쓴 시와 함께 훗날 정3품 고위직에 오르면서 죽은 아내에게도 뒤늦게 '숙부인' 직함에 내려진 것을 계기로 쓴 행장(行狀)도 실렸습니다. 두 편 모두 먼저 간 아내를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래픽: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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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적의 침략에 온 가족을 잃은 어느 노파의 한(恨)
    • 입력 2020-08-12 14:00:36
    취재K
東州城西寒日嚑 동주성 서편으로 차가운 해 지는데
寶蓋山高帶夕雲 보개산 드높이 저녁 구름 띠었네.
皤然老嫗衣藍縷 백발의 노파가 남루한 차림으로
迎客出屋開柴戶 사립문 열고 나와 길손 맞아 하는 말.
自言京城老客婦 "나는 서울 살던 아낙으로
流離破産依客土 재산 잃고 떠돌다 객지에 산다오."

《홍길동전》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許筠, 1569~1618)은 1603년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납니다. 1603년이면 두 차례 왜란이 끝나고도 5년이 지난 뒤였죠. 금강산 가는 길에 허균은 강원도 철원의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집주인 노파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죠. 서울 살던 아낙은 어떤 연유로 강원도의 궁벽한 산골까지 흘러들었을까.

頃者倭奴陷洛陽 "임진년에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할 때
提携一子隨姑郞 아들 손잡고 남편과 시어머니 따라갔소.
重趼百舍竄窮谷 먼 길에 발 부르터 외진 골짜기에 숨었다가
夜出求食晝潛伏 밤이면 나와 밥을 얻고 낮에는 몰래 숨었네.
姑老得病郞負行 시어머니 병들어 남편이 업고 가는데
蹠穿崢山不遑息 험한 산에 발병 나도 쉴 수 없었소."

왜적을 피해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오릅니다. 어딘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를 찾아 양식을 구걸하죠. 멀쩡한 장정도 차마 견디기 힘들었을 피난길의 고생스러움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그렇게 멀리 달아나면 목숨이라도 건지려니 했건만, 왜적의 칼날은 끝내 이 가족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是時天雨夜深黑 "비가 내려 칠흑 같은 밤
坑滑足酸顚不測 땅이 미끄러워 자빠지고 말았네.
揮刀二賊從何來 어디서 왔나 왜놈 둘이 칼을 휘두르는데
闖暗躡蹤如相猜 어둠 속에서 우리 뒤를 밟았나 보오.
怒刃劈脰脰四裂 성난 칼에 목이 잘려
子母幷命流冤血 남편과 시어머니가 원한의 피 흘렸소.
我挈幼兒伏林藪 아이 데리고 숲 속에 숨어 있다
兒啼賊覺驅將去 울음소리 들켜 아이가 잡혀갔네.
只餘一身脫虎口 내 한 몸 호랑이 입을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 경황없이 소리 한 번 못 질렀소."

궁벽한 산속까지 쫓아온 왜적의 칼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죽고,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끝내 왜적에게 잡혀가고 맙니다. 참혹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잔인한 밤을 떠올리는 노파의 갈가리 찢긴 마음이 끝의 두 구절에 고스란히 담겼죠. 소리 한 번 지를 수 없었던 그 끔찍한 날의 기억. 그 슬픔과 고통은 한(恨)이 되어 여인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明朝來視二骸遺 "이튿날 아침 가 보니 시신 둘이 있건만
不辨姑屍與郞屍 뉘가 시어머닌지 뉘가 남편인지.
烏鳶啄腸狗嚙骼 까마귀 솔개가 창자를 쪼고 들개가 뼈를 무니
虆梩欲掩憑伊誰 삼태기로 묻으려 해도 도와줄 사람 없네.
辛勤掘得三尺窞 천신만고 석 자 구덩이 파고
手拾殘骨閉幽坎 남은 뼈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었소."

날이 밝자마자 시신을 수습하러 다시 가보니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돼버렸습니다. 망연자실, 혼자 몸으로 통곡하며, 시어머니와 남편의 시신이 짐승 밥이 되고 있는, 더는 끔찍해질 수도 없는 눈앞의 현실 앞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고 남은 시신을 거둬 묻는 이 여인에게 도대체 무슨 삶의 희망이 남았을까요.


煢煢隻影終何歸 "혈혈단신 이내 몸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 이웃 아낙이 가련히 여겨 나를 돕겠다 하오.
遂從店裏躬井臼 객점에서 물 긷고 방아 찧으며
饋以殘飯衣弊衣 남은 밥 먹으며 해진 옷 입고 살았네.
勞筋煎慮十二年 피곤한 몸으로 노심초사 열두 해
面黧髮禿腰脚頑 검은 얼굴에 머리는 다 빠졌고 허리 다리 팍팍하오."

전쟁통에 온 가족을 잃고 외톨이가 된 여인은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 그 동네에 사는 어느 아낙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죠. 그렇게 참담한 기억이 내려앉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모진 삶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산 지 12년. 갖은 고생을 한 탓에 몸도 마음도 어느새 늙어버린 여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近者京城消息傳 "요사이 서울 소식 듣자니
孤兒賊中幸生還 붙잡혔던 내 자식 살아 돌아왔다네.
投入宮家作蒼頭 궁가(宮家)의 하인 되어
餘帛在囷笥倉稠 상자에는 비단이 가득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聚婦作舍生計足 아내 얻고 집도 짓고 살림 풍족하다는데
不念阿孃客他州 타향 사는 어미는 생각도 못 하겠지.
生兒成長不得力 자식이 커도 도움 얻지 못하니
念之中宵涕橫臆 그 생각 하면 한밤중에도 눈물이 가슴에 가득."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던 자식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서울에서 자리 잡고 제법 번듯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겠죠. 장성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얻고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아들 소식을 12년 만에 접한 어미의 속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모자의 극적인 상봉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我形已瘁兒已壯 "내 모습 초췌해졌고 자식은 어른 되어
縱使相逢詎相識 만난다 한들 알아볼 수 있을지.
老身溝壑不足言 늙은 나야 객사한들 그만이지만
安得汝酒澆父墳 어찌해야 네 술 한 잔 아비 무덤에 올리려나.
嗚呼何代無亂離 아아! 난리 없는 시대 없다지만
未若妾身之抱冤 나만큼 원한 품은 사람 없을 거라오"

금강산 유람 가는 길에 어느 노파에게서 들은 이 기구하고 한 많은 사연을 들은 허균은 그 애달픈 이야기를 담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시집 『풍악기행』(楓嶽紀行)에 실었습니다. 여행시집에 이런 사연을 실은 까닭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허균 자신도 똑같은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이죠.

『풍악기행』은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권에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노파와 마찬가지로 허균 또한 왜적이 한양으로 밀고 올라오자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강원도 피난길에 오릅니다. 허균의 가족은 당시 함경도까지 갑니다. 도중에 떡두꺼비 같은 귀한 아들을 낳았지만, 아내는 고생스러운 객지 생활을 못 견디고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도 죽고 말죠.

노파의 애달픈 사연을 들으면서 허균도 필시 자신의 고통스러운 옛 기억과 마주했을 겁니다. 그리고 노파의 한 많은 삶에 깊이 공감했겠죠. 끔찍했던 전쟁 속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것은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그 시대를 산 많은 이가 겪어야 했던 '보편적 체험'이었음을 이 가슴 아픈 시 한 편은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는 정길수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가 허균의 시문을 가려 뽑아 우리말로 옮긴 책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돌베개, 2012)에 수록됐습니다. 이 책에는 허균이 아내 안동 김씨의 1주기를 맞아 서글픈 마음을 담아 쓴 시와 함께 훗날 정3품 고위직에 오르면서 죽은 아내에게도 뒤늦게 '숙부인' 직함에 내려진 것을 계기로 쓴 행장(行狀)도 실렸습니다. 두 편 모두 먼저 간 아내를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래픽: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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