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중국 대륙을 울린 3·1운동 연극〈산하루〉

입력 2020.08.1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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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런 건가 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유 없이 잊히고, 또 누군가의 열정이 그것을 소환한다. 연극 <산하루, 山河淚>는 1924년 중국 예술인들이 창작한 우리 3·1 만세운동 이야기다.

'산하의 눈물'이라는 제목에 담긴 뜻처럼 중국인들은 연극 <산하루>를 보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저항정신에 지지를 보냈다. 작품은 1924년부터 20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무대에 올랐다.

잊힐 뻔했던 이 사료는 한 중국인 학자의 열정으로 2020년 다시 세상에 온전히 나왔다.


<산하루> 왜 창작했나?

극본 집필과 연출을 맡은 사람은 중국 연출가 허우야오(侯曜) 선생이다. 선생은 <산하루> 극본에 집필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족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제국주의 야심가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허우야오 선생은 교수, 연극 연출가, 영화감독, 시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중국의 지식인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개념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1942년 2월 23일 싱가포르에서 영화 촬영 도중 실종됐다.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일제의 반일사상 인물 색출이 한창이었다.

<산하루> 내용은?

연극 <산하루>는 모두 3막으로 구성돼 있다. 극본은 1930년대까지 일곱 번이나 인쇄돼 배포됐다. 공연 장면은 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기사에 첨부된 사진 6장이 전해진다.



위 사진은 1막 장면을 담은 것이다. 1막은 해외 독립운동가 한국인 안남잠(安南潜)이 고국으로 돌아와 학생 최현영(崔玄英) 등과 3.1 만세 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2막은 본격적인 3·1 만세운동과 일제의 탄압이 고스란히 담았다. 안남잠은 서울 탑동공원의 한 교회 예배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려는 사람들과 비밀회의를 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군경이 예배당에 들이닥치고, 사람들을 학살한다.

이는 허우야오 선생이 일제가 저지른 만행 '제암리 학살'을 고증해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산하루> 공연을 전한 당시 중국 신문은 "연극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한반도 곳곳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한국인들의 모습과 같았다"고 전한다.



3막은 만세운동 뒤 구사일생 목숨을 구한 안남잠이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이다. 안남잠은 3·1 만세운동 과정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안남잠은 최현영에게 조선 총독을 폭살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최현영 가문의 나이 든 하인 박충(朴忠)이 본인이 하겠다고 만류한다. 두 사람은 차례로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다. 하지만 암살은 결국 실패하고 연극은 끝난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쑨커즈 교수상하이 푸단대학교 쑨커즈 교수

사료 발굴 '쑨커즈' 상하이 푸단대 교수
연극 <산하루> 사료를 발굴한 학자는 중국 상하이 푸단대 쑨커즈 교수다. 쑨커즈 교수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한국독립사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쑨커즈 교수는 <산하루> 대본, 공연 사진, 공연 장소, 공연 일시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고 말했다.

"허우야오 선생은 극본을 작성하면서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3.1운동에 대한 중국과 미국 매체 보도 등을 참고했다고 극본에 적어 놓았습니다. 난징(南京)에 피난 와 있던 한국인들을 만나 직접 3.1운동 당시 상황을 구술받았다고도 했습니다. <산하루>는 사실주의 기법에 따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산하루> 공연 얼마나 열렸나?

<산하루> 첫 공연은 1924년 5월 24일 ~ 25일 열렸다. 쑨커즈 교수는 이날 이후 1940년대까지 중국 신문에 보도된 <산하루> 관련 기사를 찾아냈다. 확인된 것만 20년 동안 100여 건이다.

"당시 중국에선 한 지역에서 공연한 뒤 순회공연 형식으로 인근 지역을 돌았습니다.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성 소재지, 현과 시골에서도 연극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공연 횟수는 신문기사에서 확인된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1925년 8월 1일 상하이에서도 공연이 열렸다.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큰 무대인 '중앙대회당'이었다. 공연 상황을 전한 당시 상하이 한 신문은 "많은 관객이 연극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의 애국 열정에 감동하였다."고 전했다.

<산하루>가 1920 ~ 40년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또 인기가 있었는지를 짐작게 하는 기사도 있다. 아래 사진은 중국의 여학교 졸업식에서 <산하루>가 공연됐다는 신문 기사다.

연극 대본이 일곱 차례나 인쇄돼 중국 전역에 배포됐기에 가능했다. 쑨커즈 교수는 <산하루>는 당시 중국 각 학교의 졸업식 공연, 새해맞이 공연의 단골 연극이었다고 말했다.

후진 여학교〈산하루〉 애국 연인 후진 여학교〈산하루〉 애국 연인

치시우 여학교〈산하루〉 배우치시우 여학교〈산하루〉 배우


중국 예술계 거장, 산하루와 인연

중국 예술계 거장과 원로, 전설들도 <산하루>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중국 무성영화 시대 전설적인 배우인 롼링위(阮玲玉)는 광둥 교회중학교 학생 시절 <산하루> 최현영 역을 맡았다. 이후 롼링위는 <구아밍푸치(挂名夫妻)> 주연을 맡아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중국의 원로 연극 연출가 스싱(史行), 경극 감독 장아이딩(张艾丁), 연극 교육가 우런지(吴仞之), 역사지리학자 호우런지(侯仁之)도 학창시절 <산하루> 무대에 올랐다고 고백했다. 연극 <산하루>가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에 얼마나 깊이 배어있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쑨커즈 교수는 연극 <산하루>를 통해 중국인들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저항정신을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기소침해 있던 중국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 원동력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구국 운동을 벌이는 큰 힘이 됐다. 3·1 만세운동 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에만 남아 있었던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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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중국 대륙을 울린 3·1운동 연극〈산하루〉
    • 입력 2020-08-16 07:01:17
    특파원 리포트
역사는 이런 건가 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유 없이 잊히고, 또 누군가의 열정이 그것을 소환한다. 연극 <산하루, 山河淚>는 1924년 중국 예술인들이 창작한 우리 3·1 만세운동 이야기다.

'산하의 눈물'이라는 제목에 담긴 뜻처럼 중국인들은 연극 <산하루>를 보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저항정신에 지지를 보냈다. 작품은 1924년부터 20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무대에 올랐다.

잊힐 뻔했던 이 사료는 한 중국인 학자의 열정으로 2020년 다시 세상에 온전히 나왔다.


<산하루> 왜 창작했나?

극본 집필과 연출을 맡은 사람은 중국 연출가 허우야오(侯曜) 선생이다. 선생은 <산하루> 극본에 집필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족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제국주의 야심가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허우야오 선생은 교수, 연극 연출가, 영화감독, 시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중국의 지식인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개념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1942년 2월 23일 싱가포르에서 영화 촬영 도중 실종됐다.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일제의 반일사상 인물 색출이 한창이었다.

<산하루> 내용은?

연극 <산하루>는 모두 3막으로 구성돼 있다. 극본은 1930년대까지 일곱 번이나 인쇄돼 배포됐다. 공연 장면은 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기사에 첨부된 사진 6장이 전해진다.



위 사진은 1막 장면을 담은 것이다. 1막은 해외 독립운동가 한국인 안남잠(安南潜)이 고국으로 돌아와 학생 최현영(崔玄英) 등과 3.1 만세 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2막은 본격적인 3·1 만세운동과 일제의 탄압이 고스란히 담았다. 안남잠은 서울 탑동공원의 한 교회 예배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려는 사람들과 비밀회의를 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군경이 예배당에 들이닥치고, 사람들을 학살한다.

이는 허우야오 선생이 일제가 저지른 만행 '제암리 학살'을 고증해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산하루> 공연을 전한 당시 중국 신문은 "연극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한반도 곳곳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한국인들의 모습과 같았다"고 전한다.



3막은 만세운동 뒤 구사일생 목숨을 구한 안남잠이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이다. 안남잠은 3·1 만세운동 과정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안남잠은 최현영에게 조선 총독을 폭살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최현영 가문의 나이 든 하인 박충(朴忠)이 본인이 하겠다고 만류한다. 두 사람은 차례로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다. 하지만 암살은 결국 실패하고 연극은 끝난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쑨커즈 교수
사료 발굴 '쑨커즈' 상하이 푸단대 교수
연극 <산하루> 사료를 발굴한 학자는 중국 상하이 푸단대 쑨커즈 교수다. 쑨커즈 교수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한국독립사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쑨커즈 교수는 <산하루> 대본, 공연 사진, 공연 장소, 공연 일시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고 말했다.

"허우야오 선생은 극본을 작성하면서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3.1운동에 대한 중국과 미국 매체 보도 등을 참고했다고 극본에 적어 놓았습니다. 난징(南京)에 피난 와 있던 한국인들을 만나 직접 3.1운동 당시 상황을 구술받았다고도 했습니다. <산하루>는 사실주의 기법에 따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산하루> 공연 얼마나 열렸나?

<산하루> 첫 공연은 1924년 5월 24일 ~ 25일 열렸다. 쑨커즈 교수는 이날 이후 1940년대까지 중국 신문에 보도된 <산하루> 관련 기사를 찾아냈다. 확인된 것만 20년 동안 100여 건이다.

"당시 중국에선 한 지역에서 공연한 뒤 순회공연 형식으로 인근 지역을 돌았습니다.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성 소재지, 현과 시골에서도 연극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공연 횟수는 신문기사에서 확인된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1925년 8월 1일 상하이에서도 공연이 열렸다.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큰 무대인 '중앙대회당'이었다. 공연 상황을 전한 당시 상하이 한 신문은 "많은 관객이 연극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의 애국 열정에 감동하였다."고 전했다.

<산하루>가 1920 ~ 40년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또 인기가 있었는지를 짐작게 하는 기사도 있다. 아래 사진은 중국의 여학교 졸업식에서 <산하루>가 공연됐다는 신문 기사다.

연극 대본이 일곱 차례나 인쇄돼 중국 전역에 배포됐기에 가능했다. 쑨커즈 교수는 <산하루>는 당시 중국 각 학교의 졸업식 공연, 새해맞이 공연의 단골 연극이었다고 말했다.

후진 여학교〈산하루〉 애국 연인
치시우 여학교〈산하루〉 배우

중국 예술계 거장, 산하루와 인연

중국 예술계 거장과 원로, 전설들도 <산하루>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중국 무성영화 시대 전설적인 배우인 롼링위(阮玲玉)는 광둥 교회중학교 학생 시절 <산하루> 최현영 역을 맡았다. 이후 롼링위는 <구아밍푸치(挂名夫妻)> 주연을 맡아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중국의 원로 연극 연출가 스싱(史行), 경극 감독 장아이딩(张艾丁), 연극 교육가 우런지(吴仞之), 역사지리학자 호우런지(侯仁之)도 학창시절 <산하루> 무대에 올랐다고 고백했다. 연극 <산하루>가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에 얼마나 깊이 배어있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쑨커즈 교수는 연극 <산하루>를 통해 중국인들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저항정신을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기소침해 있던 중국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 원동력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구국 운동을 벌이는 큰 힘이 됐다. 3·1 만세운동 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에만 남아 있었던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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