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불상’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입력 2020.08.2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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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또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코로나 확산세가 주춤한 사이에 서둘러 박물관에 다녀온 것이 요행으로 느껴질 정도죠. 재개관 기념 특별전시 <신국보보물전>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으니까요. 그런 일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거듭 깨닫게 되는 시절입니다.

전시 도록을 찬찬히 넘겨보다가 낯익은 불상을 만났습니다. 공식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흔히 '청와대 불상', '청와대 석불'로 알려진 유물이죠.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 여름에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불상에 얽힌 이야기를 취재한 기억이 납니다. 방송이 나간 이듬해, 불상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7호가 됐습니다.


'청와대 불상'은 청와대 후원에 있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서 일반인이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죠. 3년 전 취재 당시 청와대에 직접 불상을 직접 촬영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수소문한 끝에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보고 사진을 찍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죠.

베일에 싸인 불상. 만날 수도 없는 불상.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송은 해야겠기에 혹시 과거에 촬영한 화면이 없는지 찾아봤죠. 운 좋게도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화면이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 화면이 없었다면 방송을 할 수 없었겠죠. 물론 그 뒤로도 불상 촬영이 허가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통일신라 불상이 왜 청와대에 있는 걸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 새겨진 문구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경주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경주로 향했습니다. 불상이 원래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입니다. 주소는 경북 경주시 도지동. 신라시대에 이거사(移車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여겨진 장소죠. 3년 전 그곳을 찾았을 때는 천년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이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거라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곳에선 도지마을, 도지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보면, 737년에 왕이 돌아가시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다음 장면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갑니다. 이 불상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은 공교롭게도 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였습니다.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는 한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잘 생긴 불상 한 점을 만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데라우치 총독이 불상을 거듭 되돌아보며 유심히 살피자, 집주인이 총독의 의중을 눈치채고 불상을 즉시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총독에게 선물로 보낸 겁니다. 불상이 경주를 떠난 과정 자체가 일제 잔재였던 겁니다.

총독의 진상품 신세가 된 불상이 경주를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총독 관저였습니다. 남산 북쪽 길을 따라 남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죠. 통감 관저, 훗날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터 옆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불상이 옮겨졌던 장소입니다.


1913년 2월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 불상을 절벽 바위 아래 안치하고 개안식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한 장의 사진에서 일본 관리들 사이에 불상의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어지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졌습니다. 불상이 청와대 자리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당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상 자체는 워낙에 우리가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그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겨지게 됐고, 바로 그다음에 총독관저 옮겨지는 거에 따라서 청와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거는 전형적인 일제 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기록을 찾아보니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불상에 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불상을 '미남석불'이라 부르면서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뒤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불상의 존재는 까맣게 잊혔죠.

그러다가 이 불상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린 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인 고(故) 이구열 선생이었습니다. 이구열 선생은 1973년에 초판을 펴낸 《한국문화재 수난사》란 책에 통일신라 불상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구열 선생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로선 문화재 수난의 참 하나의 사례죠. 근데 어쨌든 그렇게 됐던 건데 그게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경주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그때 많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많거든."

다시 세월이 흘러 1994년 청와대 불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끕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구포역 열차 전복부터,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까지 갖가지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졌죠.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 됐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습니다. 급기야 청와대가 출입기자단에 불상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죠.

제가 이 문제를 취재하기 시작한 건 2017년 광복절을 앞두고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 불상을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얻은 이름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에 불상의 고향인 '경주'라는 지명이 명확하게 표기된 것은 주목할 만한 진전이죠. 나중에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요.

이런저런 복잡한 세상사에 밀려 청와대 불상 문제는 다시 사람들에게서 까맣게 잊혔습니다. 우연히 <신국보보물전> 도록을 넘겨보다가 3년 전 불상을 취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죠.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과연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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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와대 불상’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입력 2020-08-21 10:49:32
    취재K
국립중앙박물관이 또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코로나 확산세가 주춤한 사이에 서둘러 박물관에 다녀온 것이 요행으로 느껴질 정도죠. 재개관 기념 특별전시 <신국보보물전>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으니까요. 그런 일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거듭 깨닫게 되는 시절입니다.

전시 도록을 찬찬히 넘겨보다가 낯익은 불상을 만났습니다. 공식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흔히 '청와대 불상', '청와대 석불'로 알려진 유물이죠.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 여름에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불상에 얽힌 이야기를 취재한 기억이 납니다. 방송이 나간 이듬해, 불상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7호가 됐습니다.


'청와대 불상'은 청와대 후원에 있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서 일반인이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죠. 3년 전 취재 당시 청와대에 직접 불상을 직접 촬영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수소문한 끝에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보고 사진을 찍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죠.

베일에 싸인 불상. 만날 수도 없는 불상.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송은 해야겠기에 혹시 과거에 촬영한 화면이 없는지 찾아봤죠. 운 좋게도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화면이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 화면이 없었다면 방송을 할 수 없었겠죠. 물론 그 뒤로도 불상 촬영이 허가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통일신라 불상이 왜 청와대에 있는 걸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 새겨진 문구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경주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경주로 향했습니다. 불상이 원래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입니다. 주소는 경북 경주시 도지동. 신라시대에 이거사(移車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여겨진 장소죠. 3년 전 그곳을 찾았을 때는 천년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이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거라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곳에선 도지마을, 도지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보면, 737년에 왕이 돌아가시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다음 장면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갑니다. 이 불상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은 공교롭게도 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였습니다.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는 한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잘 생긴 불상 한 점을 만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데라우치 총독이 불상을 거듭 되돌아보며 유심히 살피자, 집주인이 총독의 의중을 눈치채고 불상을 즉시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총독에게 선물로 보낸 겁니다. 불상이 경주를 떠난 과정 자체가 일제 잔재였던 겁니다.

총독의 진상품 신세가 된 불상이 경주를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총독 관저였습니다. 남산 북쪽 길을 따라 남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죠. 통감 관저, 훗날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터 옆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불상이 옮겨졌던 장소입니다.


1913년 2월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 불상을 절벽 바위 아래 안치하고 개안식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한 장의 사진에서 일본 관리들 사이에 불상의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어지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졌습니다. 불상이 청와대 자리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당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상 자체는 워낙에 우리가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그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겨지게 됐고, 바로 그다음에 총독관저 옮겨지는 거에 따라서 청와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거는 전형적인 일제 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기록을 찾아보니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불상에 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불상을 '미남석불'이라 부르면서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뒤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불상의 존재는 까맣게 잊혔죠.

그러다가 이 불상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린 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인 고(故) 이구열 선생이었습니다. 이구열 선생은 1973년에 초판을 펴낸 《한국문화재 수난사》란 책에 통일신라 불상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구열 선생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로선 문화재 수난의 참 하나의 사례죠. 근데 어쨌든 그렇게 됐던 건데 그게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경주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그때 많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많거든."

다시 세월이 흘러 1994년 청와대 불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끕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구포역 열차 전복부터,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까지 갖가지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졌죠.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 됐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습니다. 급기야 청와대가 출입기자단에 불상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죠.

제가 이 문제를 취재하기 시작한 건 2017년 광복절을 앞두고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 불상을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얻은 이름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에 불상의 고향인 '경주'라는 지명이 명확하게 표기된 것은 주목할 만한 진전이죠. 나중에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요.

이런저런 복잡한 세상사에 밀려 청와대 불상 문제는 다시 사람들에게서 까맣게 잊혔습니다. 우연히 <신국보보물전> 도록을 넘겨보다가 3년 전 불상을 취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죠.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과연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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