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각본 없던 ‘최후의 회견’…日 아베 파고든 ‘5개의 질문’

입력 2020.08.3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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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프터는 세계 여러 지도자가 쓰고 있는 거라 저도 써 왔습니다만, 오늘은 원고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저도 (회견 직전에야) 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임 기자회견이 28일 오후 도쿄(東京) 총리관저에서 있었습니다. 그의 회견은 주로 비서관이 작성한 발표문 낭독과, 이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됩니다. 기자들은 총리관저에 미리 질문지를 건넵니다. 아베 총리는 TV 중계 화면에 잘 잡히지 않도록 좌우에 설치된 프롬프터(원고 영사기) 문장을 얼굴을 움직이면서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회견해 왔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사임 기자회견을 열면서 프롬프터 없이 즉흥적으로 답하고 있다. [교도=연합]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사임 기자회견을 열면서 프롬프터 없이 즉흥적으로 답하고 있다. [교도=연합]

하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프롬프터 자체가 없었죠. 그도 그럴 것이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자체가 워낙 전격적이었습니다. 관저가 당초 준비한 원고에는 "남은 1년의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게 불과 1시간 전에 "사임하겠다"로 바뀐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기자 질문지도 미리 건네질 수 없는 상황이었죠. 각본 없는 1시간짜리 '최후의 회견'이 시작된 겁니다.

아베 총리의 발표 직후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평이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유산이나 성과는 뭔가?"(요미우리)를 시작으로 "차기 정권에 바라는 점은?"(아사히),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교도통신) 등이었죠. "총리에게 필요한 자질은 뭔가?", "전 총리로서 대(對) 러시아, 대 중국 외교에 간여할 생각이 있는가?"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베 총리는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일본 주요 조간신문들이 29일 아베 총리의 사임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일본 주요 조간신문들이 29일 아베 총리의 사임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는 달랐습니다. 주류 언론사가 소속된 '관저 기자단'의 맹숭맹숭한 질문이 소진되자, '마이너' 기자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어찌 보면 2012년 12월 이후 7년 8개월간 이어진 아베 독주 정치체제가 품어왔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본 누리꾼들은 이 5개의 질문 영상을 따로 편집해 돌려보며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시미즈(清水) 다카유키/도쿄신문

"역대 최장기 '아베 1강' 정치가 이어졌다. 그동안 관료 사회의 '손타쿠'(忖度·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중을 살펴 알아서 처리하는 일)나 공문서 폐기·조작 등 부정적인 측면도 추궁받았다. 공문서 조작을 강요받아 자살한 재무성 직원의 유족은 지금도 재조사를 요구하며 정권의 설명 책임을 묻고 있다. 그동안 국민이 의문을 품었던 여러 의혹에 대해 정치인으로서 설명 책임을 다했는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6년 5월 27일, 아베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원폭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6년 5월 27일, 아베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원폭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② 신원미상의 신문 기자

"총리는 정치적 유산으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을 꼽았다. 올해는 피폭 75년, 종전 75년으로 모든 국민이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긴 1년이었다. 총리는 많은 피폭자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분들을 만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일은 총리 가슴에 어떻게 와 닿았나? 임기 중에 평화안전법제, 안전보장 관련법 등으로 국민 여론을 분열시켰다. 평화 문제를 마주할 수 있는가?"

③️ 에가와 쇼코(江川紹子)/프리 저널리스트

"긴급재난지원금 10만 엔을 줄 때 온라인 신청을 받아놓고는 지자체 공무원이 수작업을 했다. 코로나19로 일본이 얼마나 IT 후진국인지 노출됐다. 아베 정권은 2013년에 새로운 IT 전략을 세워 2020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이용·활용 사회 실현을 목표로 했다. 총리도 '세계를 뒤쫓아가선 안 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 뒤처진 건 분명하다. 원인은 뭔가?"

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3월 2일 기자들이 회견에 앞서 질문 내용을 미리 전달한 문서인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을 인터넷에 공개했다.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3월 2일 기자들이 회견에 앞서 질문 내용을 미리 전달한 문서인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④ ️진보(神保) 데쓰오/비디오뉴스닷컴

"아베 정권은 과거 정권에 비해 매우 철저한 미디어 대책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기자회견 때 질문을 미리 적어 낸 언론사 기자의 질문만 받았다. 그건 총리 자신의 지시였나, 아니면 실무진이 했고 총리는 몰랐던 일인가? 만약 몰랐다면 질문과 답변 내용이 적힌 메모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나? 이런 미디어와 정치 관계가 민주주의에 합당한 일인가?"

⑤ 가와구치(川口) 후미오/서일본(西日本)신문

"모리토모(森友)·가케(加計) 학원, '벚꽃을 보는 모임' 문제 등으로 국민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코로나19 대책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정권의 사물화(私物化·사유화)'가 원인 아닌가? 이는 단순히 국민의 오해인가? 총리 자신이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 알려달라."

아베 총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5개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답변은 '책임 회피형'이었습니다. "공문서 관리가 충분한지는 국민 여러분이 판단할 것이다", "(IT 후진국 문제는) 이번에 문제가 분명해졌으니 다음 리더가 해결해 나갈 것이다", "세계가 협력해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 "정치를 사물화한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사임함에 따라 후임 총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왼쪽부터 고노 다로 방위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아베 총리가 사임함에 따라 후임 총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왼쪽부터 고노 다로 방위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

전투기는 공중에서 고장 나면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회'(Last Chance·최종기회점검)라고 불리는 곳에서 최종 점검을 받은 뒤에야 활주로를 내달릴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혹시나 놓칠 수 있는 작은 부분, 모든 실수를 점검하는, 말 그대로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베 정권 내내 총리관저는 인사권을 틀어쥐고 관료들에 대한 압도적인 장악력을 발휘했습니다. 여론이 반대하는 정책도 의석수 우위를 앞세워 밀어 붙였습니다. 7년 8개월의 무소불위 정권을 내놓는 마지막 순간에 받았던 질문들을 더 빨리, 더 자주 경청했다면 그의 퇴장이 조금은 덜 초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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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각본 없던 ‘최후의 회견’…日 아베 파고든 ‘5개의 질문’
    • 입력 2020-08-30 07:03:51
    특파원 리포트
"프롬프터는 세계 여러 지도자가 쓰고 있는 거라 저도 써 왔습니다만, 오늘은 원고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저도 (회견 직전에야) 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임 기자회견이 28일 오후 도쿄(東京) 총리관저에서 있었습니다. 그의 회견은 주로 비서관이 작성한 발표문 낭독과, 이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됩니다. 기자들은 총리관저에 미리 질문지를 건넵니다. 아베 총리는 TV 중계 화면에 잘 잡히지 않도록 좌우에 설치된 프롬프터(원고 영사기) 문장을 얼굴을 움직이면서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회견해 왔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사임 기자회견을 열면서 프롬프터 없이 즉흥적으로 답하고 있다. [교도=연합]
하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프롬프터 자체가 없었죠. 그도 그럴 것이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자체가 워낙 전격적이었습니다. 관저가 당초 준비한 원고에는 "남은 1년의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게 불과 1시간 전에 "사임하겠다"로 바뀐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기자 질문지도 미리 건네질 수 없는 상황이었죠. 각본 없는 1시간짜리 '최후의 회견'이 시작된 겁니다.

아베 총리의 발표 직후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평이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유산이나 성과는 뭔가?"(요미우리)를 시작으로 "차기 정권에 바라는 점은?"(아사히),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교도통신) 등이었죠. "총리에게 필요한 자질은 뭔가?", "전 총리로서 대(對) 러시아, 대 중국 외교에 간여할 생각이 있는가?"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베 총리는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일본 주요 조간신문들이 29일 아베 총리의 사임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는 달랐습니다. 주류 언론사가 소속된 '관저 기자단'의 맹숭맹숭한 질문이 소진되자, '마이너' 기자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어찌 보면 2012년 12월 이후 7년 8개월간 이어진 아베 독주 정치체제가 품어왔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본 누리꾼들은 이 5개의 질문 영상을 따로 편집해 돌려보며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시미즈(清水) 다카유키/도쿄신문

"역대 최장기 '아베 1강' 정치가 이어졌다. 그동안 관료 사회의 '손타쿠'(忖度·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중을 살펴 알아서 처리하는 일)나 공문서 폐기·조작 등 부정적인 측면도 추궁받았다. 공문서 조작을 강요받아 자살한 재무성 직원의 유족은 지금도 재조사를 요구하며 정권의 설명 책임을 묻고 있다. 그동안 국민이 의문을 품었던 여러 의혹에 대해 정치인으로서 설명 책임을 다했는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6년 5월 27일, 아베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원폭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② 신원미상의 신문 기자

"총리는 정치적 유산으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을 꼽았다. 올해는 피폭 75년, 종전 75년으로 모든 국민이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긴 1년이었다. 총리는 많은 피폭자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분들을 만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일은 총리 가슴에 어떻게 와 닿았나? 임기 중에 평화안전법제, 안전보장 관련법 등으로 국민 여론을 분열시켰다. 평화 문제를 마주할 수 있는가?"

③️ 에가와 쇼코(江川紹子)/프리 저널리스트

"긴급재난지원금 10만 엔을 줄 때 온라인 신청을 받아놓고는 지자체 공무원이 수작업을 했다. 코로나19로 일본이 얼마나 IT 후진국인지 노출됐다. 아베 정권은 2013년에 새로운 IT 전략을 세워 2020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이용·활용 사회 실현을 목표로 했다. 총리도 '세계를 뒤쫓아가선 안 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 뒤처진 건 분명하다. 원인은 뭔가?"

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3월 2일 기자들이 회견에 앞서 질문 내용을 미리 전달한 문서인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④ ️진보(神保) 데쓰오/비디오뉴스닷컴

"아베 정권은 과거 정권에 비해 매우 철저한 미디어 대책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기자회견 때 질문을 미리 적어 낸 언론사 기자의 질문만 받았다. 그건 총리 자신의 지시였나, 아니면 실무진이 했고 총리는 몰랐던 일인가? 만약 몰랐다면 질문과 답변 내용이 적힌 메모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나? 이런 미디어와 정치 관계가 민주주의에 합당한 일인가?"

⑤ 가와구치(川口) 후미오/서일본(西日本)신문

"모리토모(森友)·가케(加計) 학원, '벚꽃을 보는 모임' 문제 등으로 국민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코로나19 대책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정권의 사물화(私物化·사유화)'가 원인 아닌가? 이는 단순히 국민의 오해인가? 총리 자신이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 알려달라."

아베 총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5개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답변은 '책임 회피형'이었습니다. "공문서 관리가 충분한지는 국민 여러분이 판단할 것이다", "(IT 후진국 문제는) 이번에 문제가 분명해졌으니 다음 리더가 해결해 나갈 것이다", "세계가 협력해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 "정치를 사물화한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사임함에 따라 후임 총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왼쪽부터 고노 다로 방위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
전투기는 공중에서 고장 나면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회'(Last Chance·최종기회점검)라고 불리는 곳에서 최종 점검을 받은 뒤에야 활주로를 내달릴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혹시나 놓칠 수 있는 작은 부분, 모든 실수를 점검하는, 말 그대로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베 정권 내내 총리관저는 인사권을 틀어쥐고 관료들에 대한 압도적인 장악력을 발휘했습니다. 여론이 반대하는 정책도 의석수 우위를 앞세워 밀어 붙였습니다. 7년 8개월의 무소불위 정권을 내놓는 마지막 순간에 받았던 질문들을 더 빨리, 더 자주 경청했다면 그의 퇴장이 조금은 덜 초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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