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페이지 23번”…유튜브에 등장한 北 난수방송?

입력 2020.08.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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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유튜브 ‘평양방송’에 올라온 ‘난수방송’ 영상 캡처

8월 29일 유튜브 ‘평양방송’에 올라온 ‘난수방송’ 영상 캡처

지난 주말 북한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튜브 '평양방송' 계정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28일에 게재된 것으로 기록돼있지만, 공개된 시점은 하루 뒤인 29일입니다. 제목은 '0100011001-001'로, 분량은 1분 5초가량이었습니다. 영상 속 아나운서는 "지금부터 710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정보기술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다"면서 "564페이지 23번, 479페이지 -19번, 694페이지 20번…" 등 숫자 조합을 낭독했습니다. 이 영상은 한때 조회 수 1만 회를 훌쩍 넘겼다가 당일 오후 7시쯤 갑자기 삭제됐습니다.

■ 유튜브 영상, 北 '난수(亂數) 방송'과 같은 형식

이 영상은 '난수방송'과 형식이 같습니다.

난수방송은 암호를 전달하는 방송으로 송·수신자만 알고 있는 책자나 해독용 난수표를 이용해 지령문을 전달하는 방식인데요. '564페이지 23번'이라면 특정 책자의 564페이지의 23번째 글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숫자들을 방송하지만, 특정한 규칙성이 없어 송수신자 외에는 해독이 어렵습니다.

한국의 경우 난수방송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릴 때 사용돼왔습니다. 북한은 통상 평양방송을 통한 라디오 방송으로 난수방송을 해왔는데요. 자정쯤 김일성, 김정일 찬양가를 내보낸 뒤 난수를 읽어 남파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북한 난수방송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단됐으나 16년 만인 2016년 6월에 재개됐습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3월 7일과 13일에 난수방송이 이뤄졌습니다.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제작해서 업로드한 것이 맞다면, 유튜브를 통한 난수방송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 국내 보수성향 단체 '전대협' 패러디물과 내용 같아

하지만 이번에 '평양방송'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은 남파 공작원 지령용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번 영상 내용이 국내 우파성향 청년단체인 신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1년여 전에 올린 영상과 같기 때문입니다. 평양방송 계정에 올라온 영상에 등장하는 숫자가 지난해 7월 9일 전대협이 올린 '라디오를 틀면 나오는 음산하고 이상한 소리가? 전대협 난수방송' 영상 내용과 동일한 것입니다.

김수현 전대협 대표는 KBS와의 통화에서 "이번에 올라온 유튜브 난수방송이 우리가 지난해 7월 제작한 영상과 내용이 같은 것을 확인했다"면서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숫자들이 같았다"고 밝혔습니다. 김 대표는 지난해 올린 영상과 관련해 "아직도 남파 간첩들이 많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또래 국민들에게 알려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재미로 제작한 방송이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패러디물인 셈입니다.

■ 북한당국이 제작했다면 왜?

'지령용'이 아니라면, 이 같은 영상을 올린 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일단 이번 영상을 북한 당국이 올린 것이라고 전제하고, 전문가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올린 것인지에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굳이 해석한다면 북한의 대남 공작 파트에서 자신들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존재감 과시용 차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임 교수는 "현재 내치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이 군사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 공작적인 차원에서 남북 간 긴장을 유지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분석은 이번 영상이 남한 내부에서 북한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 인식을 키우는, 이른바 '가짜뉴스'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 내부의 반북 단체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전대협이 올린 패러디물을 직접 겨냥한 게 아니냐는 분석입니다. 임을출 교수는 "남한 내부에서 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행위들을 '다 보고 있다', '기술적으로 모니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미 북한은 해킹이라든지 사이버 공작과 관련해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기술적 우위를 과시하며 남한 내부의 '북한 혐오 콘텐츠'와 관련해 얼마든지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 애초에 북한당국이 올린 영상이 아닐 수도

정부는 이 유튜브 채널과 관련해 북한당국이 운영하는 계정인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오늘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매체 현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영상, 애초에 북한당국이 제작한 게 아닐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계정 해킹으로 인한 업로드일 가능성도 있고, 평양방송 유튜브 계정 자체가 북한당국의 채널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당국이 가장 정교하게 하는 것이 선전선동인데, 굳이 남한의 패러디 영상과 똑같이 만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 "과거 북한의 선전선동 행위에 합리적으로 비춰봤을 때 북한당국이 올린 방송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북한 전문가인 미국의 마틴 윌리엄스 연구원(노스코리아테크 운영자)도 트위터를 통해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올린 게 아니라고 주장했는데요. 마틴 윌리엄스는 "북한의 난수방송이 나왔다는 유튜브 채널은 북한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북한(DPRK)은 절대로 자신들을 북한(North Korea)으로 부르지 않으며 제1 언어로 스페인어가 쓰이고 그 뒤에 영어와 한국어가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의 공식 계정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북한당국이 제작한 영상이 아니라면, 지난 주말 동안 있었던 '난수방송' 논란은 모두 허무한 해프닝인 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이우영 교수는 최근 유튜브를 중심으로 북한 관련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이 교수는 "최근 특히 영국이나 중국의 상업적인 언론매체에서 확인되지 않은 북한 관련 선전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 많아졌는데, 우리 언론들이 무작정 받아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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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4페이지 23번”…유튜브에 등장한 北 난수방송?
    • 입력 2020-08-31 15:55:03
    취재K

8월 29일 유튜브 ‘평양방송’에 올라온 ‘난수방송’ 영상 캡처

지난 주말 북한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튜브 '평양방송' 계정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28일에 게재된 것으로 기록돼있지만, 공개된 시점은 하루 뒤인 29일입니다. 제목은 '0100011001-001'로, 분량은 1분 5초가량이었습니다. 영상 속 아나운서는 "지금부터 710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정보기술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다"면서 "564페이지 23번, 479페이지 -19번, 694페이지 20번…" 등 숫자 조합을 낭독했습니다. 이 영상은 한때 조회 수 1만 회를 훌쩍 넘겼다가 당일 오후 7시쯤 갑자기 삭제됐습니다.

■ 유튜브 영상, 北 '난수(亂數) 방송'과 같은 형식

이 영상은 '난수방송'과 형식이 같습니다.

난수방송은 암호를 전달하는 방송으로 송·수신자만 알고 있는 책자나 해독용 난수표를 이용해 지령문을 전달하는 방식인데요. '564페이지 23번'이라면 특정 책자의 564페이지의 23번째 글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숫자들을 방송하지만, 특정한 규칙성이 없어 송수신자 외에는 해독이 어렵습니다.

한국의 경우 난수방송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릴 때 사용돼왔습니다. 북한은 통상 평양방송을 통한 라디오 방송으로 난수방송을 해왔는데요. 자정쯤 김일성, 김정일 찬양가를 내보낸 뒤 난수를 읽어 남파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북한 난수방송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단됐으나 16년 만인 2016년 6월에 재개됐습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3월 7일과 13일에 난수방송이 이뤄졌습니다.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제작해서 업로드한 것이 맞다면, 유튜브를 통한 난수방송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 국내 보수성향 단체 '전대협' 패러디물과 내용 같아

하지만 이번에 '평양방송'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은 남파 공작원 지령용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번 영상 내용이 국내 우파성향 청년단체인 신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1년여 전에 올린 영상과 같기 때문입니다. 평양방송 계정에 올라온 영상에 등장하는 숫자가 지난해 7월 9일 전대협이 올린 '라디오를 틀면 나오는 음산하고 이상한 소리가? 전대협 난수방송' 영상 내용과 동일한 것입니다.

김수현 전대협 대표는 KBS와의 통화에서 "이번에 올라온 유튜브 난수방송이 우리가 지난해 7월 제작한 영상과 내용이 같은 것을 확인했다"면서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숫자들이 같았다"고 밝혔습니다. 김 대표는 지난해 올린 영상과 관련해 "아직도 남파 간첩들이 많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또래 국민들에게 알려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재미로 제작한 방송이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패러디물인 셈입니다.

■ 북한당국이 제작했다면 왜?

'지령용'이 아니라면, 이 같은 영상을 올린 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일단 이번 영상을 북한 당국이 올린 것이라고 전제하고, 전문가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올린 것인지에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굳이 해석한다면 북한의 대남 공작 파트에서 자신들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존재감 과시용 차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임 교수는 "현재 내치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이 군사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 공작적인 차원에서 남북 간 긴장을 유지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분석은 이번 영상이 남한 내부에서 북한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 인식을 키우는, 이른바 '가짜뉴스'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 내부의 반북 단체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전대협이 올린 패러디물을 직접 겨냥한 게 아니냐는 분석입니다. 임을출 교수는 "남한 내부에서 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행위들을 '다 보고 있다', '기술적으로 모니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미 북한은 해킹이라든지 사이버 공작과 관련해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기술적 우위를 과시하며 남한 내부의 '북한 혐오 콘텐츠'와 관련해 얼마든지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 애초에 북한당국이 올린 영상이 아닐 수도

정부는 이 유튜브 채널과 관련해 북한당국이 운영하는 계정인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오늘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매체 현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영상, 애초에 북한당국이 제작한 게 아닐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계정 해킹으로 인한 업로드일 가능성도 있고, 평양방송 유튜브 계정 자체가 북한당국의 채널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당국이 가장 정교하게 하는 것이 선전선동인데, 굳이 남한의 패러디 영상과 똑같이 만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 "과거 북한의 선전선동 행위에 합리적으로 비춰봤을 때 북한당국이 올린 방송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북한 전문가인 미국의 마틴 윌리엄스 연구원(노스코리아테크 운영자)도 트위터를 통해 이번 영상이 북한당국이 올린 게 아니라고 주장했는데요. 마틴 윌리엄스는 "북한의 난수방송이 나왔다는 유튜브 채널은 북한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북한(DPRK)은 절대로 자신들을 북한(North Korea)으로 부르지 않으며 제1 언어로 스페인어가 쓰이고 그 뒤에 영어와 한국어가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의 공식 계정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북한당국이 제작한 영상이 아니라면, 지난 주말 동안 있었던 '난수방송' 논란은 모두 허무한 해프닝인 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이우영 교수는 최근 유튜브를 중심으로 북한 관련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이 교수는 "최근 특히 영국이나 중국의 상업적인 언론매체에서 확인되지 않은 북한 관련 선전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 많아졌는데, 우리 언론들이 무작정 받아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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