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난민 더 데려오라’는데…독일 국민들, 왜?

입력 2020.09.11 (10:06) 수정 2020.09.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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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명 시위대 "당장 난민 데려와라"

9일 저녁(현지시간) KBS 베를린지국이 있는 연방프레스센터 주변이 소란해졌다. 사무실 밖에서 사람들의 구호가 들려왔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시위대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는데,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최근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통제 관련 시위인가 했다. 연방총리실과 의회, 정부기관 등이 인근에 있어 주변 도로에서 시위가 자주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말이 아닌 평일이고 저녁 시간인 점이 특이했다. 선두에 선 시위대가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난민수용소를 해체하라. 당장 (난민을) 데려오라"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행렬이 지나가기까지 1시간 정도가 걸린 듯하다.

“수용소를 해체하라, 당장 데려오라!”/사진 AFP“수용소를 해체하라, 당장 데려오라!”/사진 AFP

독일 40여 개 도시 동시다발 시위

베를린 경찰은 집회 참가 인원을 3천 명으로 추산했다. 시위대가 모인 건 베를린만이 아니었다.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라이프치히 등 4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고 난민 구호기관 '제브뤼케'는 밝혔다.

시위대의 요구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있는 '모리아' 난민수용소를 해체하고, 거기서 거주하는 난민들을 독일로 신속히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빈자리가 있다"고 외쳤다. 또 유럽연합의 미온적 태도를 지적하며 "EU는 부끄러운 줄 알라"고 비판했다.

그리스 난민수용소에 대형 화재…만 2천여 명 갈 곳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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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들이 평일 저녁에 긴급히 시위를 조직한 건 하루 전 발생한 그리스 난민수용소의 화재 때문이었다. 그리스 동쪽 에게 해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는 그리스 최대의 난민 수용시설인 모리아 난민수용소가 있다.

이 수용소에서 8일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시속 70km의 강풍을 타고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수용소 대부분 시설이 잿더미로 변했다. 난민들은 생필품도 제대로 못 챙긴 채 황급히 대피했다. 사망자가 안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리아 난민수용소의 최대 정원은 2천 7백여 명이지만, 현재 거주자는 4배가 넘는 만 2천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당연히 화재 이전에도 생활 환경은 열악했는데, 코로나19가 난민들이 처한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용소 난민 가운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그리스 정부는 지난 2일부터 난민 전체를 수용소 안에 머무르게 한 채 수용소 출입을 통제했다. 수용소 안에서 소요가 일어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화재가 났다. 소방당국은 "수용소 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불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장 오갈 곳 없게 된 난민 만 2천여 명을 어디에 수용할지가 당면 과제가 됐다. 그리스 정부는 난민 2천 명을 해군 함정과 페리에 임시 수용하고,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와 10대 청소년은 유럽연합 지원을 받아 본토로 이송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자리가 있다" "EU 압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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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40여 개 도시의 동시다발 시위는 이런 상황에서 화재 하루 만에 신속히 개최됐다. 독일 18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우리에게 빈자리가 있다"며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천 명을 받겠다고 했고, 베를린시도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다른 연방주들도 잇따라 난민 수용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과 시민들은 제호퍼 내무장관이 난민 수용을 막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내무부는 유럽연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며 비난의 화살을 EU 쪽으로 돌리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유럽연합을 압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정당은 극우 성향의 독일 대안당(AFD) 뿐이다.

2015년 대규모 난민 사태 이후 독일은 지금까지 18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난민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자 2015년 당시 메르켈 총리가 남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독일 국민은 왜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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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일 국민은 왜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가? 인도주의적 정신이 충만해서인가?

높은 시민의식이나 국민성 등 도덕적 기준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장은 말한다.

우선 난민문제를 다루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있다고 한다. 2015년 독일 정부가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다수 국민들이 거리에 나가 박수로 난민을 맞이하는 이른바 '환영의 문화'가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는 동안 난민 수용으로 인해 국가 재정 건전성이 흔들리지 않았고, 아직도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된다고 독일 국민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나 직업교육 체계를 통해 난민들을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인력으로 키워가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특히 10대 후반부터 20대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독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중간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셋째, 눈앞의 단기 이익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독일 사회에 존재한다고 이진 소장은 설명한다. 전쟁과 가난 등을 피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 하지만 이들이 처한 집단수용소의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 인간의 기본권리와 인도주의라는 가치를 생각하면 난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018년 독일 통합·이민재단의 전문가협의회 조사 결과 "난민을 계속 수용해야 한다"는 설문에 이민 배경이 없는 사람의 60%가 찬성했고, "장기적으로 난민은 독일에 문화적·경제적 부를 가져다줄 것이다"란 설문에는 70%가 동의했다. 2017년 베르텔스만 재단 조사에서는 "독일이 난민 수용으로 인한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란 질문에 60%가 찬성했다.

이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독일 국민 전체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소 난민 문제에 관심이 많고 정부 난민정책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다수 시위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화재로 하루아침에 거처를 잃어버린 만 2천여 명의 난민을 위해 "우리가 더 받아야 한다"며 거리에 나서는 독일 국민들의 행동은 분명 이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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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난민 더 데려오라’는데…독일 국민들, 왜?
    • 입력 2020-09-11 10:06:07
    • 수정2020-09-14 13:57:58
    특파원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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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명 시위대 "당장 난민 데려와라"

9일 저녁(현지시간) KBS 베를린지국이 있는 연방프레스센터 주변이 소란해졌다. 사무실 밖에서 사람들의 구호가 들려왔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시위대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는데,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최근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통제 관련 시위인가 했다. 연방총리실과 의회, 정부기관 등이 인근에 있어 주변 도로에서 시위가 자주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말이 아닌 평일이고 저녁 시간인 점이 특이했다. 선두에 선 시위대가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난민수용소를 해체하라. 당장 (난민을) 데려오라"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행렬이 지나가기까지 1시간 정도가 걸린 듯하다.

“수용소를 해체하라, 당장 데려오라!”/사진 AFP
독일 40여 개 도시 동시다발 시위

베를린 경찰은 집회 참가 인원을 3천 명으로 추산했다. 시위대가 모인 건 베를린만이 아니었다.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라이프치히 등 4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고 난민 구호기관 '제브뤼케'는 밝혔다.

시위대의 요구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있는 '모리아' 난민수용소를 해체하고, 거기서 거주하는 난민들을 독일로 신속히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빈자리가 있다"고 외쳤다. 또 유럽연합의 미온적 태도를 지적하며 "EU는 부끄러운 줄 알라"고 비판했다.

그리스 난민수용소에 대형 화재…만 2천여 명 갈 곳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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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들이 평일 저녁에 긴급히 시위를 조직한 건 하루 전 발생한 그리스 난민수용소의 화재 때문이었다. 그리스 동쪽 에게 해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는 그리스 최대의 난민 수용시설인 모리아 난민수용소가 있다.

이 수용소에서 8일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시속 70km의 강풍을 타고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수용소 대부분 시설이 잿더미로 변했다. 난민들은 생필품도 제대로 못 챙긴 채 황급히 대피했다. 사망자가 안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리아 난민수용소의 최대 정원은 2천 7백여 명이지만, 현재 거주자는 4배가 넘는 만 2천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당연히 화재 이전에도 생활 환경은 열악했는데, 코로나19가 난민들이 처한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용소 난민 가운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그리스 정부는 지난 2일부터 난민 전체를 수용소 안에 머무르게 한 채 수용소 출입을 통제했다. 수용소 안에서 소요가 일어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화재가 났다. 소방당국은 "수용소 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불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장 오갈 곳 없게 된 난민 만 2천여 명을 어디에 수용할지가 당면 과제가 됐다. 그리스 정부는 난민 2천 명을 해군 함정과 페리에 임시 수용하고,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와 10대 청소년은 유럽연합 지원을 받아 본토로 이송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자리가 있다" "EU 압박해야"

사진 DPA
독일 40여 개 도시의 동시다발 시위는 이런 상황에서 화재 하루 만에 신속히 개최됐다. 독일 18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우리에게 빈자리가 있다"며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천 명을 받겠다고 했고, 베를린시도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다른 연방주들도 잇따라 난민 수용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과 시민들은 제호퍼 내무장관이 난민 수용을 막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내무부는 유럽연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며 비난의 화살을 EU 쪽으로 돌리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유럽연합을 압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정당은 극우 성향의 독일 대안당(AFD) 뿐이다.

2015년 대규모 난민 사태 이후 독일은 지금까지 18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난민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자 2015년 당시 메르켈 총리가 남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독일 국민은 왜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가?

사진 DPA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일 국민은 왜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가? 인도주의적 정신이 충만해서인가?

높은 시민의식이나 국민성 등 도덕적 기준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장은 말한다.

우선 난민문제를 다루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있다고 한다. 2015년 독일 정부가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다수 국민들이 거리에 나가 박수로 난민을 맞이하는 이른바 '환영의 문화'가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는 동안 난민 수용으로 인해 국가 재정 건전성이 흔들리지 않았고, 아직도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된다고 독일 국민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나 직업교육 체계를 통해 난민들을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인력으로 키워가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특히 10대 후반부터 20대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독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중간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셋째, 눈앞의 단기 이익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독일 사회에 존재한다고 이진 소장은 설명한다. 전쟁과 가난 등을 피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 하지만 이들이 처한 집단수용소의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 인간의 기본권리와 인도주의라는 가치를 생각하면 난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018년 독일 통합·이민재단의 전문가협의회 조사 결과 "난민을 계속 수용해야 한다"는 설문에 이민 배경이 없는 사람의 60%가 찬성했고, "장기적으로 난민은 독일에 문화적·경제적 부를 가져다줄 것이다"란 설문에는 70%가 동의했다. 2017년 베르텔스만 재단 조사에서는 "독일이 난민 수용으로 인한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란 질문에 60%가 찬성했다.

이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독일 국민 전체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소 난민 문제에 관심이 많고 정부 난민정책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다수 시위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화재로 하루아침에 거처를 잃어버린 만 2천여 명의 난민을 위해 "우리가 더 받아야 한다"며 거리에 나서는 독일 국민들의 행동은 분명 이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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