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1초…3명을 살린 ‘의사’를 기억하며

입력 2020.09.11 (12:50) 수정 2020.09.11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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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에 가해질 위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명, 재산을 구하러 나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은 예우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분들은 의사자(義死者), 말 그대로 '의롭게 사망한 사람'이라 불립니다.

지난해 조현병 환자의 흉기에 찔려 숨진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정부가 임 교수를 '의사자'로 인정하지 않아 논란이 됐었는데, 법원이 이런 정부의 처분이 위법하다며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 멈춰서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쳐" 손짓하다 참변

앞서 조현병 환자 박 모 씨는 지난 2018년 12월 31일 흉기를 구입해 임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가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 접수를 했습니다. 오후 5시 39분, 임 교수가 박 씨를 진료하던 중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가자 박 씨는 진료실 문을 잠그고 준비해둔 회칼을 꺼냈고, 임 교수는 진료실과 연결된 옆 진료실로 대피했습니다.

진료실 밖에 있던 다른 간호사는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옆 진료실의 문을 열었고, 도망쳐 나오는 임 교수와 마주쳤습니다. 임 교수는 이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복도를 뛰어갔습니다.

이후 박 씨가 흉기를 들고 뛰쳐나와 진료실 앞 간호사를 쫓자 임 교수는 복도에서 갑자기 멈춰서 접수처에 앉아있던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피하라는 손짓을 하고, 진료실 앞 간호사가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두 차례 뒤돌아섰습니다.

이를 본 박 씨는 재차 임 교수를 쫓아갔고, 임 교수는 다시 달아나며 또 다른 간호사에게 "경찰에 전화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지만, 복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결국 쫓아온 박 씨의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사건 범행 직후 병원 보안요원이 출동해 박 씨를 제지했고, 5시 50분에 도착한 경찰이 박 씨를 검거했습니다.

박 씨는 수사기관에서 흉기를 왜 가져갔느냐는 질문에 "대화가 안 되면 (임 교수를) 죽이려고 가져갔죠. 왜 가져갔겠어. 사람 다 똑같은 거 아니야?"라는 답변을 하고, 임 교수가 근무하는지 미리 확인했느냐, 언제부터 임 교수를 살해할 생각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그냥 갔다"며 "타깃으로 정해지면 죽여야 하는 거죠. 그 의사가 벨을 누르는 순간,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면서 죽여야겠다는 타깃으로 잡은 거죠"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족들은 간호사를 지키려다 사망한 임 교수를 의사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보건복지부가 이를 거부하자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 핵심 쟁점은 '적극적·직접적 행위' 여부…법원 "있었다"

의사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직무 외의 행위로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하다 △사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임 교수가 의사자의 여러 요건 중 '적극적·직접적 행위'를 했는지 여부였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유족들에게 임 교수가 '적극적·직접적 행위'를 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불인정' 결정을 내렸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이상훈)는 어제(10일) 임 교수의 유족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사자인정거부처분 취소소송 선고공판을 열고 "임 교수는 박 씨의 범죄행위를 제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이 가중되는 것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재산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를 한 사람으로서 그 과정에서 이 사건 범행을 당해 사망했으므로, 의사상자법 제2조 제1호의 '직무 외의 행위로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에 해당된다"고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박 씨의 공격은 임 교수를 상대로 시작되었지만, 박 씨가 이 사건 관계자들이 자신의 머릿속에 폭탄을 넣어뒀다는 망상을 겪고 있었고, 임 교수가 벨을 누른 행위가 살인을 마음먹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단 취지로 진술한 점, 양극성 정동장애 증상이 나타난 점, 임 교수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간호사에게도 공격을 시도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병원에 있던 사람은 누구든 박 씨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특히 "임 교수는 진료실을 빠져나가면서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말했고, 복도를 이동하다 멈춰서 박 씨와 간호사의 동태를 살피고 간호사가 박 씨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가!'라고 말했는데, 이는 임 교수가 범인의 주의를 끌어 박 씨에 의한 공격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행위이자 간호사들에게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조치를 함으로써 타인의 생명·신체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임 교수가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간호사가 공격당하는 동안 임 교수가 대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멈춰 서서 또 다른 간호사에게 대피와 신고를 고지하지 않았다면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법원 "불과 11초…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 가능한 최선의 행동"

법원은 이어 "박 씨는 178cm, 85kg의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고 회칼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달리기에 용이한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임 교수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어 스스로 박 씨의 공격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며 "임 교수가 맨손으로 박 씨에게 맞서더라도 박 씨를 제지하기는 매우 어려운 반면, 박 씨의 주의를 적절히 끌면서 박 씨의 공격행위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 상황임을 알리는 것은 박 씨의 공격행위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보다 효율적인 구조 행위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아울러 법원은 "임 교수가 진료실에 뛰쳐나와 범행을 당하기까지 불과 11초에 불과해 그 시간에 다른 방식의 구조행위를 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단 점을 고려하면, 임 교수의 구조행위는 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의사인 임 교수에게 기대 가능한 최선의 행동으로서 직접적·적극적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설령 임 교수의 행위를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로 보지 않더라도 이는 통상적 구조행위에 해당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고, 앞서 든 사정에 의하면 임 교수가 구조행위를 개시한 직후 이 사건 범행을 당해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와 밀접한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유족의 청구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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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1 12:50:40
    • 수정2020-09-11 12:52:50
    취재K
자기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에 가해질 위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명, 재산을 구하러 나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은 예우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분들은 의사자(義死者), 말 그대로 '의롭게 사망한 사람'이라 불립니다.

지난해 조현병 환자의 흉기에 찔려 숨진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정부가 임 교수를 '의사자'로 인정하지 않아 논란이 됐었는데, 법원이 이런 정부의 처분이 위법하다며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 멈춰서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쳐" 손짓하다 참변

앞서 조현병 환자 박 모 씨는 지난 2018년 12월 31일 흉기를 구입해 임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가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 접수를 했습니다. 오후 5시 39분, 임 교수가 박 씨를 진료하던 중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가자 박 씨는 진료실 문을 잠그고 준비해둔 회칼을 꺼냈고, 임 교수는 진료실과 연결된 옆 진료실로 대피했습니다.

진료실 밖에 있던 다른 간호사는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옆 진료실의 문을 열었고, 도망쳐 나오는 임 교수와 마주쳤습니다. 임 교수는 이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복도를 뛰어갔습니다.

이후 박 씨가 흉기를 들고 뛰쳐나와 진료실 앞 간호사를 쫓자 임 교수는 복도에서 갑자기 멈춰서 접수처에 앉아있던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피하라는 손짓을 하고, 진료실 앞 간호사가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두 차례 뒤돌아섰습니다.

이를 본 박 씨는 재차 임 교수를 쫓아갔고, 임 교수는 다시 달아나며 또 다른 간호사에게 "경찰에 전화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지만, 복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결국 쫓아온 박 씨의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사건 범행 직후 병원 보안요원이 출동해 박 씨를 제지했고, 5시 50분에 도착한 경찰이 박 씨를 검거했습니다.

박 씨는 수사기관에서 흉기를 왜 가져갔느냐는 질문에 "대화가 안 되면 (임 교수를) 죽이려고 가져갔죠. 왜 가져갔겠어. 사람 다 똑같은 거 아니야?"라는 답변을 하고, 임 교수가 근무하는지 미리 확인했느냐, 언제부터 임 교수를 살해할 생각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그냥 갔다"며 "타깃으로 정해지면 죽여야 하는 거죠. 그 의사가 벨을 누르는 순간,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면서 죽여야겠다는 타깃으로 잡은 거죠"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족들은 간호사를 지키려다 사망한 임 교수를 의사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보건복지부가 이를 거부하자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 핵심 쟁점은 '적극적·직접적 행위' 여부…법원 "있었다"

의사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직무 외의 행위로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하다 △사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임 교수가 의사자의 여러 요건 중 '적극적·직접적 행위'를 했는지 여부였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유족들에게 임 교수가 '적극적·직접적 행위'를 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불인정' 결정을 내렸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이상훈)는 어제(10일) 임 교수의 유족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사자인정거부처분 취소소송 선고공판을 열고 "임 교수는 박 씨의 범죄행위를 제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이 가중되는 것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재산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를 한 사람으로서 그 과정에서 이 사건 범행을 당해 사망했으므로, 의사상자법 제2조 제1호의 '직무 외의 행위로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에 해당된다"고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박 씨의 공격은 임 교수를 상대로 시작되었지만, 박 씨가 이 사건 관계자들이 자신의 머릿속에 폭탄을 넣어뒀다는 망상을 겪고 있었고, 임 교수가 벨을 누른 행위가 살인을 마음먹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단 취지로 진술한 점, 양극성 정동장애 증상이 나타난 점, 임 교수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간호사에게도 공격을 시도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병원에 있던 사람은 누구든 박 씨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특히 "임 교수는 진료실을 빠져나가면서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말했고, 복도를 이동하다 멈춰서 박 씨와 간호사의 동태를 살피고 간호사가 박 씨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다른 간호사에게 '신고해! 도망가!'라고 말했는데, 이는 임 교수가 범인의 주의를 끌어 박 씨에 의한 공격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행위이자 간호사들에게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조치를 함으로써 타인의 생명·신체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임 교수가 간호사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간호사가 공격당하는 동안 임 교수가 대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멈춰 서서 또 다른 간호사에게 대피와 신고를 고지하지 않았다면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법원 "불과 11초…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 가능한 최선의 행동"

법원은 이어 "박 씨는 178cm, 85kg의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고 회칼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달리기에 용이한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임 교수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어 스스로 박 씨의 공격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며 "임 교수가 맨손으로 박 씨에게 맞서더라도 박 씨를 제지하기는 매우 어려운 반면, 박 씨의 주의를 적절히 끌면서 박 씨의 공격행위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 상황임을 알리는 것은 박 씨의 공격행위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보다 효율적인 구조 행위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아울러 법원은 "임 교수가 진료실에 뛰쳐나와 범행을 당하기까지 불과 11초에 불과해 그 시간에 다른 방식의 구조행위를 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단 점을 고려하면, 임 교수의 구조행위는 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의사인 임 교수에게 기대 가능한 최선의 행동으로서 직접적·적극적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설령 임 교수의 행위를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로 보지 않더라도 이는 통상적 구조행위에 해당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고, 앞서 든 사정에 의하면 임 교수가 구조행위를 개시한 직후 이 사건 범행을 당해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와 밀접한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유족의 청구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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