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무죄 판결, 제3의 판사 ‘범죄 혐의’ 들춰냈다

입력 2020.09.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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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사법농단’ 사건의 네 번째 무죄 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아직 확정 판결은 아니지만 기소 1년 반 만에 일단 혐의를 벗은 피고인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現 수원고등법원 부장판사)은 홀가분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번 판결에 따라 ‘범죄 혐의’가 보다 명확해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또 다른 현직 판사가 있습니다. 이태종 전 원장의 공범으로 지목돼 형사입건 됐지만 아직 기소 여부는 결정되지 않은, 나상훈 전 서울서부지방법원 기획법관(現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입니다.

수사기밀 보고는 인정했지만… 법원 “피고인 짓 아냐”

당초 이 전 원장은 2016년 서울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사무원 비리 수사 당시 검찰이 낸 영장청구서와 첨부된 수사기록에 적힌 수사기밀을 영장전담 판사 등을 통해 수집한 뒤, 그 내용을 5차례에 걸쳐 보고서로 정리해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누설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 등로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이 전 원장이 집행관사무소 수사 확대를 저지해야 한다는 법원행정처의 인식을 공유하면서, 기획법관이었던 나상훈 판사와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이 전 원장을 무죄라고 하면서도, 검찰이 지적한 사실관계는 상당 부분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영장 재판을 하는 판사들이나 감사 업무를 하던 법원 총무과를 통해 검찰의 수사기밀이 서부지법에서 수집됐고, 그 내용이 보고서 5건으로 정리돼 상급기관인 법원행정처에 보고됐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의 행위자는 기획법관이던 나상훈 판사였고, 이 전 원장은 수사기밀 수집이나 법원행정처 보고에 대한 지시를 하지 않아 공모자로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법농단 수사팀이 이번 판결을 두고 “재판부가 공무상비밀누설은 마치 기획법관의 ‘단독 범행’인 것처럼 결론 내렸다”라고 평가한 이유입니다.

2018년 8월 29일 나상훈 판사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2018년 8월 29일 나상훈 판사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법원 “수사기능에 장애 초래할 위험 있는 정보 수집됐다”

재판부는 나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적힌 일부 내용이 왜 공무상비밀누설죄에서 말하는 ‘비밀’로 인정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2016년 10월 18일 나 판사가 임종헌 차장에게 보낸 “서울서부지방법원 집행관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관련 보고”라는 보고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집행관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A 씨와 B 씨의 계좌에서 “자기 월급 이외의 많은 입금 내역이 발견됐다”라는 내용이 적혔고, 이는 영장전담판사가 나 판사에게 전해준 얘기라고 적혀 있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의자 측에 알려질 경우 피의자가 그에 맞추어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 진술을 준비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며 “수사기밀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주일 뒤 A 씨와 B 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나 판사는 영장전담 판사의 협조로 영장재판을 위해 법원에 한시적으로 제출된 검찰 수사기록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임종헌 차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수사기록 5권 2545쪽 수사보고서 내용”이라며 A 씨와 B 씨의 혐의와 검찰이 확보한 관련 증거들을 A4용지 반 쪽 이상 길게 받아 적었는데요. 재판부는 이 부분도 “수사기관이 현재 파악하고 있는 구체적인 혐의사실, 증거관계, 피의자들의 행적 등에 관한 것으로 수사기밀에 해당함이 명백하다”라고 했습니다.

나 판사가 같은해 11월 4일 “서울서부 집행관사무원 수사 등 상황보고 Ⅲ”라는 제목의 행정처 송부 보고서에 “피의자 A, B가 영장실질심사과정에서 C물류와 D물류로부터 동일하게 금원을 지급받았다고 진술함”이라고 적은 부분도 문제가 됐습니다. “외부에 알려질 경우 관련자 등이 증거를 인멸하는 등의 위험이 있어 영장재판의 비밀에 해당한다”는 재판부 판단입니다.

모두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재판부는 검찰이 공소사실에서 특정한 5개 보고서 25개 항 가운데 12개 항에 대해, 그 내용이 수사기밀에 해당하거나 일부분이 수사기밀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보고 문건의 내용 중 일부는 외부에 알려질 경우 수사기관의 범죄수사 기능에 장애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으로서 비밀에 해당한다. […] 나상훈이 작성한 이 사건 보고 문건의 내용 중에는 나상훈의 의견에 해당하거나 감사 과정에서 파악된 것으로서 수사기밀로 볼 수 없는 것도 상당수 있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수사기밀로서 보호할 가치가 유지되고 있던 것이어서 이 부분에 한해서는 나상훈이 기획법관 직무와 관련하여 알게 된 직무상 비밀로 봄이 타당하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외경서울서부지방법원 외경

비밀‘누설’인지는 판단 안해

하지만 재판부는 나 판사의 보고 행위가 “수사기밀의 누설”에 해당하는지, 즉 공무상비밀누설죄가 성립되는지에 대해서는 정작 판단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적었습니다. “피고인의 공모 사실이 인정되지 않고, 공범으로 적시된 나상훈은 기소되지 않아 이에 대한 나상훈의 방어권 행사 및 심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이 사건 보고 행위가 누설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판단하지 않는다.”

재판부가 말을 아꼈지만, 일선 법원에서 파악된 수사기밀을 상급기관인 법원행정처에 보고하는 것을 “누설”로 볼 수 있는지는 이미 이 전 원장의 재판에서 다퉈진 바 있습니다. ‘누설’이라 함은 정보가 타인에게, 즉 밖으로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상 일선 법원과의 관계에서 법원행정처가 ‘내부’ 기관인지 ‘외부’ 기관인지는, 공무상비밀누설 성립 여부에 있어 하나의 쟁점이 됩니다.

검찰은 당연히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의 외부 기관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행정처에 대한 보고를 ‘기관 내부 보고’라고 본다면, 이는 “헌법상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헌법상 독립을 보장받는 법관을, 사법부라는 기관의 일개 구성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전 원장의 변호인은 “사법행정사무는 대법원장이 총괄하는 것으로 사법행정상 보고는 당연히 내부 보고이지 외부 보고가 될 수 없다”라고 맞섰습니다. 또 “재판의 독립은 법원행정처가 아닌 같은 법원 내부 구성원도 침해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이를 근거로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려 한다면 법원행정처만 외부로 볼 수 없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변호인은 또 검찰 논리대로 행정처를 ‘외부 기관’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무상비밀누설은 여전히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공무상비밀누설죄의 보호법익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누설에 의해 위협받는 ‘국가의 기능’이고, “상급기관에 대한 정보보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가기능에 장애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 위험이 당연히 부정된다”라는 변론을 펼쳤습니다.

이 쟁점은 사실 지난 2월 선고된 또 다른 ‘사법농단’ 사건 판결에서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 영장재판 과정에서 파악한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기밀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혐의로 기소된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의 사건인데요. 당시 재판부는 행정처에 대한 수석부장판사의 정보 보고는 “법원 내부의 보고”라고 했습니다. 특히 이같은 보고가 위법하기는커녕, “사법행정상의 필요와 사법부에 대한 신뢰 확보 방안 마련”을 위해 사법행정 담당자로서 “보고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임종헌 차장에게 보고된 수사정보가 “수사기관의 범죄수사 기능에 장애를 초래했거나 그러한 위험을 유발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라고도 밝혔습니다.

나상훈 판사가 추후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다면, 그 역시 이와 같은 논리로 무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위증’ 가능성도 시사…‘사법농단’ 추가 기소자 나올까?

그 외에도 재판부는 이태종 전 원장의 공무상비밀누설 공모 여부를 살피는 과정에서, 나상훈 판사의 위증 가능성을 시사하는 판단도 내놨습니다.

나 판사는 법정에 나와 문제가 된 일부 보고서를 이 전 원장에게 보고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해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거나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라고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현직 부장판사가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선서를 하고도, 기억에 반하는 증언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목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르면 검찰이 나 판사를 기소하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데요. 다만 수사팀이 곧바로 추가 기소를 감행할지, 이 전 원장에 대한 상급심 판결을 받아본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 판사가 소속 법원장을 소위 ‘패싱(passing)’하고 법원행정처 차장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하급자인 나 판사의 보고서 송부 사실을 보고받고 이를 묵인한 것만으로도 최고책임자인 이 전 원장을 공범으로 봐야하는 것 아닌지 등을 수사팀이 항소심을 통해 더 다퉈보겠단 입장을 냈기 때문입니다.

사법농단 재판을 통해, 그동안 법원이 영장재판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조직 내부의 다른 목적을 위해 보고받고 활용한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데요. 법원행정처는 이같은 정보 보고의 근거가 된 “중요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 예규를 2018년 폐지했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판결이 정말 법리에 맞는 정당한 판결일지라도, 형사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서 확인된 조직의 여러 문제점을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법원의 당연한 책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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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농단 무죄 판결, 제3의 판사 ‘범죄 혐의’ 들춰냈다
    • 입력 2020-09-21 06:01:46
    취재K
지난 18일 ‘사법농단’ 사건의 네 번째 무죄 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아직 확정 판결은 아니지만 기소 1년 반 만에 일단 혐의를 벗은 피고인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現 수원고등법원 부장판사)은 홀가분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번 판결에 따라 ‘범죄 혐의’가 보다 명확해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또 다른 현직 판사가 있습니다. 이태종 전 원장의 공범으로 지목돼 형사입건 됐지만 아직 기소 여부는 결정되지 않은, 나상훈 전 서울서부지방법원 기획법관(現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입니다.

수사기밀 보고는 인정했지만… 법원 “피고인 짓 아냐”

당초 이 전 원장은 2016년 서울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사무원 비리 수사 당시 검찰이 낸 영장청구서와 첨부된 수사기록에 적힌 수사기밀을 영장전담 판사 등을 통해 수집한 뒤, 그 내용을 5차례에 걸쳐 보고서로 정리해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누설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 등로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이 전 원장이 집행관사무소 수사 확대를 저지해야 한다는 법원행정처의 인식을 공유하면서, 기획법관이었던 나상훈 판사와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이 전 원장을 무죄라고 하면서도, 검찰이 지적한 사실관계는 상당 부분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영장 재판을 하는 판사들이나 감사 업무를 하던 법원 총무과를 통해 검찰의 수사기밀이 서부지법에서 수집됐고, 그 내용이 보고서 5건으로 정리돼 상급기관인 법원행정처에 보고됐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의 행위자는 기획법관이던 나상훈 판사였고, 이 전 원장은 수사기밀 수집이나 법원행정처 보고에 대한 지시를 하지 않아 공모자로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법농단 수사팀이 이번 판결을 두고 “재판부가 공무상비밀누설은 마치 기획법관의 ‘단독 범행’인 것처럼 결론 내렸다”라고 평가한 이유입니다.

2018년 8월 29일 나상훈 판사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법원 “수사기능에 장애 초래할 위험 있는 정보 수집됐다”

재판부는 나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적힌 일부 내용이 왜 공무상비밀누설죄에서 말하는 ‘비밀’로 인정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2016년 10월 18일 나 판사가 임종헌 차장에게 보낸 “서울서부지방법원 집행관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관련 보고”라는 보고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집행관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A 씨와 B 씨의 계좌에서 “자기 월급 이외의 많은 입금 내역이 발견됐다”라는 내용이 적혔고, 이는 영장전담판사가 나 판사에게 전해준 얘기라고 적혀 있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의자 측에 알려질 경우 피의자가 그에 맞추어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 진술을 준비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며 “수사기밀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주일 뒤 A 씨와 B 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나 판사는 영장전담 판사의 협조로 영장재판을 위해 법원에 한시적으로 제출된 검찰 수사기록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임종헌 차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수사기록 5권 2545쪽 수사보고서 내용”이라며 A 씨와 B 씨의 혐의와 검찰이 확보한 관련 증거들을 A4용지 반 쪽 이상 길게 받아 적었는데요. 재판부는 이 부분도 “수사기관이 현재 파악하고 있는 구체적인 혐의사실, 증거관계, 피의자들의 행적 등에 관한 것으로 수사기밀에 해당함이 명백하다”라고 했습니다.

나 판사가 같은해 11월 4일 “서울서부 집행관사무원 수사 등 상황보고 Ⅲ”라는 제목의 행정처 송부 보고서에 “피의자 A, B가 영장실질심사과정에서 C물류와 D물류로부터 동일하게 금원을 지급받았다고 진술함”이라고 적은 부분도 문제가 됐습니다. “외부에 알려질 경우 관련자 등이 증거를 인멸하는 등의 위험이 있어 영장재판의 비밀에 해당한다”는 재판부 판단입니다.

모두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재판부는 검찰이 공소사실에서 특정한 5개 보고서 25개 항 가운데 12개 항에 대해, 그 내용이 수사기밀에 해당하거나 일부분이 수사기밀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보고 문건의 내용 중 일부는 외부에 알려질 경우 수사기관의 범죄수사 기능에 장애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으로서 비밀에 해당한다. […] 나상훈이 작성한 이 사건 보고 문건의 내용 중에는 나상훈의 의견에 해당하거나 감사 과정에서 파악된 것으로서 수사기밀로 볼 수 없는 것도 상당수 있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수사기밀로서 보호할 가치가 유지되고 있던 것이어서 이 부분에 한해서는 나상훈이 기획법관 직무와 관련하여 알게 된 직무상 비밀로 봄이 타당하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외경
비밀‘누설’인지는 판단 안해

하지만 재판부는 나 판사의 보고 행위가 “수사기밀의 누설”에 해당하는지, 즉 공무상비밀누설죄가 성립되는지에 대해서는 정작 판단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적었습니다. “피고인의 공모 사실이 인정되지 않고, 공범으로 적시된 나상훈은 기소되지 않아 이에 대한 나상훈의 방어권 행사 및 심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이 사건 보고 행위가 누설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판단하지 않는다.”

재판부가 말을 아꼈지만, 일선 법원에서 파악된 수사기밀을 상급기관인 법원행정처에 보고하는 것을 “누설”로 볼 수 있는지는 이미 이 전 원장의 재판에서 다퉈진 바 있습니다. ‘누설’이라 함은 정보가 타인에게, 즉 밖으로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상 일선 법원과의 관계에서 법원행정처가 ‘내부’ 기관인지 ‘외부’ 기관인지는, 공무상비밀누설 성립 여부에 있어 하나의 쟁점이 됩니다.

검찰은 당연히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의 외부 기관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행정처에 대한 보고를 ‘기관 내부 보고’라고 본다면, 이는 “헌법상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헌법상 독립을 보장받는 법관을, 사법부라는 기관의 일개 구성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전 원장의 변호인은 “사법행정사무는 대법원장이 총괄하는 것으로 사법행정상 보고는 당연히 내부 보고이지 외부 보고가 될 수 없다”라고 맞섰습니다. 또 “재판의 독립은 법원행정처가 아닌 같은 법원 내부 구성원도 침해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이를 근거로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려 한다면 법원행정처만 외부로 볼 수 없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변호인은 또 검찰 논리대로 행정처를 ‘외부 기관’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무상비밀누설은 여전히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공무상비밀누설죄의 보호법익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누설에 의해 위협받는 ‘국가의 기능’이고, “상급기관에 대한 정보보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가기능에 장애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 위험이 당연히 부정된다”라는 변론을 펼쳤습니다.

이 쟁점은 사실 지난 2월 선고된 또 다른 ‘사법농단’ 사건 판결에서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 영장재판 과정에서 파악한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기밀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혐의로 기소된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의 사건인데요. 당시 재판부는 행정처에 대한 수석부장판사의 정보 보고는 “법원 내부의 보고”라고 했습니다. 특히 이같은 보고가 위법하기는커녕, “사법행정상의 필요와 사법부에 대한 신뢰 확보 방안 마련”을 위해 사법행정 담당자로서 “보고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임종헌 차장에게 보고된 수사정보가 “수사기관의 범죄수사 기능에 장애를 초래했거나 그러한 위험을 유발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라고도 밝혔습니다.

나상훈 판사가 추후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다면, 그 역시 이와 같은 논리로 무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위증’ 가능성도 시사…‘사법농단’ 추가 기소자 나올까?

그 외에도 재판부는 이태종 전 원장의 공무상비밀누설 공모 여부를 살피는 과정에서, 나상훈 판사의 위증 가능성을 시사하는 판단도 내놨습니다.

나 판사는 법정에 나와 문제가 된 일부 보고서를 이 전 원장에게 보고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해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거나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라고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현직 부장판사가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선서를 하고도, 기억에 반하는 증언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목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르면 검찰이 나 판사를 기소하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데요. 다만 수사팀이 곧바로 추가 기소를 감행할지, 이 전 원장에 대한 상급심 판결을 받아본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 판사가 소속 법원장을 소위 ‘패싱(passing)’하고 법원행정처 차장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하급자인 나 판사의 보고서 송부 사실을 보고받고 이를 묵인한 것만으로도 최고책임자인 이 전 원장을 공범으로 봐야하는 것 아닌지 등을 수사팀이 항소심을 통해 더 다퉈보겠단 입장을 냈기 때문입니다.

사법농단 재판을 통해, 그동안 법원이 영장재판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조직 내부의 다른 목적을 위해 보고받고 활용한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데요. 법원행정처는 이같은 정보 보고의 근거가 된 “중요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 예규를 2018년 폐지했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판결이 정말 법리에 맞는 정당한 판결일지라도, 형사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서 확인된 조직의 여러 문제점을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법원의 당연한 책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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