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태국 시위대의 ‘군주제 개혁’ 요구 득일까 실일까?

입력 2020.09.2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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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지난 주말(19, 20일)에 열린 대규모 반정부 집회에서는 2014년 쿠데타 이후 최대 인파(주최 측 10만 명, 경찰 측 2만 명 추산)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반정부 구호가 아니라 왕실과 입헌 군주제에 대한 개혁 요구였습니다.

■ 금기를 깬 시위대..."이 나라는 군주의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는 태국 방콕의 왕궁 바로 옆에 사남 루엉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선왕이었던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국왕의 장례식과 현 와치랄롱꼰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19일 반정부 집회를 주도한 학생운동단체 지도부는 이곳 광장 바닥에 기념 동판 하나를 설치했습니다. 여기에는 "이 나라는 국민의 것이지, 군주의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태국 왕실의 주요 행사가 열린 곳에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의 동판을 설치한 것입니다.

■ 동판 설치 하루만에 사라져 "누구 소행인지 몰라"

그러나 이 동판은 설치 하루만에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광장 바닥의 콘크리트를 깨고 동판을 뜯어갔는데 방콕 경찰은 누가 이 동판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반정부 단체 지도부는 "동판이 사라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그 메시지가 국민의 마음 속에 심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반정부 집회를 개최한 주최측이 설치한 동판(위). 하지만 이 동판은 설치 하루만에 누군가에 의해 제거됐다(아래).반정부 집회를 개최한 주최측이 설치한 동판(위). 하지만 이 동판은 설치 하루만에 누군가에 의해 제거됐다(아래).

■ 왕실모독죄 최고 15년 형…쿠데타도 왕 승인받아야 성공

태국은 1932년 무혈 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을 종식하고 입헌 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왕실 특히 입헌군주제의 취지를 훼손하는 말과 행동은 금기시돼 왔습니다. 태국의 헌법에는 군주는 존경받아야 하며 권위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고 형법에도 왕실모독죄가 있어서 위반 시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푸미폰 국왕 재위 기간 70년 동안 무려 쿠데타가 무려 19차례 일어났지만 쿠데타 주도 세력이 왕의 최종 승인을 얻지 못하면 그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갈 정도로 태국에서 왕실의 권위는 막강했습니다. 간혹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도 입헌군주제나 왕실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왕실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코로나19 이후 반정부 시위에 왕실 개혁 요구 등장

코로나 19로 인한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지난 7월 18일 방콕에서 처음으로 반정부 집회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의회 해산 및 새로운 총선 실시 ▲군부 제정 헌법 개정 ▲ 반정부 인사 탄압 중지라는 3가지 요구 조건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다 8월 10일 반정부 시위 세력 가운데 일부 학생들 사이에 왕실 개혁 요구를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에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탐마삿대 집회 끝에 일부 학생이 10개 항으로 된 왕실 개혁을 촉구한 것입니다.

태국 반정부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세 손가락 경례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태국 반정부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세 손가락 경례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왕실 개혁 요구에 반정부 세력에도 우려 목소리

그러자 친 왕실 세력들은 사법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반정부 시위대 내에서도 선을 넘는 요구는 친왕실파와의 충돌을 불러와 1973년 유혈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현 쁘라윳 총리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헌법을 다시 고치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반정부 세력을 분열시키고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왕실 이슈를 꺼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이었습니다.

■ 다시 등장한 군주제 개혁 요구…배경은?

이 같은 판단 때문인지 그 뒤로 왕실 비판이나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한동안 수그러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군주제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왕실 개혁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사람들이 반정부 세력에서 아직 주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는 현 국왕의 인기가 선왕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점, 코로나 19로 인한 비상사태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기로 여겼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 층들은 사회적 정의와 평등에 대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 태국의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68)현 태국의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68)

■ "성급한 군주제 개혁은 역풍 가능성"…수위 조절 관측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반정부 세력들이 왕실이나 군주제 개혁을 단기간에 이루고자 할 경우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 왕실 개혁 이슈를 논의의 장으로만 끌고 나오되 크게 부각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태국의 이번 반정부 시위에 대해 "이런 상황은 태국이 가보지 못한 영역이다.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분석했습니다. 지금 태국이 큰 변화와 혼돈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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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2 0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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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지난 주말(19, 20일)에 열린 대규모 반정부 집회에서는 2014년 쿠데타 이후 최대 인파(주최 측 10만 명, 경찰 측 2만 명 추산)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반정부 구호가 아니라 왕실과 입헌 군주제에 대한 개혁 요구였습니다.

■ 금기를 깬 시위대..."이 나라는 군주의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는 태국 방콕의 왕궁 바로 옆에 사남 루엉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선왕이었던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국왕의 장례식과 현 와치랄롱꼰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19일 반정부 집회를 주도한 학생운동단체 지도부는 이곳 광장 바닥에 기념 동판 하나를 설치했습니다. 여기에는 "이 나라는 국민의 것이지, 군주의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태국 왕실의 주요 행사가 열린 곳에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의 동판을 설치한 것입니다.

■ 동판 설치 하루만에 사라져 "누구 소행인지 몰라"

그러나 이 동판은 설치 하루만에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광장 바닥의 콘크리트를 깨고 동판을 뜯어갔는데 방콕 경찰은 누가 이 동판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반정부 단체 지도부는 "동판이 사라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그 메시지가 국민의 마음 속에 심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반정부 집회를 개최한 주최측이 설치한 동판(위). 하지만 이 동판은 설치 하루만에 누군가에 의해 제거됐다(아래).
■ 왕실모독죄 최고 15년 형…쿠데타도 왕 승인받아야 성공

태국은 1932년 무혈 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을 종식하고 입헌 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왕실 특히 입헌군주제의 취지를 훼손하는 말과 행동은 금기시돼 왔습니다. 태국의 헌법에는 군주는 존경받아야 하며 권위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고 형법에도 왕실모독죄가 있어서 위반 시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푸미폰 국왕 재위 기간 70년 동안 무려 쿠데타가 무려 19차례 일어났지만 쿠데타 주도 세력이 왕의 최종 승인을 얻지 못하면 그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갈 정도로 태국에서 왕실의 권위는 막강했습니다. 간혹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도 입헌군주제나 왕실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왕실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코로나19 이후 반정부 시위에 왕실 개혁 요구 등장

코로나 19로 인한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지난 7월 18일 방콕에서 처음으로 반정부 집회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의회 해산 및 새로운 총선 실시 ▲군부 제정 헌법 개정 ▲ 반정부 인사 탄압 중지라는 3가지 요구 조건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다 8월 10일 반정부 시위 세력 가운데 일부 학생들 사이에 왕실 개혁 요구를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에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탐마삿대 집회 끝에 일부 학생이 10개 항으로 된 왕실 개혁을 촉구한 것입니다.

태국 반정부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세 손가락 경례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왕실 개혁 요구에 반정부 세력에도 우려 목소리

그러자 친 왕실 세력들은 사법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반정부 시위대 내에서도 선을 넘는 요구는 친왕실파와의 충돌을 불러와 1973년 유혈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현 쁘라윳 총리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헌법을 다시 고치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반정부 세력을 분열시키고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왕실 이슈를 꺼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이었습니다.

■ 다시 등장한 군주제 개혁 요구…배경은?

이 같은 판단 때문인지 그 뒤로 왕실 비판이나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한동안 수그러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군주제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왕실 개혁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사람들이 반정부 세력에서 아직 주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는 현 국왕의 인기가 선왕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점, 코로나 19로 인한 비상사태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기로 여겼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 층들은 사회적 정의와 평등에 대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 태국의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68)
■ "성급한 군주제 개혁은 역풍 가능성"…수위 조절 관측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반정부 세력들이 왕실이나 군주제 개혁을 단기간에 이루고자 할 경우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 왕실 개혁 이슈를 논의의 장으로만 끌고 나오되 크게 부각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태국의 이번 반정부 시위에 대해 "이런 상황은 태국이 가보지 못한 영역이다.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분석했습니다. 지금 태국이 큰 변화와 혼돈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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