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의 선비

입력 2020.09.23 (10:44) 수정 2020.09.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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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난중일기》를 정독하고 난 뒤에도 장군에 관한 여러 기록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됐죠. 전쟁이라는 크고도 끔찍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그때야 비로소 보였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장들은 전쟁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회한과 비탄의 기록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었죠. 그럼에도 끈질기게 읽고 또 읽어나갔습니다. 400여 년 전 이 땅에서 살다간 이들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했습니다. 그것만이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1597년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선비 강항(姜沆, 1567~1618)의 《간양록 看羊錄》은 왜란과 관련해 꽤 널리 알려진 기록입니다. 강항은 뜻하지 않은 왜란에 휘말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기까지 3년간 겪은 일들의 전말을 <섭란사적 涉亂事迹>이란 글로 남겼습니다.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 있던 사이에 터진 정유재란. 급하게 군량미를 조달하고 의병도 모았지만, 왜군의 파상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죠. 강항은 식솔들을 배에 태우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1597년 9월 14일의 일이었습니다.

본문 삽화 이미지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78회(2015년 6월 14일 방송)본문 삽화 이미지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78회(2015년 6월 14일 방송)

이순신 장군에게 가기만 한다면 살 수 있을 것이었죠. 하지만 험난한 바다는 순조로운 피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배에 오른 지 아흐레 만에 강항 일행은 왜적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형의 신주는 황망 중에 잃어버립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내 어린 자식 용(龍)과 첩의 딸 애생(愛生)을 해변 모래판에 떼어 두었더니 밀려드는 조수에 "으악, 으악, 칵, 칵" 기막힌 울음소리 들려오다가 그만 파도에 삼켜지고 말았다. 용은 내 나이 서른에 비로소 낳은 아이다. 임신 중 꿈에 새끼 용이 물속에 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용이라고 이름을 지었더니, 물속에서 죽을 줄이야 누가 생각했으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자식이 눈앞에서 파도에 휩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을 아버지의 심정이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강항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기어이 글로 옮겨놓았습니다. 차마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겠죠. 하지만 목숨은 덧없이 사그라들었고,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두 아이를 잃은 이튿날, 강항은 더 충격적인 장면에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들어차 붉고 흰 기가 햇빛에 나부끼고 있다. 배 안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닷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히 쌓였다. 울음소리 하늘에 사무치고 물결 소리 또한 목메어 운다. 이 판국에 목숨은 무엇이며 죽음은 또 무슨 죄인고! 나는 평생 겁쟁이였지만 이때만은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릅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 무력감, 그 자괴감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 또한 사람이었을진대 얼마나 겁이 났을까. 그럼에도 처참한 시신 무더기 앞에서 살고 죽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게 느껴졌을까. 그렇게 날이 저물어 밤 10시쯤 됐을 때, 강항의 장인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붙잡히고 말죠. 포박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나는 통역에게 물었다.
"적은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가?"
통역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은 사모를 쓰고 좋은 옷을 입었으므로 관원이라 판단하여 동인 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오. 그래서 경계가 아주 엄하오."
왜적은 모든 오랑캐 중에서도 몹쓸 종자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극악한 원수다. 적의 손에 잡혀 잠시라도 사는 것이 만 번 죽음만 같지 못하거늘 몸이 묶여 죽을 자유도 없구나!

강항이 상류층 신분이란 사실을 알고 일본에 포로로 끌고 가려 했다는 뜻입니다. 왜군은 심지어 누가 정실부인인지 묻고는 직계가 아닌 나머지 식솔들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거나 죽이기도 했습니다. 강항의 형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심지어 노비들조차 일찌감치 줄행랑을 친 이들은 살고, 주인을 차마 못 떠나고 남은 이들은 모조리 살해되고 말죠. 그것이 전쟁이고, 현실이었습니다.

포로가 되어 여기 이르기까지 무릇 아흐레 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하였건만 그래도 죽지 않으니 과연 사람의 목숨이 이처럼 질긴 것인가. (중략) 이날에야 왜녀가 밥 한 그릇씩을 나누어 주는데 뉘투성이 쌀에 모래가 절반으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갈이 심하여 그것을 먹었다.


강항은 그렇게 가족과 친지, 식솔들의 숱한 개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 자는 고통에 짓이겨졌습니다. 이후 강항은 끝끝내 살아남은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끌려가 기약 없는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두 형의 자식까지 6명 가운데 살아남은 아이는 어린 딸 하나뿐이었습니다. 봄비 내리는 어느 날, 강항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春雨一番過 봄비 보슬보슬 한번 지날 때
歸心一倍多 고국 생각 몇 배나 더하누나.
何時短墻下 그 언제 나직한 우리 집 담 밑에
重見乎栽花 내 손으로 가꾼 꽃 다시 볼거나.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600년 4월, 강항 일행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조선행 배에 몸을 싣습니다. 식솔 10명과 선비들과 사공 가족 등 38명을 태운 배는 천신만고 끝에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하죠. 강항은 일본에 끌려가 포로의 몸으로 조정에 세 번이나 상소를 보내고, 붙잡혀간 때로부터 돌아온 순간까지 변함없이 절개를 지켰습니다.

귀국한 직후 강항이 일본의 정세를 임금에게 은밀하게 보고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입니다. 사실 강항의 파란만장한 포로 생활을 고려하면, 실록의 기록은 대단히 무미건조합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강항의 이름이 꽤 여러 번 등장하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강항의 우여곡절을 헤아리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더군요. 게다가 그 공에 상응하는 상을 내렸다는 기록도 없고요. 정작 자신은 포로로 잡혀간 죄인이라 하여 벼슬자리도 사양하고 시골에 들어가 책 읽고 제자를 기르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강항의 문집 《수은간양록》(국립중앙박물관)강항의 문집 《수은간양록》(국립중앙박물관)

《간양록》은 강항이 생전에 쓴 책이 아닙니다. 강항이 세상을 떠나고 36년 뒤에 그의 제자인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스승의 글을 모아 펴낸 겁니다. 《간양록》은 신유한의 《해유록》과 더불어 손꼽히는 일본 기행문으로 전해집니다. 특히나 정유재란 시기의 참상과 함께 일본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란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입니다.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었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강항의 천신만고를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치욕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 선비의 기록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앞서간 이가 남긴 고난의 경험을 절절한 노래에 담은 가수 조용필의 <간양록>을 다시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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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의 선비
    • 입력 2020-09-23 10:44:41
    • 수정2020-09-23 10:55:32
    취재K
이순신 장군은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난중일기》를 정독하고 난 뒤에도 장군에 관한 여러 기록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됐죠. 전쟁이라는 크고도 끔찍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그때야 비로소 보였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장들은 전쟁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회한과 비탄의 기록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었죠. 그럼에도 끈질기게 읽고 또 읽어나갔습니다. 400여 년 전 이 땅에서 살다간 이들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했습니다. 그것만이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1597년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선비 강항(姜沆, 1567~1618)의 《간양록 看羊錄》은 왜란과 관련해 꽤 널리 알려진 기록입니다. 강항은 뜻하지 않은 왜란에 휘말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기까지 3년간 겪은 일들의 전말을 <섭란사적 涉亂事迹>이란 글로 남겼습니다.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 있던 사이에 터진 정유재란. 급하게 군량미를 조달하고 의병도 모았지만, 왜군의 파상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죠. 강항은 식솔들을 배에 태우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1597년 9월 14일의 일이었습니다.

본문 삽화 이미지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78회(2015년 6월 14일 방송)
이순신 장군에게 가기만 한다면 살 수 있을 것이었죠. 하지만 험난한 바다는 순조로운 피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배에 오른 지 아흐레 만에 강항 일행은 왜적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형의 신주는 황망 중에 잃어버립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내 어린 자식 용(龍)과 첩의 딸 애생(愛生)을 해변 모래판에 떼어 두었더니 밀려드는 조수에 "으악, 으악, 칵, 칵" 기막힌 울음소리 들려오다가 그만 파도에 삼켜지고 말았다. 용은 내 나이 서른에 비로소 낳은 아이다. 임신 중 꿈에 새끼 용이 물속에 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용이라고 이름을 지었더니, 물속에서 죽을 줄이야 누가 생각했으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자식이 눈앞에서 파도에 휩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을 아버지의 심정이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강항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기어이 글로 옮겨놓았습니다. 차마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겠죠. 하지만 목숨은 덧없이 사그라들었고,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두 아이를 잃은 이튿날, 강항은 더 충격적인 장면에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들어차 붉고 흰 기가 햇빛에 나부끼고 있다. 배 안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닷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히 쌓였다. 울음소리 하늘에 사무치고 물결 소리 또한 목메어 운다. 이 판국에 목숨은 무엇이며 죽음은 또 무슨 죄인고! 나는 평생 겁쟁이였지만 이때만은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릅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 무력감, 그 자괴감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 또한 사람이었을진대 얼마나 겁이 났을까. 그럼에도 처참한 시신 무더기 앞에서 살고 죽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게 느껴졌을까. 그렇게 날이 저물어 밤 10시쯤 됐을 때, 강항의 장인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붙잡히고 말죠. 포박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나는 통역에게 물었다.
"적은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가?"
통역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은 사모를 쓰고 좋은 옷을 입었으므로 관원이라 판단하여 동인 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오. 그래서 경계가 아주 엄하오."
왜적은 모든 오랑캐 중에서도 몹쓸 종자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극악한 원수다. 적의 손에 잡혀 잠시라도 사는 것이 만 번 죽음만 같지 못하거늘 몸이 묶여 죽을 자유도 없구나!

강항이 상류층 신분이란 사실을 알고 일본에 포로로 끌고 가려 했다는 뜻입니다. 왜군은 심지어 누가 정실부인인지 묻고는 직계가 아닌 나머지 식솔들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거나 죽이기도 했습니다. 강항의 형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심지어 노비들조차 일찌감치 줄행랑을 친 이들은 살고, 주인을 차마 못 떠나고 남은 이들은 모조리 살해되고 말죠. 그것이 전쟁이고, 현실이었습니다.

포로가 되어 여기 이르기까지 무릇 아흐레 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하였건만 그래도 죽지 않으니 과연 사람의 목숨이 이처럼 질긴 것인가. (중략) 이날에야 왜녀가 밥 한 그릇씩을 나누어 주는데 뉘투성이 쌀에 모래가 절반으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갈이 심하여 그것을 먹었다.


강항은 그렇게 가족과 친지, 식솔들의 숱한 개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 자는 고통에 짓이겨졌습니다. 이후 강항은 끝끝내 살아남은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끌려가 기약 없는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두 형의 자식까지 6명 가운데 살아남은 아이는 어린 딸 하나뿐이었습니다. 봄비 내리는 어느 날, 강항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春雨一番過 봄비 보슬보슬 한번 지날 때
歸心一倍多 고국 생각 몇 배나 더하누나.
何時短墻下 그 언제 나직한 우리 집 담 밑에
重見乎栽花 내 손으로 가꾼 꽃 다시 볼거나.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600년 4월, 강항 일행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조선행 배에 몸을 싣습니다. 식솔 10명과 선비들과 사공 가족 등 38명을 태운 배는 천신만고 끝에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하죠. 강항은 일본에 끌려가 포로의 몸으로 조정에 세 번이나 상소를 보내고, 붙잡혀간 때로부터 돌아온 순간까지 변함없이 절개를 지켰습니다.

귀국한 직후 강항이 일본의 정세를 임금에게 은밀하게 보고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입니다. 사실 강항의 파란만장한 포로 생활을 고려하면, 실록의 기록은 대단히 무미건조합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강항의 이름이 꽤 여러 번 등장하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강항의 우여곡절을 헤아리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더군요. 게다가 그 공에 상응하는 상을 내렸다는 기록도 없고요. 정작 자신은 포로로 잡혀간 죄인이라 하여 벼슬자리도 사양하고 시골에 들어가 책 읽고 제자를 기르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강항의 문집 《수은간양록》(국립중앙박물관)
《간양록》은 강항이 생전에 쓴 책이 아닙니다. 강항이 세상을 떠나고 36년 뒤에 그의 제자인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스승의 글을 모아 펴낸 겁니다. 《간양록》은 신유한의 《해유록》과 더불어 손꼽히는 일본 기행문으로 전해집니다. 특히나 정유재란 시기의 참상과 함께 일본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란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입니다.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었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강항의 천신만고를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치욕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 선비의 기록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앞서간 이가 남긴 고난의 경험을 절절한 노래에 담은 가수 조용필의 <간양록>을 다시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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