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그런거야”…친밀함에 가려진 ‘데이트 폭력’

입력 2020.09.2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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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친밀한 관계’ 아래 그늘진 폭력…방치하면 더 큰 피해 불러
가해자·피해자 모두 ‘범죄’라는 인식 가져야

지난 9일. 법정에 선 피고인은 선고를 앞두고 재판부에 피해자 측과 합의할 시간을 더 달라 말했습니다. 어리숙한 말투의 30대 남성. 그는 어떤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을까요?

사건은 석 달 전에 벌어졌습니다. 피고인 설 모 씨는 사귀던 여성과 헤어진 뒤 다시 만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재회를 반대하는 건 여성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 씨는 결국 여성과 부모님이 사는 전북 정읍의 집까지 쫓아갑니다. 주택 마당에서 여성의 아버지는 흥분한 젊은 남성에게 돌아가라며 거친 말을 건넸습니다. 설 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결국 흉기를 휘두릅니다. 여성의 아버지는 수차례 흉기에 맞은 뒤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범행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 있는 여성과 어머니에게도 흉기 난동이 이어졌습니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 살인 그리고 살인 미수.

모든 강력 사건이 그렇듯 묻힌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 사실을 보면 우발적인 한 사건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찾아낸 또 다른 범행 때문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설 씨는 피해 여성과 사귀던 당시에도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수차례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성은 다발성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설 씨는 여자친구였던 여성을 오히려 다그칩니다. 자신이 폭행한 사실을 경찰에 알리면 ‘매장하겠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흉기에 찔려 여성의 아버지가 숨진 건 한순간. 허망한 찰나였지만 살인에 이른 세월을 세어보면 사실 꽤 오래입니다. 연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소리치고, 때리고, 협박하고. 상대방의 입장과 의사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범죄,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진단서와 수사기록을 토대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고 설 씨는 1심에서 징역 25년형에 처해졌습니다.


일가족 참변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은 데이트 폭력. 놀랍게도 가해자나 피해자가 ‘범죄’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언행을 데이트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몇 가지 위험 신호를 제시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은 먼저 연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주 화를 내거나 큰소리로 호통을 치고 물건을 던지는 것도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통화 내역을 확인하려는 행위, 목숨을 빌미로 재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죠.

유형은 여러 가지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으면 데이트 폭력에 해당하는 겁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용인시병)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15년 이후 여성 대상 폭행·살인 사건 통계’ 자료를 보면 데이트폭력은 지난 한 해 동안 1만 9천9백 40건을 기록했습니다. 하루로 나누면 전국에서 매일 54건 이상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전북지방경찰청은 지난 7월부터 두 달 동안 데이트 폭력 범죄를 집중적으로 수사했습니다. 그 결과 3명을 구속하고 51명을 입건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은 사는 곳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이뤄졌고, 원치 않는 주거 침입과 감금, 협박에 이르기까지 됩니다.

전문가들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데이트 폭력을 간과하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꼬집습니다. 근절되지 않은 채 결혼하면 가정 폭력으로, 부부간의 폭력은 아동 학대로도 이어질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가 데이트 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장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도 신고와 처벌은 이제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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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해서 그런거야”…친밀함에 가려진 ‘데이트 폭력’
    • 입력 2020-09-25 08:07:32
    취재K
<strong>‘친밀한 관계’ 아래 그늘진 폭력…방치하면 더 큰 피해 불러</strong><br /><strong>가해자·피해자 모두 ‘범죄’라는 인식 가져야</strong>
지난 9일. 법정에 선 피고인은 선고를 앞두고 재판부에 피해자 측과 합의할 시간을 더 달라 말했습니다. 어리숙한 말투의 30대 남성. 그는 어떤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을까요?

사건은 석 달 전에 벌어졌습니다. 피고인 설 모 씨는 사귀던 여성과 헤어진 뒤 다시 만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재회를 반대하는 건 여성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 씨는 결국 여성과 부모님이 사는 전북 정읍의 집까지 쫓아갑니다. 주택 마당에서 여성의 아버지는 흥분한 젊은 남성에게 돌아가라며 거친 말을 건넸습니다. 설 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결국 흉기를 휘두릅니다. 여성의 아버지는 수차례 흉기에 맞은 뒤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범행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 있는 여성과 어머니에게도 흉기 난동이 이어졌습니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 살인 그리고 살인 미수.

모든 강력 사건이 그렇듯 묻힌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 사실을 보면 우발적인 한 사건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찾아낸 또 다른 범행 때문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설 씨는 피해 여성과 사귀던 당시에도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수차례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성은 다발성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설 씨는 여자친구였던 여성을 오히려 다그칩니다. 자신이 폭행한 사실을 경찰에 알리면 ‘매장하겠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흉기에 찔려 여성의 아버지가 숨진 건 한순간. 허망한 찰나였지만 살인에 이른 세월을 세어보면 사실 꽤 오래입니다. 연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소리치고, 때리고, 협박하고. 상대방의 입장과 의사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범죄,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진단서와 수사기록을 토대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고 설 씨는 1심에서 징역 25년형에 처해졌습니다.


일가족 참변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은 데이트 폭력. 놀랍게도 가해자나 피해자가 ‘범죄’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언행을 데이트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몇 가지 위험 신호를 제시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은 먼저 연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주 화를 내거나 큰소리로 호통을 치고 물건을 던지는 것도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통화 내역을 확인하려는 행위, 목숨을 빌미로 재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죠.

유형은 여러 가지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으면 데이트 폭력에 해당하는 겁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용인시병)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15년 이후 여성 대상 폭행·살인 사건 통계’ 자료를 보면 데이트폭력은 지난 한 해 동안 1만 9천9백 40건을 기록했습니다. 하루로 나누면 전국에서 매일 54건 이상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전북지방경찰청은 지난 7월부터 두 달 동안 데이트 폭력 범죄를 집중적으로 수사했습니다. 그 결과 3명을 구속하고 51명을 입건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은 사는 곳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이뤄졌고, 원치 않는 주거 침입과 감금, 협박에 이르기까지 됩니다.

전문가들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데이트 폭력을 간과하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꼬집습니다. 근절되지 않은 채 결혼하면 가정 폭력으로, 부부간의 폭력은 아동 학대로도 이어질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가 데이트 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장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도 신고와 처벌은 이제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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