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 하면 침수에, 이젠 지뢰까지!”…접경지에 산다는 것

입력 2020.09.2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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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왼쪽),2020년(오른쪽)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수해 현장

1996년(왼쪽),2020년(오른쪽)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수해 현장

■ 한 마을, 3번이나 저수지로…"못 살겠어요!"

강원도 접경지역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는 현재 66세대가 사는 민통선 마을입니다. 지난 장마에 온 마을이 물에 잠겨 주택 68채가 침수됐고 이재민 139명이 발생했습니다.

주민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인 농촌 마을에서 수해 복구를 하는 어르신들은 취재진에게 벌써 이번 수해가 세 번째라며 황망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실제로 이길리는 1996년과 1999년 그리고 올해까지 3번이나 큰 수해를 입었습니다.

왜 이렇게 수해가 자주 나는 걸까요?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마을이 위치한 곳이 옛 한탄강 지류 하천 바닥 자리였다고 증언합니다. 자연 습지를 개간하여 만든 곳으로 수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겁니다.

주민들이 살고자 했던 땅은 원래 여기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비교적 안전한 고지대에 자리를 잡기로 하고 고사도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금의 터에 살라고 했다는 겁니다. 목적은 1979년 북한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 조성 당시부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종락 할아버지는 "수해가 예견된 터여서 살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는데도 억지로 살게 하더니 이 꼴이 났어. 세 번이나 수해를 겪고 나니 온몸이 아프고 비만 와도 몸이 굳어 더는 못 살겠다"라며, 지친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 지뢰밭이 됐더라도 수확은 해야지…"전쟁터 나가는 심정"

2020년 9월 3일, 농경지 주변 빨간 깃발. 지뢰 발견 지점을 표시2020년 9월 3일, 농경지 주변 빨간 깃발. 지뢰 발견 지점을 표시

마을에 물이 빠지고 나니, 이제는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장맛비와 함께 마을로 지뢰가 밀려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접경지에 살면서 지뢰에는 제법 익숙해졌는데도, 지금은 집 대문에서도, 마당에서도 지뢰가 발견되다 보니 불안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리된 콘크리트 길로만 다니고 흙이 쌓여있는 곳은 밟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뢰가 터질 수 있습니다."

철원 이길리 수해현장에 간 취재진이 민간인 통제선 앞에서 출입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군 초소 앞에서 들은 첫 공지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수해 복구와 함께 군부대의 지뢰 제거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주로 주택 지역과 농로, 하천을 중심으로 수색이 이뤄졌는데요. 이달 중순까지 강원도 접경지역에서 발견된 지뢰만 220여 발이 넘습니다.

2020년 9월 23일, 접근금지 표시가 돼 있는 논에서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2020년 9월 23일, 접근금지 표시가 돼 있는 논에서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

그런데다 농경지는 아직 지뢰 제거 작업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뢰를 찾으려면 논에 들어가야 하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농작물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군에서 뿌린 지뢰니 국방부에서 책임지고 제거작업을 하되, 망가진 농작물에 대해서는 피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지뢰 제거 작업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보상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보상이 어렵다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한해 농사를 다 버리게 생긴 주민들은 결국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논에 콤바인 하나에 의지한 채 들어가고 상황입니다.

■ "지뢰밭에 방치된 농부들…우리는 국민이 아닌가요?”...결국 청와대로

2020년 9월 16일, 강원도 철원 농민 최종수 씨가 청와대 앞에서 ‘지뢰 제거와 농경지 수확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1인 시위.2020년 9월 16일, 강원도 철원 농민 최종수 씨가 청와대 앞에서 ‘지뢰 제거와 농경지 수확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1인 시위.

처지가 이렇다 보니 주민들은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먼저 철원군 지뢰피해대책위원장 최종수 씨는 이달 6일부터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최 씨는 자신의 논둑에서 M16, M12를 비롯한 지뢰가 여러 개 나왔고, 옆 마을에서도 폭풍 지뢰라 불리는 M14 지뢰가 나오는 등 마을 농경지 주변 곳곳에서 지뢰가 나와 안전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법이 없다면, 지금 대통령령이라도 발동해서 위험지역으로 선포하고 주민의 안전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서는 철원군 접경지 주민들을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최 씨의 이 외로운 시위는 열흘 간 이어졌습니다.

2020년 9월 21일, 청와대 앞에서 강원도 철원군 이길리 주민들이 ‘지뢰 제거와 집단 이주’를 요구하며 단체 시위2020년 9월 21일, 청와대 앞에서 강원도 철원군 이길리 주민들이 ‘지뢰 제거와 집단 이주’를 요구하며 단체 시위

최 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자, 이번엔 마을 주민들이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주축이 되어 30여 명이 피켓을 들고 섰는데요.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마당에 있는 지뢰는 누가 가져다 놓았나요? 논밭에 있는 150발 지뢰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안전한 곳에서 내 자손들이 살게 해주세요. 제발.'

'40년 전 나랏님이 북한에 자랑하고자 조성해놓은 우리마을. 밤이면 불침번에 물난리, 지뢰 난리 살 수가 없어요.'

간절한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농사지으러 가는 길이 꼭 전쟁 나가는 것 같아요."

지뢰가 숨어있을 농경지에 나가는 게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다는 농민들은 군인의 심정으로 안전대책 마련을 요청하며 청와대에 보낼 손발톱을 깎았습니다.

고된 농사일에 손톱이 닳아 깎을 것도 없던 고령의 농부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청와대에 큰절을 한 뒤. '비무장지대 유실 지뢰의 위험 근본적 해결'과 '농경지 지뢰 피해 지역 작물보상비 지급' 등을 요청하는 호소문과 건의문을 청와대에 전달했습니다.

■ "물폭탄, 지뢰폭탄…이제는 떠나고 싶다."

계속되는 수해에 지뢰 폭발 위험까지 이어지면서, 주민들은 숙원사업인 집단이주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집단이주는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모양새인데요.

주민들은 집단이주를 위해 뜻을 모으고, 이주하고자 하는 터도 선정했습니다. 지금 마을에서 800m 정도 떨어진 67,000㎡ 넓이의 고지대인데요.

하지만 이곳도 군사규제지역이라 마음대로 건물 하나 짓기 어려운 곳입니다. 이에, 철원군은 국방부에 규제 완화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군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다만, 더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이 나와야 군부대 훈련이나 작전 수행상 어려운 점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확답은 미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입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주주택 조성사업으로 140여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지만, 이 돈은 집단이주 지역의 도로와 전기,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조성에 사용될 돈입니다.

주민들은, 개별적으로 집터를 마련하고 새로 집을 짓기 위해서는 한 가구당 2억 원 정도는 드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비용이 1,600만 원에 불과해 현실적으로 이주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합니다.

이에 강원도와 철원군은 행정안전부에 집단이주를 위한 특별교부세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연 습지였던 이길리를 환경부가 매입해 국가생태습지로 조성하고 그 매수비용으로 주민 이주를 돕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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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핏 하면 침수에, 이젠 지뢰까지!”…접경지에 산다는 것
    • 입력 2020-09-26 10:21:07
    취재K

1996년(왼쪽),2020년(오른쪽)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수해 현장

■ 한 마을, 3번이나 저수지로…"못 살겠어요!"

강원도 접경지역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는 현재 66세대가 사는 민통선 마을입니다. 지난 장마에 온 마을이 물에 잠겨 주택 68채가 침수됐고 이재민 139명이 발생했습니다.

주민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인 농촌 마을에서 수해 복구를 하는 어르신들은 취재진에게 벌써 이번 수해가 세 번째라며 황망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실제로 이길리는 1996년과 1999년 그리고 올해까지 3번이나 큰 수해를 입었습니다.

왜 이렇게 수해가 자주 나는 걸까요?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마을이 위치한 곳이 옛 한탄강 지류 하천 바닥 자리였다고 증언합니다. 자연 습지를 개간하여 만든 곳으로 수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겁니다.

주민들이 살고자 했던 땅은 원래 여기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비교적 안전한 고지대에 자리를 잡기로 하고 고사도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금의 터에 살라고 했다는 겁니다. 목적은 1979년 북한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 조성 당시부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종락 할아버지는 "수해가 예견된 터여서 살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는데도 억지로 살게 하더니 이 꼴이 났어. 세 번이나 수해를 겪고 나니 온몸이 아프고 비만 와도 몸이 굳어 더는 못 살겠다"라며, 지친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 지뢰밭이 됐더라도 수확은 해야지…"전쟁터 나가는 심정"

2020년 9월 3일, 농경지 주변 빨간 깃발. 지뢰 발견 지점을 표시
마을에 물이 빠지고 나니, 이제는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장맛비와 함께 마을로 지뢰가 밀려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접경지에 살면서 지뢰에는 제법 익숙해졌는데도, 지금은 집 대문에서도, 마당에서도 지뢰가 발견되다 보니 불안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리된 콘크리트 길로만 다니고 흙이 쌓여있는 곳은 밟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뢰가 터질 수 있습니다."

철원 이길리 수해현장에 간 취재진이 민간인 통제선 앞에서 출입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군 초소 앞에서 들은 첫 공지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수해 복구와 함께 군부대의 지뢰 제거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주로 주택 지역과 농로, 하천을 중심으로 수색이 이뤄졌는데요. 이달 중순까지 강원도 접경지역에서 발견된 지뢰만 220여 발이 넘습니다.

2020년 9월 23일, 접근금지 표시가 돼 있는 논에서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
그런데다 농경지는 아직 지뢰 제거 작업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뢰를 찾으려면 논에 들어가야 하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농작물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군에서 뿌린 지뢰니 국방부에서 책임지고 제거작업을 하되, 망가진 농작물에 대해서는 피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지뢰 제거 작업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보상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보상이 어렵다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한해 농사를 다 버리게 생긴 주민들은 결국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논에 콤바인 하나에 의지한 채 들어가고 상황입니다.

■ "지뢰밭에 방치된 농부들…우리는 국민이 아닌가요?”...결국 청와대로

2020년 9월 16일, 강원도 철원 농민 최종수 씨가 청와대 앞에서 ‘지뢰 제거와 농경지 수확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1인 시위.
처지가 이렇다 보니 주민들은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먼저 철원군 지뢰피해대책위원장 최종수 씨는 이달 6일부터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최 씨는 자신의 논둑에서 M16, M12를 비롯한 지뢰가 여러 개 나왔고, 옆 마을에서도 폭풍 지뢰라 불리는 M14 지뢰가 나오는 등 마을 농경지 주변 곳곳에서 지뢰가 나와 안전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법이 없다면, 지금 대통령령이라도 발동해서 위험지역으로 선포하고 주민의 안전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서는 철원군 접경지 주민들을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최 씨의 이 외로운 시위는 열흘 간 이어졌습니다.

2020년 9월 21일, 청와대 앞에서 강원도 철원군 이길리 주민들이 ‘지뢰 제거와 집단 이주’를 요구하며 단체 시위
최 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자, 이번엔 마을 주민들이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주축이 되어 30여 명이 피켓을 들고 섰는데요.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마당에 있는 지뢰는 누가 가져다 놓았나요? 논밭에 있는 150발 지뢰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안전한 곳에서 내 자손들이 살게 해주세요. 제발.'

'40년 전 나랏님이 북한에 자랑하고자 조성해놓은 우리마을. 밤이면 불침번에 물난리, 지뢰 난리 살 수가 없어요.'

간절한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농사지으러 가는 길이 꼭 전쟁 나가는 것 같아요."

지뢰가 숨어있을 농경지에 나가는 게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다는 농민들은 군인의 심정으로 안전대책 마련을 요청하며 청와대에 보낼 손발톱을 깎았습니다.

고된 농사일에 손톱이 닳아 깎을 것도 없던 고령의 농부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청와대에 큰절을 한 뒤. '비무장지대 유실 지뢰의 위험 근본적 해결'과 '농경지 지뢰 피해 지역 작물보상비 지급' 등을 요청하는 호소문과 건의문을 청와대에 전달했습니다.

■ "물폭탄, 지뢰폭탄…이제는 떠나고 싶다."

계속되는 수해에 지뢰 폭발 위험까지 이어지면서, 주민들은 숙원사업인 집단이주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집단이주는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모양새인데요.

주민들은 집단이주를 위해 뜻을 모으고, 이주하고자 하는 터도 선정했습니다. 지금 마을에서 800m 정도 떨어진 67,000㎡ 넓이의 고지대인데요.

하지만 이곳도 군사규제지역이라 마음대로 건물 하나 짓기 어려운 곳입니다. 이에, 철원군은 국방부에 규제 완화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군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다만, 더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이 나와야 군부대 훈련이나 작전 수행상 어려운 점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확답은 미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입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주주택 조성사업으로 140여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지만, 이 돈은 집단이주 지역의 도로와 전기,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조성에 사용될 돈입니다.

주민들은, 개별적으로 집터를 마련하고 새로 집을 짓기 위해서는 한 가구당 2억 원 정도는 드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비용이 1,600만 원에 불과해 현실적으로 이주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합니다.

이에 강원도와 철원군은 행정안전부에 집단이주를 위한 특별교부세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연 습지였던 이길리를 환경부가 매입해 국가생태습지로 조성하고 그 매수비용으로 주민 이주를 돕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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