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 ‘미투’ 가해자 유죄·파면까지…2년 넘게 걸렸다

입력 2020.10.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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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위력으로 피해자들을 추행한 사실이 인정되고, 피고인의 고의도 인정된다. 따라서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난 6월,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은 업무상 위력 추행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 박 모 씨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는 경기도의 한 사립학교 행정실장이었고, 피해자들은 행정실에서 일하던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날 유죄 선고는 해당 학교에 성폭력 피해 신고가 접수된 지 2년 1개월여 만에 나왔습니다. 2018년 박 씨에 대한 학교성희롱심의위원회의 ‘파면’ 의결과 이어진 KBS 취재(▶관련 기사: 사립학교라서…사학 장벽에 부딪힌 ‘미투’ 외침)에도 무응답·무대응으로 일관했던 학교법인은, 1심 판결이 선고된 뒤에야 박 씨를 파면 처리했습니다.

■ 법정으로 간 ‘미투’ …피고인도, 증인들도 “범행 모른다”

사실 피해자들이 박 씨로부터 겪은 일 중 모두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2018년 3월 회식 후 당구장에서 행정실 직원들과 당구를 치던 중 피해자 A 씨에게 “빨리 치라”고 말하면서 A 씨의 팔을 잡아끌고 겨드랑이 안쪽 부위를 잡은 행위 ▲당구장을 나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이동하던 중 A 씨의 왼쪽 겨드랑이 안쪽 부위를 주무른 행위 ▲2018년 4월 학교 행정실에서 직원들과 저녁을 시켜먹던 중, 다리 치수를 재겠다며 정장바지를 입고 있던 피해자 B 씨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어 오른쪽 허벅지에 줄자를 둘러 둘레를 잰 행위 ▲2018년 5월 학교 워크숍 장소에서 속옷 차림으로 B 씨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가, B 씨의 볼을 손가락으로 찌른 행위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가던 휴게소 주차장에서, B 씨에게 다가가 갑자기 어깨를 감싸며 “어땠어? 재밌었지”라고 말한 점 등,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어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한 부분들만 지난해 6월 기소됐습니다. 증거는 ‘미투’에 나선 피해자들의 진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박 씨는 법정에 가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줄자로 B 씨의 허벅지를 잰 사실만 있고, 나머지 행동은 아예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허벅지를 줄자로 잰 행위 역시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고 추행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전·현직 행정실 직원들의 법정 증언도 비슷했습니다. “피해자가 허벅지 측정에 동의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였고 항의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피고인이 겨드랑이를 주무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피고인과 제가 나머지 일행들을 앞장서서 걸어갔기 때문에, 피고인이 피해자를 추행할 가능성이 없다”라는 등, 피고인인 박 씨에게 유리한 증언들이 주로 이어졌습니다.

■ 뒤바뀐 진술과 방조자들, 피고인의 ‘실세’…진실 가려낸 법원

하지만 재판부는 이같은 관련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우선 전·현직 행정실 직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일관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진술이 수사와 재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실제 경험하지 않으면 재연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던 점과 대비됩니다.

해당 직원들이 박 씨와 가깝게 지내면서 성폭력에 관여하거나 적어도 문제를 방조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본인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최소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상황을 축소해 진술할 동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증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고려했습니다. 박 씨는 행정실장에서 직위해제된 이후에도 학교에 나타나 행정업무에 계속 관여하고 있었고, 한 행정실 직원에게는 증언 전날 전화를 걸어 “재판 때 잘 (증언)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공소사실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박 씨의 성희롱성 언행도 판단에 일부 영향을 줬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을 비롯해 다른 여성직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피고인이 평소 여성직원들에게 성적 발언이나 신체접촉을 빈번히 한 사실”, “여러 차례의 성희롱 피해를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행정실의 20대 여성 직원에게도 워크숍 장소에서 “어차피 씻을 거면 여기(거실)서부터 벗고 가라”는 취지로 말하는 등 “성적 모욕이 되는 언사를 거리낌없이 한 사실”이 있고, 이 역시 범행을 추단케하는 정황이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재판부는 박 씨의 범행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을 택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성추행 정도)가 비교적 중하지는 않더라도, 행정실장이 20대 초반의 직원들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피해자들이 입은 성적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에 비춰 그 죄책이 무겁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들의 입은 2차 피해도 문제였습니다. 우선 B 씨는 성폭력을 당한 뒤 학교를 그만 뒀습니다. A 씨는 박 씨의 영향력이 여전한 학교에서 고통스럽게 근무하고 있는데, 박 씨가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구명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부정적 소문이 학내에 퍼져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 지지받지 못한 피해자…“수사와 재판, 생명줄과 같았다”

어렵사리 받아낸 유죄 판결. 서면 인터뷰를 통해 피해자 A 씨에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가해자의 기소 소식을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았던 그는, 이번에도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유죄라는 결과를 받자마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이제까지 겪었던 고통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만큼 두려움이 커서였을까? 유죄라는 결과를 받아 가슴이 벅찼던 것일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A 씨)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직장과 언론사, 수사기관, 법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피해 사실을 말해온 A 씨이지만, 무죄가 나오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은 늘 있었습니다. 그의 ‘미투’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연대를 받지 못한 외로운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립학교재단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실세’ 행정실장의 성폭력을 고발한 어린 행정실 직원을 적극 지지하는 동료는 드물었습니다. 사나운 말들만 끊임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애초에 피해자인 나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일들은 한순간 산산조각 났다. 가해자 보호와 가해자 걱정뿐. 직장 상사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도 내 편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진짜 맞냐, 내눈으로 못봤으니 못 믿겠다”, “학교 이미지 망가트리고 시끄럽게 하는 X, 꽃뱀, 예민한 여자”, “남자였으면 귀싸대기를 때렸다” “성희롱 전문가 아니냐” “굳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야 하냐” 등 너무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협박 아닌 협박까지 있었다. 많이 무서웠고 두렵고 불안했다. 나에 대한 소문들이 다 진실이 될까봐 두려웠고, 정말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 아닌지 겁이 났다. 나의 피해가 한순간 거짓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항상 두렵고 불안 속에 일상을 살았다. ” (A 씨)

그런 A 씨에게는 수사와 재판 과정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했다고 합니다. 법적 절차가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은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치 생명줄과 같았다고 A 씨는 말했습니다. 박 씨가 기소된 날에는 오랜만에 숨이 쉬어졌고 약없이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으며, 늘 거대한 벽과 마주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재판 결과가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받은 고통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는 특히 가해자의 재판에서 증언한 경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피해사실을 신고했고 가해자가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피해자로서 꼭 증언을 하러 가면 좋겠다. 피해자들이 무섭고 겁나서 증언하러 가기를 꺼리는 것을 잘 안다. 나도 가해자와 학교 측 사람이 내 증언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무섭고 겁이 났다. 하지만 막상 증언을 해보니, 그 자리에서 내가 용기를 가지고 판사님 앞에서 이야기 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다. 막상 해보면 또 별 게 아니다. 안 가고 미련이 남는 것보다, 부딪혀보는 게 더 낫다.” (A 씨)

가해자 박 씨는 1심 판결에 항소했습니다. A 씨 앞엔 더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A 씨는 힘들더라도 끝까지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렵게 지나온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새롭게 얻은 것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잘한 건지, 이런 상황이 또 일어났을 때 똑같이 ‘미투’를 외칠 것인지는 많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피해를 당한 기억이 남아있는데 그냥 참고 넘어 갔더라면, 가해자는 영영 없고 내 상처만 평생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었을 것 같다.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나오는 걸 보게 됐다면, 왜 진작 내가 먼저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이젠 나 같은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게 돼서 좋다.” (A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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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립학교 ‘미투’ 가해자 유죄·파면까지…2년 넘게 걸렸다
    • 입력 2020-10-10 11:02:58
    취재K

“피고인이 위력으로 피해자들을 추행한 사실이 인정되고, 피고인의 고의도 인정된다. 따라서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난 6월,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은 업무상 위력 추행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 박 모 씨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는 경기도의 한 사립학교 행정실장이었고, 피해자들은 행정실에서 일하던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날 유죄 선고는 해당 학교에 성폭력 피해 신고가 접수된 지 2년 1개월여 만에 나왔습니다. 2018년 박 씨에 대한 학교성희롱심의위원회의 ‘파면’ 의결과 이어진 KBS 취재(▶관련 기사: 사립학교라서…사학 장벽에 부딪힌 ‘미투’ 외침)에도 무응답·무대응으로 일관했던 학교법인은, 1심 판결이 선고된 뒤에야 박 씨를 파면 처리했습니다.

■ 법정으로 간 ‘미투’ …피고인도, 증인들도 “범행 모른다”

사실 피해자들이 박 씨로부터 겪은 일 중 모두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2018년 3월 회식 후 당구장에서 행정실 직원들과 당구를 치던 중 피해자 A 씨에게 “빨리 치라”고 말하면서 A 씨의 팔을 잡아끌고 겨드랑이 안쪽 부위를 잡은 행위 ▲당구장을 나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이동하던 중 A 씨의 왼쪽 겨드랑이 안쪽 부위를 주무른 행위 ▲2018년 4월 학교 행정실에서 직원들과 저녁을 시켜먹던 중, 다리 치수를 재겠다며 정장바지를 입고 있던 피해자 B 씨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어 오른쪽 허벅지에 줄자를 둘러 둘레를 잰 행위 ▲2018년 5월 학교 워크숍 장소에서 속옷 차림으로 B 씨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가, B 씨의 볼을 손가락으로 찌른 행위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가던 휴게소 주차장에서, B 씨에게 다가가 갑자기 어깨를 감싸며 “어땠어? 재밌었지”라고 말한 점 등,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어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한 부분들만 지난해 6월 기소됐습니다. 증거는 ‘미투’에 나선 피해자들의 진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박 씨는 법정에 가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줄자로 B 씨의 허벅지를 잰 사실만 있고, 나머지 행동은 아예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허벅지를 줄자로 잰 행위 역시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고 추행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전·현직 행정실 직원들의 법정 증언도 비슷했습니다. “피해자가 허벅지 측정에 동의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였고 항의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피고인이 겨드랑이를 주무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피고인과 제가 나머지 일행들을 앞장서서 걸어갔기 때문에, 피고인이 피해자를 추행할 가능성이 없다”라는 등, 피고인인 박 씨에게 유리한 증언들이 주로 이어졌습니다.

■ 뒤바뀐 진술과 방조자들, 피고인의 ‘실세’…진실 가려낸 법원

하지만 재판부는 이같은 관련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우선 전·현직 행정실 직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일관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진술이 수사와 재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실제 경험하지 않으면 재연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던 점과 대비됩니다.

해당 직원들이 박 씨와 가깝게 지내면서 성폭력에 관여하거나 적어도 문제를 방조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본인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최소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상황을 축소해 진술할 동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증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고려했습니다. 박 씨는 행정실장에서 직위해제된 이후에도 학교에 나타나 행정업무에 계속 관여하고 있었고, 한 행정실 직원에게는 증언 전날 전화를 걸어 “재판 때 잘 (증언)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공소사실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박 씨의 성희롱성 언행도 판단에 일부 영향을 줬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을 비롯해 다른 여성직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피고인이 평소 여성직원들에게 성적 발언이나 신체접촉을 빈번히 한 사실”, “여러 차례의 성희롱 피해를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행정실의 20대 여성 직원에게도 워크숍 장소에서 “어차피 씻을 거면 여기(거실)서부터 벗고 가라”는 취지로 말하는 등 “성적 모욕이 되는 언사를 거리낌없이 한 사실”이 있고, 이 역시 범행을 추단케하는 정황이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재판부는 박 씨의 범행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을 택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성추행 정도)가 비교적 중하지는 않더라도, 행정실장이 20대 초반의 직원들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피해자들이 입은 성적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에 비춰 그 죄책이 무겁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들의 입은 2차 피해도 문제였습니다. 우선 B 씨는 성폭력을 당한 뒤 학교를 그만 뒀습니다. A 씨는 박 씨의 영향력이 여전한 학교에서 고통스럽게 근무하고 있는데, 박 씨가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구명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부정적 소문이 학내에 퍼져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 지지받지 못한 피해자…“수사와 재판, 생명줄과 같았다”

어렵사리 받아낸 유죄 판결. 서면 인터뷰를 통해 피해자 A 씨에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가해자의 기소 소식을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았던 그는, 이번에도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유죄라는 결과를 받자마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이제까지 겪었던 고통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만큼 두려움이 커서였을까? 유죄라는 결과를 받아 가슴이 벅찼던 것일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A 씨)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직장과 언론사, 수사기관, 법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피해 사실을 말해온 A 씨이지만, 무죄가 나오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은 늘 있었습니다. 그의 ‘미투’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연대를 받지 못한 외로운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립학교재단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실세’ 행정실장의 성폭력을 고발한 어린 행정실 직원을 적극 지지하는 동료는 드물었습니다. 사나운 말들만 끊임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애초에 피해자인 나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일들은 한순간 산산조각 났다. 가해자 보호와 가해자 걱정뿐. 직장 상사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도 내 편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진짜 맞냐, 내눈으로 못봤으니 못 믿겠다”, “학교 이미지 망가트리고 시끄럽게 하는 X, 꽃뱀, 예민한 여자”, “남자였으면 귀싸대기를 때렸다” “성희롱 전문가 아니냐” “굳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야 하냐” 등 너무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협박 아닌 협박까지 있었다. 많이 무서웠고 두렵고 불안했다. 나에 대한 소문들이 다 진실이 될까봐 두려웠고, 정말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 아닌지 겁이 났다. 나의 피해가 한순간 거짓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항상 두렵고 불안 속에 일상을 살았다. ” (A 씨)

그런 A 씨에게는 수사와 재판 과정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했다고 합니다. 법적 절차가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은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치 생명줄과 같았다고 A 씨는 말했습니다. 박 씨가 기소된 날에는 오랜만에 숨이 쉬어졌고 약없이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으며, 늘 거대한 벽과 마주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재판 결과가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받은 고통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는 특히 가해자의 재판에서 증언한 경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피해사실을 신고했고 가해자가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피해자로서 꼭 증언을 하러 가면 좋겠다. 피해자들이 무섭고 겁나서 증언하러 가기를 꺼리는 것을 잘 안다. 나도 가해자와 학교 측 사람이 내 증언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무섭고 겁이 났다. 하지만 막상 증언을 해보니, 그 자리에서 내가 용기를 가지고 판사님 앞에서 이야기 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다. 막상 해보면 또 별 게 아니다. 안 가고 미련이 남는 것보다, 부딪혀보는 게 더 낫다.” (A 씨)

가해자 박 씨는 1심 판결에 항소했습니다. A 씨 앞엔 더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A 씨는 힘들더라도 끝까지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렵게 지나온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새롭게 얻은 것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잘한 건지, 이런 상황이 또 일어났을 때 똑같이 ‘미투’를 외칠 것인지는 많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피해를 당한 기억이 남아있는데 그냥 참고 넘어 갔더라면, 가해자는 영영 없고 내 상처만 평생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었을 것 같다.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나오는 걸 보게 됐다면, 왜 진작 내가 먼저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이젠 나 같은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게 돼서 좋다.” (A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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