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화재 ‘판박이’…“불나면 30~49층이 더 위험한데”

입력 2020.10.12 (16:5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0년 10월 1일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

2010년 10월 1일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

10년 전 일입니다. 오전 취재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던 순간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해운대 고층 건물에서 큰불이 났는데…."

촬영기자와 함께 달려간 현장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층 오피스텔의 외벽을 따라 불길이 'V'자 형태로 치솟고 있었습니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2010년 10월 1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발생한 '우신골든스위트' 화재였습니다.

2020년 10월 8일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2020년 10월 8일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

■'판박이 화재'…외벽따라 순식간에 꼭대기 층까지

지난 8일 밤, 울산의 한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화면으로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순간 10년 전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가 떠올랐습니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도심 고층 건물에서 난 대형 화재는 판박이처럼 비슷합니다.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의 경우 건물 4층에서 시작된 불이 불과 30분 만에 꼭대기 층인 38층까지 번졌습니다. 바닷바람이 고층 건물에 맞부딪히며 상승 기류로 변했고, 불길을 순식간에 위층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울산의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 때도 강풍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불길이 강한 바람을 타고 불과 20만 분에 33층짜리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습니다.

대형 화재가 발생한 두 건물 모두 알루미늄 패널이 외벽을 둘러싼 것도 같습니다. 소방 전문가들은 이 알루미늄 패널이 불쏘시개 역할을 해 불을 키운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KBS 재난방송 전문위원인 최현호 한국화재감식학회 기술위원장은 "알루미늄 보드 뒤에 PE(폴리에틸렌) 보드가 받쳐주고 있는데, 이 PE 보드가 가연성이라서 연소 확대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를 계기로 30층 이상 건물에는 불에 잘 타지 않는 외장재를 사용해야 하지만,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는 1년 전인 2009년 4월에 준공돼 법 적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부산국제금융센터(63층)에 설치된 피난안전구역. 화재 때 3천여 명 대피 가능부산국제금융센터(63층)에 설치된 피난안전구역. 화재 때 3천여 명 대피 가능

■'준초고층'(30~49층) 건물…"화재에 더 취약"

10년 사이에 부산과 울산에서 난 '판박이' 화재. 두 건물 모두 건축법상 '준초고층' 건물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50층 이상(높이 200m)은 초고층, 30~49층 사이의 건물은 '준초고층'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분류 기준이 중요한 건 건축법에 따라 적용되는 화재 대피 시설에도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38층짜리 건물인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 당시 입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은 옥상 아니면 지상뿐이었습니다. 초고층건물과 달리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건축법상 피난안전구역을 반드시 설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건축법 시행령>
준초고층 건축물에는 피난층 또는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 계단과 직접 연결되는 피난안전구역을 해당 건축물 전체 층수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층으로부터 상하 5개 층 이내에 1개소 이상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피난층 또는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 계단을 설치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예외 조항에 따라 비상계단을 확보할 경우 피난안전구역이 없어도 법을 위반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준초고층' 건물이라 하더라도 노약자나 어린이의 경우 불이 났을 때 계단으로 대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연기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에 비해 약 12배 빠르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소방대원들은 화재 때 구조 활동을 위해서라도 피난안전구역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건물에 연기가 가득 찼을 때 소방대원들은 공기통 1개를 매고 올라갈 수 있는 건 30층 정도까지입니다. 피난안전구역이 있으면 예비 공기통이나 공기 충전시설을 갖출 수 있어 구조가 더 쉽습니다.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의 경우 33층으로 준초고층이었지만, 다행히 15층과 28층에 피난안전구역이 있었습니다. 불이 나자 일부 주민들인 이곳으로 대피한 뒤 구조됐고, 소방대원들도 피난층에 대기하며 교대로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해운대소방서가 보유한 초대형 굴절 사다리차해운대소방서가 보유한 초대형 굴절 사다리차

■부산에만 500채 넘는 '준초고층'…화재 대비는?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를 계기로 부산의 고층 건물 현황을 파악해봤습니다. 30층 이상 건축물은 모두 555채. 이 가운데 초고층 건물은 38채이고, 517채는 '준초고층'입니다. 숙박과 업무시설도 있지만, 대부분 공동주택입니다.

피난안전구역 설치가 의무가 아닌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대형 화재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해운대소방서는 고층 건물 밀집 지역인 해운대 일대를 담당합니다. 그런데 이 소방서 보유의 초대형 굴절 사다리차가 닿을 수 있는 높이는 22층 정도입니다. 강풍이 불거나 야간일 경우 소방헬기 투입도 불가능합니다.

4년 전, 부산소방재난본부 합동 연구팀도 '준초고층' 건물의 화재 위험성에 주목했습니다. 이 연구팀은 노약자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은 신속한 대피가 어려우므로 예외 조항을 삭제해 피난안전구역을 확대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피난용 승강기'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불이나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콘크리트와 방화문으로 둘러싼 외벽에 피난용 승강기를 설치하면 신속한 대피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또, 화재 때 옥상 수조가 고갈될 경우에 대비해 50층 이하 건물에도 수직 배관을 2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0년 간격으로 부산과 울산에서 발생한 '준초고층' 화재 때 수백 명이 대피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특히 야간에 발생한 울산 화재 때는 주민들의 협력과 침착한 대응, 그리고 소방대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러나 '판박이' 화재는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화재 대응 체계로는 그때도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10년 전 화재 ‘판박이’…“불나면 30~49층이 더 위험한데”
    • 입력 2020-10-12 16:57:40
    취재K

2010년 10월 1일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

10년 전 일입니다. 오전 취재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던 순간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해운대 고층 건물에서 큰불이 났는데…."

촬영기자와 함께 달려간 현장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층 오피스텔의 외벽을 따라 불길이 'V'자 형태로 치솟고 있었습니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2010년 10월 1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발생한 '우신골든스위트' 화재였습니다.

2020년 10월 8일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
■'판박이 화재'…외벽따라 순식간에 꼭대기 층까지

지난 8일 밤, 울산의 한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화면으로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순간 10년 전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가 떠올랐습니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도심 고층 건물에서 난 대형 화재는 판박이처럼 비슷합니다.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의 경우 건물 4층에서 시작된 불이 불과 30분 만에 꼭대기 층인 38층까지 번졌습니다. 바닷바람이 고층 건물에 맞부딪히며 상승 기류로 변했고, 불길을 순식간에 위층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울산의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 때도 강풍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불길이 강한 바람을 타고 불과 20만 분에 33층짜리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습니다.

대형 화재가 발생한 두 건물 모두 알루미늄 패널이 외벽을 둘러싼 것도 같습니다. 소방 전문가들은 이 알루미늄 패널이 불쏘시개 역할을 해 불을 키운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KBS 재난방송 전문위원인 최현호 한국화재감식학회 기술위원장은 "알루미늄 보드 뒤에 PE(폴리에틸렌) 보드가 받쳐주고 있는데, 이 PE 보드가 가연성이라서 연소 확대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를 계기로 30층 이상 건물에는 불에 잘 타지 않는 외장재를 사용해야 하지만,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는 1년 전인 2009년 4월에 준공돼 법 적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부산국제금융센터(63층)에 설치된 피난안전구역. 화재 때 3천여 명 대피 가능
■'준초고층'(30~49층) 건물…"화재에 더 취약"

10년 사이에 부산과 울산에서 난 '판박이' 화재. 두 건물 모두 건축법상 '준초고층' 건물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50층 이상(높이 200m)은 초고층, 30~49층 사이의 건물은 '준초고층'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분류 기준이 중요한 건 건축법에 따라 적용되는 화재 대피 시설에도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38층짜리 건물인 해운대 고층 오피스텔 화재 당시 입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은 옥상 아니면 지상뿐이었습니다. 초고층건물과 달리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건축법상 피난안전구역을 반드시 설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건축법 시행령>
준초고층 건축물에는 피난층 또는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 계단과 직접 연결되는 피난안전구역을 해당 건축물 전체 층수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층으로부터 상하 5개 층 이내에 1개소 이상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피난층 또는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 계단을 설치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예외 조항에 따라 비상계단을 확보할 경우 피난안전구역이 없어도 법을 위반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준초고층' 건물이라 하더라도 노약자나 어린이의 경우 불이 났을 때 계단으로 대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연기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에 비해 약 12배 빠르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소방대원들은 화재 때 구조 활동을 위해서라도 피난안전구역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건물에 연기가 가득 찼을 때 소방대원들은 공기통 1개를 매고 올라갈 수 있는 건 30층 정도까지입니다. 피난안전구역이 있으면 예비 공기통이나 공기 충전시설을 갖출 수 있어 구조가 더 쉽습니다.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의 경우 33층으로 준초고층이었지만, 다행히 15층과 28층에 피난안전구역이 있었습니다. 불이 나자 일부 주민들인 이곳으로 대피한 뒤 구조됐고, 소방대원들도 피난층에 대기하며 교대로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해운대소방서가 보유한 초대형 굴절 사다리차
■부산에만 500채 넘는 '준초고층'…화재 대비는?

울산 주상 복합 아파트 화재를 계기로 부산의 고층 건물 현황을 파악해봤습니다. 30층 이상 건축물은 모두 555채. 이 가운데 초고층 건물은 38채이고, 517채는 '준초고층'입니다. 숙박과 업무시설도 있지만, 대부분 공동주택입니다.

피난안전구역 설치가 의무가 아닌 '준초고층' 건물의 경우 대형 화재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해운대소방서는 고층 건물 밀집 지역인 해운대 일대를 담당합니다. 그런데 이 소방서 보유의 초대형 굴절 사다리차가 닿을 수 있는 높이는 22층 정도입니다. 강풍이 불거나 야간일 경우 소방헬기 투입도 불가능합니다.

4년 전, 부산소방재난본부 합동 연구팀도 '준초고층' 건물의 화재 위험성에 주목했습니다. 이 연구팀은 노약자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은 신속한 대피가 어려우므로 예외 조항을 삭제해 피난안전구역을 확대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피난용 승강기'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불이나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콘크리트와 방화문으로 둘러싼 외벽에 피난용 승강기를 설치하면 신속한 대피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또, 화재 때 옥상 수조가 고갈될 경우에 대비해 50층 이하 건물에도 수직 배관을 2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0년 간격으로 부산과 울산에서 발생한 '준초고층' 화재 때 수백 명이 대피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특히 야간에 발생한 울산 화재 때는 주민들의 협력과 침착한 대응, 그리고 소방대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러나 '판박이' 화재는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화재 대응 체계로는 그때도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